"우아하게 화를 표현하는 법"
화가 항복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받아내는 항복인가?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다.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를 더는 지속하지 않게 하기 위해 화는 일어난다.
화는 근본적으로 생명의 자기보호기능이다.
그리고 이것은 문명화된 우리가 곧잘 상실하거나 망각해있는 기능이다. 생명을 시스템이 보호하도록 짜여진 것이 문명이다. 이 문명의 비호 속에서 생명의 생존율은 증가했으나 자기보호기능은 약화되었다. 문명의 명암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문명인들은 화를 다루기 힘들어한다. 이것이 도통 낯선 마음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문명사회에서 화는 쉽게 용인되기 어려운 마음으로 자주 치부된다. 화의 긍정은 문명의 부정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화에 대해서 가장 힘든 지점은 우리가 대체 얼마만큼 화가 난 것인지 그 화의 크기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 크기를 모른다면 그것은 정확하게 접촉될 수 없다. 그러니 화의 문제는 계속 반복된다. 접촉되지 않은 것이 접촉될 때까지 반복된다는 것은 상담심리학의 국룰이다.
우리가 화로 생각하는 것은 보통 짜증이다. 짜증도 물론 화의 계통이다. 그러나 그 변별은 분명하다.
생각과 연합된 화의 형상이 짜증이다. 보통 화를 생각으로 억누르려고 할 때 짜증으로 일어난다.
이것은 좁디 좁게 얽힌 미로 같은 논리회로를 힘겹게 지나서 배출되는 화다. 상상만으로도 아주 성가시고 머리가 아파지는 그림이다. 짜증은 그런 성질의 것이다.
어떤 심리학 트레이닝 같은 것을 받은 이들은 실은 짜증을 표현하면서 자신이 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짜증의 표현일 뿐이며, 아주 굴절되고 축소된 크기의 화다.
이야압 소리를 지르며 당당하게 서서 자신을 주장하거나, 신문지를 말아 불쌍한 곰돌이 인형을 구타하며 "소중한 나를 무시하지 말라구!" 소리치는 일 등이 대표적인 짜증의 표현이다.
여기에는 자신이 생각으로 만들어낸 자기의 정체성이 화와 연합되어 있다. 그 정체성을 강하게 주장하면 잠깐은 시원해진 듯한 생각도 들 것이다. 그러나 금방 또 짜증이 난다. 화가 접촉되지 않은 까닭이다.
화의 크기는 그 정도가 아닌데, 화는 반드시 생각이라는 것보다 큰 크기를 갖고 있다. 애초 생각으로 조작되거나 통제될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화가 항복의 목적을 위해 움직이게 하려면, 화 앞에서 가장 먼저 항복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생각이다.
생각이란 결국 언어다. 문명은 언어로 만들어졌다. 또한 정체성이란 개인이 언어로 만들어낸 개인적 문명과도 같다.
그래서 다들 표면적으로 말은 안하지만 자기가 로마제국이나 이집트제국인 줄 안다. 또는 똑똑한 제갈공명이 다스리던 촉나라라도 된다고 생각한다.
붓다가 탐진치를 말했을 때, 그것은 탐욕으로 인해 일어나는 화로 인해 우리가 어리석게 된다는 의미다. 화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생각대로 탐욕을 이루지 못했을 때 내는 화를 어리석다고 말한 것이다.
정체성은 이 탐욕의 총체다.
언어의 속성과 같다. 언어를 긁어모을수록 자신이 정신적 재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은 만연하다. 언어자본이라는 말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이처럼 언어로 자기의 정체성을 고급재산처럼 쌓아온 이는 그 정체성이 위협받는 상황이 생기면, 마치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경험하며 화를 만들어내곤 한다. 만들어낸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것이 착각에 의해 유발된 화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위협받는 일은 실제의 생명이 위협받는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언어를 숭배하며 언어가 자기를 만들어준다고 생각해온 이들만이, 언어로 만든 자기정체성이 위협받으면 그걸 생명의 위협이라고 자동반사적으로 착각하며 화를 내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착각이라고 해도 좋다. 일단은 그렇게 난 화라도 그 화의 크기를 아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야 화의 문제는 해소될 수 있다.
화의 멋진 점은, 착각 때문에 생겨났어도 일단 제대로 표현되고 나면 그 착각 자체를 함께 붕괴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당연하다. 제대로 표현되는 화는 생각을 먼저 항복시키는 까닭이다. 그렇게 생각의 부산물인 정체성도 함께 항복된다. 당당한 나로 화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표현되는 화는 바로 그 당당한 나라는 것을 무너뜨린다. 정체성은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문명인들은 어떻게든 화를 표현하지 않기 위해 짜증의 형태로만 부질없이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화를 내면 자기가 지금껏 언어로 쌓아온 그럴듯한 자기의 모습이 모두 무너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에게 전재산을 잃는 일과도 같다.
언어와, 언어로 쌓은 정체성을 자기의 재산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대개 허구를 진실로 꾀하려는 사기꾼의 성향을 갖고 있다. 문명인들은 다소간에 이 사기꾼의 기질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래성을 짓고는 자기의 왕궁이라고 말하는 이들이다.
그러니 제발 파도가 밀려오면 안된다. 그것은 간신히 쌓은 이 모래성을 산산이 무너뜨리고야 말 것이다.
화를 피하기 위해 문명인들은 이처럼 간절하다.
그러나 그 거대한 파도는 대체 어디에서 밀려온단 말인가?
아주 먼 곳에서부터 온다.
우리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쓰나미는 들이닥친다.
그리고는 촌스럽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모래성들을 모두 쓸어버린 뒤 우리에게 해변을 남긴다.
무한히 뻗어있는 저 모래사장을, 저 백색의 도화지를 선물로 남긴다.
너는 자유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화의 작용이다.
해변가에 그린 왕자그림이 놀림받았을 때 마치 자기의 목숨이 위협받기라도 한 것처럼 화를 내고 있는 이는, 실은 파도가 그 그림을 쓸어버려주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는 그 왕자그림을 그리는데 오랜 시간을 들였기에 차마 자기가 지울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놀림만 받을 팔자다. 그러할 때 저 먼 곳으로부터의 구원은, 파도의 구원은 간절해진다.
문명인들은 얼마나 화를 소망하고 있는가.
자기가 만들어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언어의 성채들이 여리고성처럼 무너지기를 그 어찌 간절히도 기원하고 있단 말인가.
짜증은 이 소망을 은폐한 화의 형상이다. 어떻게든 자기의 정체성만은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생각을 돌려가며 표출하는 화다. 그래서 어지럽다. 심지어 불가능하다.
해변가에서 자기의 그림만 놓아둔 채 파도가 자기의 그림을 놀린 사람들만 휩쓸어가기를 바라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런 화는 없다.
그렇게 없는 것을 꿈꾸기에 실제의 화가 자꾸만 접촉되지 않는 것이다.
화는 제일 먼저 생각을 항복시킨다고 나는 말했다. 그것은 정체성을 항복시키려 한다는 뜻이라고도 말했다.
왜인지는 이제 분명해졌다.
생각으로 만든 정체성이야말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첫 번째의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역사는 건설과 해체를 반복해왔다. 그 어떤 대제국이라도 반드시 무너졌다. 그리고 또 새로운 문명이 그 위에 탄생하곤 했다.
언어로 쌓은 개인적 문명의 속성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적 속성을 망각하고 있을 때 고통은 생겨난다.
제때 무너지지 못하고 단지 몸집만 불린 형태로 더욱 지속되기만 한 시스템은 반드시 인간을 억압하는 실질적 고통의 원인이 된다.
철학사에서 실존주의는 이 거대한 구조에 대한 삶의 반동이었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화와 친한 전통이다. 실존주의는 야성적이고, 파격적이며, 자유를 노래하고, 숲을 거닌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생명을 수호하기 위해 회복될 필요가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존재의 파수꾼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화를 제대로 표현하는 인간이 특히 그렇다고도 말하고 싶다.
이러한 화는 신성한 분노라고 불린다.
그 크기는 고통받던 인간이 소망하던 자유의 크기와 동일하다.
화는 저 자유의 근원으로부터 인간을 억압하는 타락한 문명을 향해 내리치는 거대한 벼락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실용적인 얘기를 하나 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화의 크기를 알고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아주 일상적인 방법이 있다. 우리 자신을 수호하기 위해 저 깊은 근원에서부터 들려오는 신성한 분노의 음성을 듣는 방법이다.
한쪽의 어금니를 가득 악물고, 가장 심한 숙취 때 위의 밑바닥까지 토해내게 되는 그 구토감으로, 가장 바닥에서부터 쇠고랑으로 그르릉 긁어올리는 소리를 내보라. 아니 그 소리가 일어나게 하라.
거울을 보면 얼굴은 몹시 추할 것이니 거울은 보지 말라. 대충 영화 속에 묘사되는 늑대인간의 표정을 닮아 있을 것이다. 고급언어로 만든 포장지는 찢어졌다. 문명인의 정체성은 이미 간 곳이 없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벼랑 끝에 몰려 생명의 위기 속에 있을 때,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그 앞에 서서 모든 수호를 다하려는 심상을 떠올려봐도 도움이 된다.
'너는 결코 죽일 수 없을 것이다.'라며 필사를 다해 항복시켜보라. 그러나 착각하면 안된다.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을 지킬 저 뇌성을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부르는 것이다.
먼 곳에서부터 다가오는 그 신성한 짐승의 소리를 들어보라.
화가 온다.
파도가 밀려온다.
얼마나 크든 이제 아무 상관없다.
그것은 전부가 우리 자신을 위한 그 크기다.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당당한 내가 아니라, 당도한 해변의 광경이다.
짜증 때문에 아프고 무거웠던 머리가 시원한 것은 은유적으로는 해변의 바람 덕분이며, 생리학적으로는 어금니를 악물고 그르르 울리게 한 진동이 두개골을 흔들어서다.
어느 쪽이든 파도가 우리를 자유롭게 했다.
고요한 것은 이제 해변의 늑대다.
제대로 표현된 것만이 고요해서 또 우아해지는 특권을 갖는다. 파도의 크기를 알게 된 이에게는 파도소리가 우아한 선율로 들려온다.
그것은 우리의 심장소리.
살아있는 것이 내는 고유한 진동수다.
그 살아있는 자신의 소리를 듣고 있는 이는 고요해서 우아하다.
살아서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다고 느낀다.
화가 다 이룬 것이다.
생각이나 언어나 정체성 따위는 살아있는 존재 앞에 다 항복했다.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이 이 우주의 유일한 전부였다.
이를 먼 곳까지 알려가는 영원의 파도소리에 귀기울이며 해변가에는 존재의 파수꾼이 앉아 있다. 그것은 제대로 표현된 화의 어떤 우아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