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과 주체성

"내가 있는 이야기"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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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은 주체성을 피워내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때문에 주체성은 실존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체성이라는 것을 아주 단순하게 묘사하자면, 곧 당당함이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 모든 조건과 관계없이, 즉 그 어느 조건 속에서도, 그 자리가 바로 승인된 우리의 자리인 것처럼 당당할 수 있는 그 특성, 그것이 주체성이다. 이는 아마도 이러한 목소리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곳이라도 네가 네 집처럼 있을 수 있는 네 자리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주체성은 자기 혼자 성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주체성은 반드시 타자성을 전제한다.


이 실존적 주체성이라는 표현과, 근대적 주객구도에서의 주체라는 표현이, 사실은 정반대의 현실을 지시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실존에 대한 가장 큰 오해와 착각이 생겨난다. 그것은 바로 실존은 자기 안에 갇혀 혼자만의 자유로운 현실을 추구한다는 착각이다.


이것은 진정으로 코미디다.


왜냐하면, 이처럼 실존을 자폐적 개념인 것처럼 묘사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매우 자주 근거하고 있는 철학이야말로, 진짜 자폐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실존의 가장 정반대편에 있는 개념은 바로 체계[구조]다. 이 체계를 향한 열망에서 통합주의, 전체주의, 구조주의 등이 생겨난다. 그리고 실존철학의 선구자인 키르케고르가 바라보기로는 이 체계의 철학의 정점에는 헤겔이 서있다.


헤겔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핵심적인 비판은, 헤겔의 체계는 그것이 아무리 거대하고 타자에 대한 수용력을 갖춘 것처럼 묘사될지라도, 그 체계는 애초 자기만 있는 자폐적인 현실이라는 것이다. 실제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방구석 몽상가가, 마치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하고 또 구원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믿으며 만들어낸 자기우상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베르자예프도 유사한 맥락에서 헤겔에게 비판을 가한다. 가장 자유롭지 못한 것을, 가장 자유인 것처럼 믿도록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데 헤겔은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즉, 실제로는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가장 자폐적인 현실이 마치 가장 자유로운 현실인 것처럼 착각되게 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운 주체성을 망각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체계라는 말만 떠올려봐도 확연하다. 닫혀야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 체계다. 체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폐적인 성질의 것이다.


분명하게 이 체계[구조]를 중시하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전술한 헤겔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나 정신분석은 그 대표적인 세력들이다. 또한 구체적으로 명명되지는 않더라도, 이 세상에는 근본적인 체계[구조]가 숨겨져 있으며, 그 숨겨진 체계[구조]를 파악하면 하는 만큼, 인간은 더욱 힘을 갖게 되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 세력들은 다 이 체계의 세력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실존철학 및 실존심리학, 선(禪) 등과 같이 실존적 방향성을 가진 세력들이 비판해온 반대편의 세력들을 보면 그 윤곽은 어렴풋하게 드러난다.


헤겔을 위시한 근대의 인식론적 주체를 강조하는 사조들, 실존상담이 하이데거의 영향하에 출범했던 초기부터 비판되어 왔던 정신분석, 하이데거가 진지하게 이해하기를 포기한 라캉의 사유, 실존심리학자들이 크게 저항했던 켄 윌버의 통합적 영성주의, 선에서 비판하는 인식론의 실용론적 변주라고 할 수 있는 명상주의, 그리고 체계보다도 더 권위적인 위계를 강조하는 유교를 비롯한 다양한 카스트주의 등이, 바로 실존의 반대편에 위치한 그 세력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전술한 것처럼, 유독 참 유난스럽게도 이 체계의 세력의 지지자들은 매우 자주 실존에 대해, 실존은 자기만 아는 자폐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고 모략한다.


그래서 이것이 진정 코미디인 것이다.


이는 자폐를 자유라고 말하는 이들의 자기투사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이 자폐적 현실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노래하고 있으나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혹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정말로 자유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는 실존의 사조에 그 자폐성을 투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자기투사가 유난스러운 이유는, 실존이라는 것이 이 체계의 세력에게는 가장 큰 위협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체계에 대해 실존이 위협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떠한 체계이든 간에, 실존은 반드시 그 체계를 붕괴시킨다는 데에 있다. 여리고성이 무너졌듯이, 춤추는 생명 앞에서 모든 장벽은 반드시 무너져내린다. 이것은 신성한 예언의 힘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바로 주체성의 힘이다.


주체성은 분명 힘이다. 그러나 이 주체성의 힘이라는 것은 전능하게 행사 가능한 더 커다란 위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위력의 주체를 꿈꾸던 것은 바로 근대적 인식론의 지지자들이었으며, 곧 체계의 세력의 봉사자들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이것은 체계를 숭앙하는 근대적 주체가 뿌리박고 있던 신념 중의 신념이었다. 지적으로 더 많이 알수록, 그래서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할수록, 그럼으로써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체계의 크기를 확보할수록, 인간은 더 힘있게 된다는 '지성'과 '앎'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실존은 이 신념이 지극히 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애초에 허상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 과정 속에서, 실존이 '앎' 대신에 끌고 들어온 것은 바로 '삶'이었다. 그리고 삶의 핵심적인 속성인 '모름'이었다.


"너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로 알아?"


실존이 죽음과 불안, 고독 등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 사태들에 관심을 갖는 그 이유다. 이 원초적 사태들은 인간을 모름의 자리로 정직하게 되돌린다. 아무리 지적인 성취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두터운 지식의 체계를 구축했다 할지라도, 이 모름의 실존적 사태들은 그 지성의 모래성을 순식간에 붕괴시킨다. 더는 기만하며 아는 척 속일 수 없게 만든다.


떠올려보면 이 역시 코미디다.


집단무의식이 어떻고, 인류의 위대한 예지가 어떻고, 역사적 진보의 필연적 구조가 어떻고, 언어 너머의 실재계가 어떻고 하며, 그 모든 고급언어들로 현란하게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던 지성적 주체들이, 정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인 자기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이 현실은 분명 코미디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체계의 세력들, 곧 지성주의자들이자, 앎의 신념주의자들은, 실존을 위협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실존 앞에서는 자신이 너무나 우스꽝스러워지는 까닭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는 말 앞에,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눈치채며 부끄러워하던 태초의 인간의 모습처럼, 체계는 늘 실존 앞에 벌거벗게 된다. 키르케고르의 표현처럼, 신 앞에 선 단독자의 운명이 불가피하게 된다.


신 앞에 선 단독자는 모르는 자다. 모름으로 사는 자다. 곧, 애초 모름의 속성을 갖고 있는 삶을 그 자체로 정직하게 받아들여 사는 자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주체성이다. 정확하게는 주체성이 개화될 조건이다. 키르케고르는 분명하게 말한다. 모든 것에 대한 보편적 지식을 추구하는 자, 곧 앎의 신념으로 사는 자는, 결코 주체적인 인간이 될 수 없다고.


키르케고르에게 있어, 곧 실존의 입장에 있어, 주체성은 모름을 통해서만 배양될 수 있는 것이다. 주체성의 양분은 모르는 삶, 즉 미지의 삶이다. 그리고 미지의 삶이란 우리에게 미지의 연인과 같다.


미지의 연인이 있다. 그 연인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까닭에, 우리의 열정은 샘솟는다. 그 연인을 향한 열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뚝 서서 달려간다. 우리로 하여금, 높은 장벽을 넘고, 가시덤불의 숲을 지나, 날카로운 협곡을 건너, 끝내 연인에게로 도달하게 만드는 그 힘, 우리를 생생하게 이 삶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그 힘, 그것이 바로 열정이다. 그리고 이 열정이야말로 주체성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열정이란 곧 삶의 실감이다. 실감하며 사는 삶이 전해주는 느낌이다.


때문에 다시 묘사해보면, 결국 주체성이란 삶을 생생하게 느끼는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힘으로 표현하자면, 자기중심적으로 행사하고자 하는 근대적 주체의 위력과는 전적으로 다르게, 오히려 주체성은 타자지향적인 수용력 내지 자기개방적인 적응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곧,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것이 주체성이다. 따라서 아무리 어떠한 체계가 확장성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닫혀야만 성립될 수 있는 체계 그 자체를 통해서는 주체성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명백해진다.


체계가 지향하는 것은 결코 주체성이 아니라, 단지 인식론적 앎의 주체다. 지성이 바로 그 작업에 봉사한다. 그렇다면 실존적 주체성은 무엇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 것일까?


키르케고르가 이미 열정이라는 말로 암시했듯이, 그것은 감성이다. 그래서 실존철학은 가장 반지성적이며, 가장 친감성적인 철학이다. 체계와 지성적 앎의 숭배자들이 또 한 번 실존을 불편하게 여기는 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주체성은 바로 이 감성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 아니, 체험할 수 있다. 감성은 결코 지성처럼 삶과 분리되어 작동하지 않는다. 삶과 즉시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바로 감성이다. 삶 그 자체를 체험하는 기제를 감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삶을 생생한 느낌으로 체험하는 주인공으로서 우리 자신이 실감되는 것, 이것이 곧 주체성의 실제가 된다.


앎이 아닌 삶을 통해, 곧 아는 지성이 아닌 모르는 감성을 통해, 이 주체성이 드러나게 되는 대표적인 예시를 우리는 모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모세는 대단히 지성이 발달한 인물이었다. 당시 가장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던 이집트의 왕가에서 영재교육을 받으며, 그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급의 지식이란 지식은 다 확보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에게는 앎으로 인한, 인생의 탄탄대로가 보장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뿌리부터 뒤흔드는 출생의 사실 앞에 그는 직면하게 된다. 지금까지 그가 성취해왔던 그 모든 지식으로도, 그 자신이 이집트 왕가와는 아무 관계없는 일개의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은 변화시킬 수 없었다. 그가 던져진 있는 그대로의 실존의 조건은, 모세가 스스로 구축하며 또한 의지하고 있던 안정의 체계를 근본에서부터 붕괴시켰다.


그것은 분명 옥좌로부터 추방당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신나는 소풍날에 물벼락을 맞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대단히 힘들었다. 죽지 못해 사는 모습으로, 그저 황량한 변두리에서 양이나 치며 비루한 목숨을 연명해가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에게 대체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를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삶이 왜 이렇게 가혹한지를 그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삶에 대해서 몰라졌다. 그 모름 속에서 다만 속상할 뿐이었다. 울분이 차오를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그의 앎과는 아무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 그에게 펼쳐지고 있는 삶을 다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모세는 한 음성을 듣게 된다. 듣고야 만다.


"모세야, 내가 있잖니."


이것은 많이 외롭던 모세가 가장 듣고 싶어하던 그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 세상에 던져진 모든 인간이 가장 듣고 싶어하던 그 목소리였다.


사실 우리는 비극 때문에 힘들고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 비극 속에서 우리가 아무도 없이 혼자인 것만 같기 때문에 힘들고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언제나 우리에게 알린다.


우리가 아무리 인생이 망한다 할지라도,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추방된다 할지라도, 그런 비극 속에 놓인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정확하게, 언제나 '내가 함께 있다.'라고 하는 가장 놀라운 사실을 알린다.


내가 함께 있다, 내가 함께 같은 상황을 체험하고 있다, 내가 함께 느끼고 있다, 즉 '함께하는 이가 있다.'라는 이 체험적 이해는, 우리를 가장 차가운 지옥에서부터 건져올린다. 언제 어느 때라도 누군가가 지금의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 이것만이 우리가 바라는 전부다. 그래서 이것은 궁극의 소망이다.


실존적 주체성은 바로 이 궁극의 소망에 대한 것이다. 궁극의 소망이 이루어진 그 결과에 대한 것이다.


모세의 체험은 분명하게 종교체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는 또한 실존체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주체성을 얻는다는 것은, 곧 '내가 있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는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외재적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자기의 바깥에 있다.'라는 말은 정당하게 성립된다. 여기서의 '나'는 가장 타자의 속성을 갖는 것이다.


타자라는 것은 아주 쉽게 정의하자면, 우리 자신이 가진 어떠한 앎으로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길은 앎을 포기할 때만이 가능해진다. 가장 타자적인 것, 곧 타자 중의 타자에 대해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앎은 기각된다. 체계는 기각된다. 가장 타자인 '나'는 언제나 자기의 바깥에 있다. 그렇게 자기 체계의 바깥에 있는 까닭에, 어떠한 체계의 앎으로도 포섭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실존체험과 같은 맥락으로 선(禪)에서의 견성체험이 보고될 때, 다음과 같은 진술은 빈번하게 묘사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자신이었는데, 자신이 아닌 것이 딱 하나 있었다. 그것이 나였다."


이러한 체험은 '나'라는 타자를 통해 역설적으로 주체성을 획득하게 되는 상호적 만남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연인의 비유는 유효하다. 만남은 언제나 연인으로서 만나는 것이다. 지금의 자신과 이 외재적 '나'는 연인관계다. 때문에 앎이라는 통제의 기제로는 결코 다가갈 수 없고, 체계라는 새장의 현실 속에는 결코 가두어질 수 없다.


그 연인은 우리에게 매순간 말한다. 우리가 체험하는 삶의 느낌을 통해 매순간 말한다.


"내가 있잖니."


그리고 이 영원한 대답은, 그동안 앎이 결코 대답할 수 없었던 모든 질문을 향해 다시금 쏘아진다.


"너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정말로 알아?"


"어떻게 될지라도, 내가 있잖니. 최후의 최후까지, 네가 가는 어디에라도 내가 언제나 함께 있잖니."


그래서 이것이, 이 세상 어느 곳이라도 우리가 우리 집처럼 있을 수 있는 그 이유가 된다. 우리 자신이 가장 당당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무한한 우리편인, 바로 내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초월적 존재에 대한 판타지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그 모든 망상을 기각하는 실존에 대한 이야기다.


이러한 주체성의 체험 내지 주체성의 발견은, '나'로서 삶을 이미 '모름' 속에 '감성'을 통해, 있는 그대로 느끼며 체험하던 실존적 주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다만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한 것이다.


두려움이 망각을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핵심적인 두려움은 왕이 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모세가 이집트 왕자의 신분에서 추방될 때 느꼈을 그 두려움이다.


왕이 되지 못하면, 우리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고, 우리 옆에 아무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런데 왕이 된다는 것은 곧 위력으로 행사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즉, 체계와 앎의 신봉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왕이 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으로 인해, 어떻게든 왕이 되기 위해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하고, 그로 인한 체계를 구축하려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현실 속에서, 체계의 반대편에 놓인 실존은 최대한 빨리 망각되어야 한다. 왕이 되는 일을 오히려 방해하는 것만 같은 실존은 최대한 유난스럽게 배척되어야 한다. 표현 그대로, 두려움이 망각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왕이 되려고 하는 그 의도로 인해, 우리는 역설적으로 점점 더 고립되고 소외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착각이다. 망각은 이렇게 착각이 되어 버린다.


베르자예프가 『카이사르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라는 저서에서 다루는 것은 바로 이 착각의 문제다. 왕은 노예로 인해 성립되며, 그 노예를 관리해야 하는 책무로 말미암아 그 자신도 똑같은 노예가 된다. 때문에 왕이 되어 아무리 건강한 통치력을 행사하려 한다 할지라도, 모든 왕이 노예가 되는 일은 필연이다. 왕처럼 힘을 얻으면, 자신이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착각 중의 착각, 곧 망상이다.


애초에 길이 다른 것이다.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은, 즉 왕을 얻는 길과 연인을 얻는 길은, 완전하게 다른 길이다. 실존에서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후자의 길이다. 전자의 길은 "내가 너를 있게 하리라."라는 말을 타자에게 감히 선언하는 것이고, 후자의 길은 "자기야, 내가 있잖아."라는 말을 타자로부터 감사히 고백받는 것이다.


고백은 고백을 부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주체성을 촉발하는 가장 실존적인 고백이 무엇인지를 이해해볼 수 있다.


그것은 이러하다.


"제 곁에 있어주세요."


이 세상의 모든 기도 및 기원이 담고 있는 실질적이며 유일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 '곁'이라는 것은 대체 어디인가?


우리에게는 좌표가 필요하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리는 지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지금 있는 바로 이곳을 정직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모름 속에서 느낌으로써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곳이 냉탕인지 열탕인지를, 냉탕이라면 얼마만큼 차가운지를, 열탕이라면 얼마만큼 뜨거운지를, 구체적으로 전할 수 있다.


"지금 바로 이렇게 느끼고 있는 제 곁에 있어주세요."


이것을 오고 가는 기다림의 설렘이 있는 편지로 은유한다면 낭만적이겠지만, 실제로는 편지가 아니다. 워프홀에 가깝다. 그래서 구체적인 좌표가 정확하게 알려지는 그 즉시, 바로 그 자리로 '나'는 돌입해온다. 그리고는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말을 전해온다.


"걱정마, 내가 있잖니."


그렇게 우리는 또 함께다. 우리는 또 '나'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하더라도 결코 잃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나'다. 그래서 마르셀은 '나'를 바로 희망이라고 말한다.


희망은 우리가 부질없는 우주의 먼지처럼 홀로 외롭게 소외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의 실제적인 모습은 '같이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도 모르는 가장 차갑고 먼 소행성에 절망적으로 던져진 것처럼 느껴질 때, 희망은 한순간 그 자리에 태연하게 나타나 우리에게 말한다.


"어우, 춥다. 혼자서 여기에 있느라 많이 추웠겠다."


바로 그렇게 희망은 우리가 지금 느끼는 그것을 같이 느낀다. 그로 인해, 우리의 심정을 정확하게 알아준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소외되어 죽어갈 운명 속에 있던 우리는, 우리와 같은 것을 느끼는 희망으로 인해 그 즉시 비극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된다.


춥지만 함께다. 추위로 인해 거절되지 않는다. 추위라는 조건 속에서도 사랑받는다. 그래서 이것은 더는 비극의 운명이 아니다. 이 우주에서 가장 차갑고 먼 소행성에서도 이루어진 사랑의 역사다. 운명적 사랑이다.


내가 있는 모든 곳은, 이처럼 사랑이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꿈꾸어내었던 모든 사랑의 이야기는, 그래서 다 내가 있는 이야기다.


비극적 운명을, 운명적 사랑으로 전환해가는, 바로 내가 있는 이야기다.


비극적 운명에서 운명적 사랑으로의 전환, 이것은 언제나 실존의 핵심적인 묘사며, 곧 주체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제 곁에 있어주세요."와 "괜찮아, 내가 있잖니."가 서로를 찾아, 우주의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까지 무한한 만남을 이루어가는 그 빛나는 궤적에 대한 이야기다.


혹여 이러한 이야기가 어렵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하더라도, 실은 아무 상관없을 것이다. 전혀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려워도, 몰라도, 내가 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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