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로 풀어보는 오늘날 -섹시한맛-

"정말로 여기에 있던 자유"

by 깨닫는마음씨




글도 못쓰는 이에게, 이제 억지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쓸 필요가 없다고, 세상에 그러려고 태어난 게 아니니 정말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면 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는 즉각 자유로워진다.


실존은 구조가 아니라는 말은, 어떤 언어구조와도 인간의 사실적 존재함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비유하자면, 화이트보드와 마커가 아무 관계가 없는 것과 같다. 아무리 난삽한 그림을 그려도 슥 지우고 나면 화이트보드에는 아무런 훼손이 없다.


더 분명하게는 모래사장 위의 그림을 우리는 떠올려볼 수 있다. 어떤 그림도 모래사장을 변하게 할 수 없다. 심지어 자신이 놀라운 그림으로 모래사장의 생태학적 위상을 변화시키겠다고, 모래사장의 존재감을 보충하겠다고 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그냥 정신병자다.


더 크게 지구로 가보자. 우리가 지구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지구에 무슨 근원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우리가 쓸 수 있는 모든 화력을 동원해도 우리가 끝장날 뿐 지구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는 언어로 무슨 대단한 구조를 만들고 있었는가?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대체 왜 하고 있었는가?


특별한 이유가 있겠나. 그냥 놀기 위해서 한 것뿐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놀려고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 인간은, 노는 일에 심각을 빨기 시작했다. 삼각김밥을 빨면서도, 자신이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와사비맛 명란마요 민트초코향 첨가'의 제품을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소비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무게를 부여하게 되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직접 능동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오토파일럿 모드로 살아가는 AI 좀비가 되는 것이라며, 더는 경쾌한 놀이가 아니라 복잡한 규칙들로 가득한 게임을 플레이하게 되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늘 두렵다.


안심할 수가 없다.


자신이 안전하지 못한 것 같아 계속 긴장되며 화가 난다.


자신도 남들처럼 더 멋진 소설의 갑옷들로 스스로를 무장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스토리텔링의 글감이 될 소재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한다. '최신의' '통합적' '탁월한' 등의 수식어들이 붙은 소재들은 가장 선호된다.


남들도 자기와 똑같은 그 소재들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망각한 채, 남들보다 더 대단한 것을 얻어 이제는 남들에게 위협받지 않을 안심을 얻기 위해 결과적으로 남들과 완벽하게 동일한 복제품 같은 상태가 되어간다.


이러한 환상에 너무 깊게 빠져버린 이들에게는, 언어로 존재를 좌우할 수 없다는 실존주의의 말이 아주 불쾌하게 들릴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지금까지 자기가 해온 노력을 모두 부정하는 것처럼 경험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력이 아니다.


손절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계속 손해만 발생해서 결국에는 영혼까지 끌어다 써야 하는 일은 빨리 손절될수록 좋다. 고통만을 증대시키는 유해한 삽질의 부정은 오히려 약이다.


손절한 이는 이제 안심할 수 있다.


언어로 무슨 짓을 하든 사실적인 존재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는 말도 그러한 이에게는 새롭게 다시 들린다.


그는 이제 안전지대를 찾게 된 것이다.


자신은 이제 기존의 구조를 해체하거나, 또는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그 모든 일을 근본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 광대가 되거나 왕이 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은 그냥 자신으로 있으면 된다.


자신이라는 존재는 그 어떤 언어에도 침범당할 수 없다.


지구처럼 스스로의 궤도에 올라 공전과 자전의 운동을 할 뿐이다.


그 운동을 우리는 마음이라고 부른다.


실존주의는 마음이 'mind'와 같은 명사가 아니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말해왔다. 굳이 그 단어를 써야 한다면 차라리 'minding'이라는 진행형의 표현으로 쓰는 것이 낫다고 제안해왔다.


마음은 우리 안에 있는 무슨 스머프 같은 내면아이들이 아니며, 토마스나 제니퍼 등의 이름을 가진 소인격들이 아니다.


마음은 다만 존재의 자연운동이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으로 사는 한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다. 나로 사는 일에서 벗어나지를 않게 된다.


마음에 대한 모든 문제는, 마음을 언어로 통제하려고 해서 생겨난다.


언어가 마음보다 큰 것이라는 착각이 발생시킨 것이 바로 마음의 억압이다.


자유라는 것은 언제나 마음이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당연히도 존재의 자유를 뜻한다.


우리의 존재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경험할 때 반드시 거기에는 언어에 의한 마음의 억압이 있다.


이러한 마음의 억압을 언어로 해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언어에 의한 억압을 언어로 해결하려고 하는 한 강화되는 것은 오직 언어의 세력일 뿐이다. 언어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심화되어 실은 억압만이 강해지는 것이다.


언어로 마음이라고 하는 존재현상을 다루려고 하는 일을 계속하면 정신병에 걸린다.


정신병의 반대말은 정직성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체가 떨어지는 일은 정직하다.


지구는 정직하다.


존재의 사실은 언제나 정직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안전지대다.


우리가 정직할 때, 이 세상의 어떤 언어적 구조도 우리를 위협하거나, 해하거나, 훼손할 수 없다.


우리가 정직할 때,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정말로 그러하다.


두려움은 외부에서 우리를 해칠 모종의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지금 정직하게 존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다.


당당함? 그런 것은 자신이 소설로 힘들게 써낸 자기의 서사를 주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정직하면 자연스레 당당하다.


그리고 이런 당당함은 아주 섹시하다.


힘차게 숲속을 질주하는 야생동물의 섹시함과 같다.


가장 자연스럽기에 가장 자연스럽게 그 맛이 끌리는 섹시한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아주 획기적인 현실이 있다.


우리가 '마음의 맛'을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다.


마음의 핵심은 의도이며, 그 의도를 맛보는 것이 바로 '마음의 맛'을 보는 일이다.


이것을 '의미(意味)'라고 부른다.


마음을 언어로 통제하려고 하지 않으면, 그 움직임이 자연스레 일어나며, 그에 따라 의미도 자연스레 드러난다.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쓰고 있으면 의미가 창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다 만들어낸 모조품이다. 쉽게 말해, 이러한 행위를 의미부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미는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부여되는 것은 의미가 아니다.


음식맛도 모르면서 인스타에 나온 다이닝에 가서 스테이크를 썬 뒤 "음, 탁월하다."라고 하는 일이 의미부여와 같은 일이다. 그것은 음식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맛보는 것이다. 그런 언어적 정보를 소비할 수 있는 수준이 이제는 되었다는 자신의 언어적 정체성을 맛보는 것이다.


그 인공적인 맛은 언제나 유치한 맛이다. 그래서 쉬이 질린다. 질리면 또 새로운 정체성을 소설로 써서 새로운 맛을 보면 된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어떠한 정체성의 서사를 만든다해도 그 맛은 늘 동일한 맛, 유치빤짝의 맛일 뿐이다.


언어구조의 게임만을 하고 있으니 당연하게 찾아오는 불감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캐릭터를 바꾸어 한다고 불감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그 외적인 모습이 뛰어나다 해도 불감하다면 그것은 섹시하지 않다. 밀랍인형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어떻게든 끄아악 하며 소외된 아픔을 가슴에 끌어안고 느껴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지금 나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은 현재 심각하게 게임에 너무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게임에 빠져, 마음을 언어로 통제하려 하며, 나아가 인위적인 의미부여까지 언어로 하고 있으면, 우리는 늘 심각하다. 사람들 앞에 가벼운 척 연기하며 웃어보아도 부정직성의 무게는 숨길 수가 없다.


정직하면 가벼워지고, 부정직하면 무거워진다.


가벼운 것은 섹시하다.


그런데 우리가 가벼울 수 있는 것은 역으로 존재의 안전지대를 확보하고 있을 때다. 하늘에 떠있는 연의 우아함은 대지에 분명하게 그 줄을 매고 있기에 가능해진다.


정직성은 언어로부터 위협받지 않을 존재의 안전지대를 튼튼히 확보하는 길이자, 동시에 언어가 만든 게임의 심각한 무게에 빠지지 않고 가볍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삶에서 다가오는 마음의 맛을 아주 깊게 음미하며, 신나서 살게 될 그 길이다.


이럴 때 우리는 자유롭다고 느낄 것이다.


그 자유는 어디에 있었는가?


우리가 정직한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늘 여기에만 있었다.


우리는 원래부터 섹시하라고 태어난 것이다.


자, 그렇다면 정말로 자유로운 이들, 곧 정말로 섹시한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다른 말로 하면, 실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일단 언어에 속지 않는다.


마음을 다 아는 무슨 도사 같은 심리학전문가의 권위를 얻으려는 이가 있다. 그러한 이는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쳐서라도 현실에서 자기가 그와 같은 사실적 권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며 또 연출하려 한다. 부정직한 일이다.


이러한 부정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언어에 중독되어 있어서다. '마음을 다 아는 무슨 도사 같은 심리학전문가'라는 언어에 그 자신이 심각한 무게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언어는 그 무게로 인해 다른 언어보다 우월적으로 변별되는 것처럼 경험되며, 흡사 인생의 가치가 된다.


근본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인데, 마치 최고로 중요한 것처럼 돌변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들 중의 또 어떠한 이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기는 모든 것이 다 언어적 허구라는 것을 알기에, 가볍게 그냥 심리학전문가인 척하며 놀고 있을 뿐이라고.


이런 이들이 가장 부정직한 이들이다.


돈을 벌기 위해 리니지를 붙잡고 있는 이들이 정말로 가볍게 놀고 있는 것인가?


그에게는 그게 생존을 위한 필사의 수단이다. 그 무게로 가득 차있다.


만약에 어떤 것이 정말로 놀이라면, 그것을 아예 하지 않아도 그의 삶에는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안되는 생존의 수단이 되어 있으면서 그것을 놀이인 것처럼 위장하는 일은 가장 커다란 기만이다.


차라리 이것이 사실이다.


아무 것도 아닌 이가 자기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꾸며내, 그걸 자기 인생이라고 말하며 사람들로부터 자원을 얻는다. 그러한 이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자기를 성공하게 해준 것이 바로 언어라고 믿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언어는 필연적으로 예찬될 수밖에 없다.


언어는 아무 것도 아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치있는 유일신의 자격을 얻는다.


이렇게 언어를 신으로 섬기고 있으면 자동적으로 언어에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권위가 늦든 빠르든 반드시 마음을 억압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마음을 억압해서라도 자신의 언어를 높은 가치로 억지스럽게 지속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것이 바로 언어에 속는 일이다.


그러나 언어의 권위에 속지 않고 실존하는 이들은 언어를 지속하려고 하지 않는다.


언어로 만들어진 것을 가볍게 소비한다.


다 샤넬백 같은 것이다.


나는 '샤넬백을 가진 나'를 소설로 써 정말로 '샤넬백을 가진 나'가 되어야 하는가? 또 계속 '샤넬백을 가진 나'로 지속해야 하는가?


그걸 들어보는 게 그렇게 소원이면 정직하게 한 번 가져보면 되지 않나.


샤넬백을 가진 지인에게 빌려달라고 해서 들어보든가, 명품관에 가서 시착 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즐겨볼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그러한 놀이일 뿐이다.


같은 경우로, 사람들에게 부탁해 딱 한 번만 저를 최고의 심리학전문가로 봐주세요, 라며 우리는 전문가놀이의 시간을 만들 수도 있다.


물론 그럴 경우, 자원과 에너지를 써야 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정직하게, 이는 자신이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는 일이고 사람들은 그 도우미일 뿐이다.


한 번 가져보고 나면 모든 것은 그 언어의 무게만큼 실은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쉽게 드러난다.


두 번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반복이 끊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이 샤넬백이라는 언어로부터, 또 심리학전문가라는 언어로부터 이제는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 가장 즐거운 삶의 방식은, 그것이 없으면 안 될 것처럼 굴던 언어의 무게로부터 우리가 하루하루 자유로워지면서, 우리가 갖고 있던 본연의 섹시함을 회복해가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갖지 않았고, 그 시점에서 정확하게 그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던 이 시작의 자리에 자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하나하나 확인해가는 것이다.


그러면 자유가 뿌리를 내린다.


자신의 존재가 자유롭다는 사실을 더는 의심할 필요가 없어진다.


더 든든해지고, 더 가벼워진다.


든든하게 존재의 베이스캠프가 확보되었으니, 가볍게 눈앞의 현실을 모험으로 살아갈 수도 있게 된다.


무슨 맛일까?


근본적으로 안심하며, 음미할 수 있다.


달게 느껴질 수도, 시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어느 표정이든 섹시할 것이라는 사실만이 분명하다.


자유는 정말로 섹시한 것이다.


맛있게 잘 노는 게 자유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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