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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자키스(Kazantzakis, 2018)

두려움과 소망의 기록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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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적 편향을 담아, 20세기 최고의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니코스 카잔자키스의 전기영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그가 살아온 생애를 하나의 키워드로 조명해낸다.


그것은 바로 두려움이다.


카잔자키스는 평생 이 두려움의 문제와 씨름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권위적인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신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며, 통제불가능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다.


곧, 그것은 바로 인간의 두려움이다. 카잔자키스는 바로 이 유한한 인간의 두려움을 대변하는 작가다. 유한성과 초월성 사이에서, 늘 고뇌하며 더듬어 나아가고자 하는 그의 몸짓은 그래서 시대를 넘어서도 심금을 울린다. 그것이 바로 생생한 인간의 모습 그 자체인 까닭이다.


인간의 실존을 정의하는 핵심적인 표현은, 인간은 모순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카잔자키스의 여정은 늘 모순 위에 놓여 있다. 모순은 대립되는 양쪽 사이에서의 갈등과 분열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양쪽을 통합하거나, 한쪽을 임의적으로 거세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것'을 만들어 그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자유와 안정 사이에서, 예수와 붓다 사이에서, 그 자신과 조르바 사이에서, 그리고 바로 두려움과 소망 사이에서 늘 고뇌한다.


이것은 그가, 모순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다시 묘사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분리된 관계의 하나된 통합이 아니라, 분리되었으나 동시에 연결된 관계성 그 자체로서의 온전함을 꿈꾸는 기획이다. 이는, 가장 현대적인 전환인 동시에, 가장 실존-종교적인 전환이기도 한데, 이른바 이 기획은 '모순에서 역설로의 전환'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모순은 이제 역설이라는 이름을 새로 갖게 된다. 그리고 현실은 다시 알려진다.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그 무한한 역동이 풍요로운 실제를 담지해낸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은 더욱 입체적인 깊이를 가진 존재로 새롭게 알려진다.


그래서 카잔자키스가 그리는 인간상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니체와 같이, 선악을 넘어, 선악에 구애받지 않으며, 다만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온전하게 담아내고 있는 인물상이 그를 통해 묘사될 때, 그것은 인간에 대해 가장 적극적이며 가장 온기어린 인간찬가의 곡조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리고 이 노래의 첫소절은 분명히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얼마나 두려웠던가."


동시에 이 첫소절은 다른 문장으로 다시 한 번 변주된다.


"나는 얼마나 소망했던가."


아버지의 힘이 나를 지켜주는 든든함으로 다가와주기를 소망했기에, 오히려 그 아버지의 힘은 권위적인 폭력으로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또는, 아버지의 힘은 권위적인 폭력으로 나를 두렵게 만들었기에, 오히려 그 아버지의 힘이 나를 지켜주는 든든함으로 다가와주기를 소망했다.


이처럼, 소망과 두려움은, 일방통행의 인과론으로 선후관계를 분명하게 할 수 없는, 닭과 달걀의 순환 구조로 작동한다. 요는, 소망과 두려움은 언제나 이와 같이 한쌍이라는 것이다. 하나가 있어서 다른 하나가 있고,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없다. 이것을 공속성이라고 말한다. 역설은 이 공속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카잔자키스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소망하지 않는다(I hope for nothing).

나는 두렵지 않다(I fear nothing).

나는 자유롭다(I am free).


그런데 정말로 아무 것도 소망하지 않는 일은 가능한 것일까?


아무 것도 소망하지 않을 수 있는 이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즉 이제는 소망하지 않아도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서 다 가지려고 하거나, 또는 그 반대편으로 가서 다 놓아버리려고 한다.


그렇게 얻음과 잃음의 명세표를 만들어, 하나하나 더 얻어가거나, 하나하나 더 놓아가는 일을 행복이라고 말한다. 전자는 보통 세속적으로는 사회적 성공이라고 불릴 종류의 것이고, 후자는 특정한 종교적 전통 속에서 종교적 성숙이라고 불릴 종류의 것이다. 소위, 욕망을 다 내려놓는 일이 깨달음이라고 부르는 식과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이 점검목록들을 살펴가는 일은, 실제로는 행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행이다. 고행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고통을 만드는 길이다. 즉,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두려움을 영구히 없애고자, 그 두려움과 늘 싸우는 길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그것이 얻음이 되었든, 잃음이 되었든 간에, 언제나 더 두려워질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이 두려움을 투쟁대상으로서 거듭 링 위에 호출해내는 까닭이다.


붓다는 기나긴 고행 끝에 이 사실을 눈치채고, 즉시 고행을 그만두었다.


아무리 내려놓으려고 해도 내려놓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그렇게 유한한 자신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시작되고, 곧 소망이 시작된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붓다는 없앨 수 없는 두려움을 없애려고 하기보다는, 곧 없앨 수 없는 자신을 없애려고 하기보다는, 다만 그 두려움에 친절하고자 하는 길을 택했다. 즉, 자신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길을 택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부정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두려움을 부정하려면 두려움과 싸워야 한다. 싸워서 그것을 제압함으로써 추방해야 한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이유가 바로 부정할 수 없이 살아 있는 자신이라면, 그것은 끝없는 자기 자신과의 투쟁이 된다. 이것이 바로 지옥이다.


자기 자신을 영원히 저주하고 증오하는 이 지옥을 멈추는 것, 이것만이 붓다를 위시한 종교적 선각자들이 유일하게 관심을 가졌던 바로 그 핵심이다.


붓다는 두려움을 다만 통째로 인정했다. 그리고 소망을 다만 통째로 인정했다. 인간으로서 두려워하는 일은 잘못된 일이 아니며, 인간으로서 소망하는 일은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통째로 드러낸 것이다. 그 온전한 역설을 개방한 것이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 필멸자다. 곧, 유한하다. 유한한 인간이 두렵지 않기란 불가능하며, 소망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하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고행이다.


자신이 두렵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고행은 멎는다. 그리고 두려운만큼 자신이 어떠한 것을 소망했는지도 알려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바로 그처럼 두려워서 소망했던 자신에게 친절해질 수 있는 기회 또한 생겨난다.


이것은 정확한 길이다. 붓다도 예수도 걸었던 이 정확한 길을, 카잔자키스 또한 펜대를 지팡이 삼아 함께 걷는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의 힘을 두려워했다는 사실 속에서, 아버지의 힘을 향한 자신의 소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미할리스 대장』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가 꿈꾸었던 영웅적 힘을 가진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한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카잔자키스는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친절해진다. 누군가에게 친절하다는 것은, 곧 누군가에게 응답한다는 의미다. 카잔자키스는 영웅으로서의 아버지를 꿈꾸었던 겁많은 소년에게, 그 소년이 소망하던 바로 그 현실을 소설 속에서 이루어준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그 겁많은 소년이었던 한때의 자기 자신을 향한, 시공을 넘어선 응답이다. 곧, 자기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친절함이다.


여기에서 실제의 아버지가 그러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친절해질 수 있는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러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인간의 삶, 이것은 카잔자키스가 한결같이 묘사해내는 삶의 모습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통째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언제나 그렇게 자기 자신이어도 될 자유를 함축한다.


두려워하는 자기 자신 또한 있어도 되는 자유를 인정할 때 두려움은 더는 고통의 이유가 아니며, 소망하는 자기 자신 또한 있어도 되는 자유를 인정할 때 소망은 더는 고통의 이유가 아니다. 즉, 두려움과 소망의 인정으로 말미암아, 두려움과 소망이 소멸되는 것과 같다. 이것 또한 역설이다. 때문에 카잔자키스의 묘비명은 이러한 의미로 다시 쓰여진다.


나는 소망하는 자신을 인정한다.

나는 두려워하는 자신을 인정한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두려워하는 자신을 더 고문하지 말고, 소망하는 자신을 더 고행하지 말며, 늘 모순덩어리인 것 같은 자신을 자책할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자신에게 친절해지라.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두려움과 소망 사이에서 발화된 진술이다. 곧, 두려움과 소망의 역설로 말미암아 피어난 인간이라는 꽃에 대한 노래다.


그 꽃을 아주 많이 사랑했던 누군가의 고백과 같은 기록이다, 이 영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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