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꼴통"
늦든 빠르든, 그대는 결국 그런 운명이 아니었을까.
"꼴통."
그대의 앞에서든 뒤에서든, 그대를 부를 때 대명사처럼 지칭될 이 표현을 들어야 하는 운명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피곤하다며, 점점 더 그대와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친한 친구들조차도 말이 안통한다며, 그대를 쉬이 가까이 두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대는 언제 어디에서나 결국에는 고립된 외톨이로 남겨지지만, 그래도 그대는 꿋꿋하다. 혼자서도 잘 노는 그대다. 서로 괜히 피곤해지느니, 혼자서 행복하면 충분히 잘 사는 것 아니겠냐는 것이 그대의 신조다.
얼큰한 국물에 소주 한 잔이 그대에게는 기꺼운 시간이다. 꼼장어도 괜찮고, 닭발도 괜찮다. 요는 좀 매운 것이 입에 붙는 그대다. 남들은 매운 음식이 부담스럽다는데, 그대는 희한하게도 매운 것을 먹으면 속이 풀리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많은 것에 보다 관대해지는 것도 같다. 여유가 회복되는 느낌이다.
너무 고집을 부리느라고 여유를 잃었나, 그대는 잠깐 생각해보지만, 이 질문은 그리 와닿지 않는다. 사람들의 태도도 사실 잘 와닿지 않는다. 그대는 딱히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 자신이 어떤 것을 고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대의 뜻대로 고집부리는 내용이 정말로 없는 것만 같다. 그래서 그대를 고집이 센 꼴통으로 보는 시선들에 좀 억울하기도 하다.
에이 모르겠다, 이렇게 그냥 살다가 죽지, 라며 풀어진 속에 편한 마음으로 잠을 청하는 그대의 다음 날은, 그러나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다. 축 쳐진 변기 위에서 그대는, 매운 맛은 결코 미각이 아니라 통각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리고 배변을 위해 힘차게 찡그러진 그대의 얼굴을 스마트폰의 반사된 액정 위에서 확인할 때, 그대는 비로소 알게 된다.
지금 이 얼굴이, 그대에게 고집이 세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보던 바로 그 얼굴임을.
때문에, 그대가 이미 알고 있었듯이, 그대는 결코 자기주장을 위한 고집이 세지 않다.
그대는 다만 아파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을 참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렇게 아픔을 참으며 아픔과 싸우고 있었다. 아픔을 이기려고 싸우고 있었다. 매운 음식을 먹고 그대가 느낀 그 여유는 바로 승자의 여유다. 이 정도 아픔으로는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낸, 아픔과 싸워서 이긴 자의 여유다.
매운 떡볶이를 먹고서, "아싸, 내가 이 떡볶이를 이겼다!"라며 승자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그대의 모습은 참 소박하면서, 간절하다.
그대는 그런 작은 아픔이나마 이기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이 너무 아파서, 그대는 늘 그 아픔에 눌려 살아야 했기에, 그러한 작은 승리조차도 그대에게는 간절했던 것이다.
그대여, 작은 승자인 그대여, 그러나 그대에게 작은 승자가 될 자유가 있는 것처럼, 그대에게는 또한 큰 아픔을 아프다고 말할 자유도 있다.
그대가 아프다고 말하지 않고 그 아픔을 참고 있을 때, 그대는 아픈데다가 꼴통이라는 비하적 오명까지 쓰게 된다. 그래서 더 속상해진다.
그러나 어쩌면 그대에게는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해본 적이 없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그대가 아픔을 말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이와 같으리라.
그대의 인생에서의 언제인가, 그대가 좋아했던 것이 그대를 아프게 했다.
그래서 그대는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그대가 좋아했던 것에 대한 거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대가 거절하면, 그대가 좋아했던 것도 그대를 거절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대는 거절하지 않기 위해, 또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다만 아픔을 참았다. 참고 또 참았다. 그것은 이와 같다.
"제가 잘 참을 거니까, 절 싫어하지 마세요, 헤헤."
이것은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에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그 이유이기도 했다. 그대는 분명 사람들에게서 경험한 아픔을 잘 참아내는데도, 사람들이 오히려 그대를 싫어하게 되는 현실은, 그대에게는 수수께끼와 같았다.
이제 그 수수께끼의 답은 이러하다.
그대여, 아픔을 참고 있는 그대의 찡그린 얼굴은, 사람들에게는 그대가 그들을 싫어하는 얼굴로 보인다. 자신들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대를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는 일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대는 분명히 싫어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아픔을 싫어한다. 그대는 아픔이 싫다. 그대는 그대를 아프게 하는 것이 싫다.
그대여, 그대는 그동안 잘 참아왔다.
사실은 그대를 아프게 해서 싫은 것을 무척이나 잘 참아온 것이다. 그대가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지 않기 위해 그대는 참 대견했던 것이다.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그대가 좋아했던 것을 좋은 것으로 영원히 남기기 위해, 홀로 분투해왔던 것이다.
그대의 사랑이 그렇게 깊었다.
그대를 아프게 하는 것조차도 그대는 사랑하고 싶었다.
그대여, 그러한 큰 사랑을 꿈꾸던 그대여, 분명히 그대에게 작은 승리를 할 자유가 있는 것처럼, 그대에게는 또한 큰 사랑을 할 자유도 있다.
그리고 가장 큰 사랑은 꼴통만이 할 수 있다.
'뇌가 없는 빈 머리'라고 하는 꼴통의 비하적 색채를 걷어내면, 꼴통은 결국 빈 통을 의미한다. 비어 있어서 다 담길 수 있는 큰 통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그대의 큰 아픔 또한 충분히 다 담길 수 있다.
가장 큰 사랑은 그렇게, 그동안 참느라고 모른 척해온 그대의 아픔을 먼저 담아내는 사랑이다.
아픔을 참아야 하는 것이 그대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 안에 담아야 하는 것이 그대의 아픔이다.
그러면 담긴 아픔이 그 사랑 안에서 말한다.
"저는 이러한 것이 아파요. 부디 제 아픔과 함께해주세요. 부디 제 편이 되어주세요."
이제 그대가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한없이 상냥한 호의로서 그대의 시선 끝에 다가온다. 그대의 아픔을 담아내고 있는 사랑이, 그 아픔을 꽉 품에 안고서 바로 그러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다가간 까닭이다.
사람들도 그대와 같은 것이 아팠다. 그래서 아픔을 가득 품어내고 있는 그 사랑의 빈 통은, 사람들에게도 또한 가장 자애로운 품으로 느껴지게 되는 까닭이다.
그렇게 빈 통인 그대는 아픔의 편이 되어, 아픔을 안음으로써, 또 아픔을 알림으로써, 결국 그대처럼 아팠던 사람들의 편이 된다. 사람들도 그대의 편이 된다. 이로 말미암아, 함께 나누어 먹는 순대와 튀김, 어묵과 김밥이 더해짐으로 인해, 그대의 식탁은 한결 풍요로워진다. 그대는 더는 차가운 화장실 변기 위에서 배변의 고통 속에 홀로 죽어갈 운명이 아니다.
바랄 것이 없다. 그렇게 바랄 것이 없는 그대는 결코 고집이 세지 않다. 사랑의 꼴통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