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 래빗(Jojo Rabbit, 2019)

토끼들의 행성에서는 어떠한 일이 벌어지나?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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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를 새장과 같은 철창에 가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삶 앞에 취약한 존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토끼를 제대로 살 수 없는 약한 존재로 보는 만큼, 수호의 책임감은 증가한다. 그에 따라, 철창의 빗장도 견고해진다.


그 중에서, 가장 토끼를 지키고자 하는 이는, 바로 그 자신이 가장 토끼와 같은 이다. 그러나 동시에 토끼를 가장 멀리 하려는 이다.


그 스스로가 토끼를 약한 존재로 규정한만큼, 그 자신이 토끼인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어려워진다. 그래서 가장 토끼인 이는 자신이 토끼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이를 토끼로 만드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은 토끼가 아닌, 토끼를 지키는 이가 됨으로써, 토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속에서 비극은 만들어진다. 우리의 책임하에 있는 '이' 토끼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와 관계없는 '저' 토끼들을 짓밟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토끼들이 기죽고 무력한 입장을 회복하여, 진정한 토끼로 거듭날 수 있게 된다고 믿는 까닭이다.


이 토끼들은 신의 토끼들이고, 저 토끼들은 악마의 토끼들이다. 우리는 바로 이 토끼들을 지켜내는 히어로가 되고자 한다. 그렇게 모든 영웅신화는 탄생한다. 그리고 이 영웅신화의 꿈속에서, 저 토끼들뿐만 아니라 이 토끼들까지도 점점 더 멀어진다. 전술한 것처럼, 토끼를 지키는 영웅은 토끼에서 가장 멀어지려는 이인 까닭이다. 그렇게 자신이 토끼들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영웅으로 말미암아, 모든 토끼는 멀어진다. 즉, 소외된다.


제국주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고,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며, 오늘날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고,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토끼의 수호자가 토끼를 철창에 넣어 기르는 일이 정말로 의미하는 것에 대해 정확한 감수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코미디다. 이 영화의 모든 풍자는 바로 그러한 토끼양육의 현실을 겨냥한다.


그럼으로써 드러내고 있는 것은, 영화 내에서의 직접적인 대사로도 알려지듯이, '삶에 관해서 누구도 약하지 않다.'라는 주제다. 아무리 비루하고, 무력하고, 나약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 어떤 존재도 그의 삶에 있어 약하지 않다. 때문에 우리가 약함을 논할 때 넌지시 따라붙는 미숙하고 열등한 존재에 대한 묘사와, 그에 대한 선의 속에서 은근하게 풍기는 우월감과 연민 등의 정조는, 이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토끼들의 생태에 대한 것이다. 그 '살아 있는' 생태의 발견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토끼의 입장처럼 묘사되는 그 모든 인물은 자신들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반드시 드러낸다. 곧, 모든 철창 속의 토끼는, 그 철창을 지키는 수호자만큼이나 강하다는 사실을 기어코 드러낸다.


벽 속에서 숨어지내는 유태인 소녀는 집주인인 소년에 대해, 주인공 소년은 자신의 수호영웅인 제3제국의 히틀러에 대해, 그리고 심지어는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입장이 뒤바뀐 제3제국의 패잔병들조차도 자신들의 관리자가 될 승전국에 대해, 곧 그 누구의 삶도 다른 누구의 삶에 대해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알린다.


이것이 바로 토끼의 생태다. 누구도 토끼 아닌 자가 없으며, 누구도 토끼 위에 서지 못한다. 토끼는 열등한 존재의 통칭이 아니다. 토끼라는 것은 애초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당당한 삶의 이름이다. 때문에 토끼가 아닌 입장에서 토끼를 지키는 영웅 같은 것은 존재할 수도 없으며, 또한 필요하지도 않다.


그래서 철창의 문은 활짝 열린다. 개방되며, 해방된다.


토끼를 가두고 있던 철창의 문이 열린다는 것은, 곧 토끼에 대한 억압과 부인의 몸짓이 멎는다는 의미다. 즉, 상대에 대한 인정뿐만 아니라, 토끼를 격렬하게 거부하고 있던 자신 역시도 토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의미다. 해방은 언제나 안팎으로 함께 일어난다. 타자의 해방은 곧 자신의 해방이다. 우리는 함께 자유로워지거나, 함께 구속될 수 있을 뿐이다.


애초 갇힐 이유가 전혀 없었던 그 영웅의 철창에서 풀려난 토끼들은 이제 함께 자유로워진 현실 속에서 서로를 돌본다. 그리고 함께 춤춘다. 너도, 나도, 같은 토끼라는 사실을 기뻐하며, 그렇게 함께 살아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주인공 소년의 친구가 발화하는 대사는 마치 이 영화에 대한 핵심적인 요약과도 같다.


"나는 결코 죽지 않아. 이 모든 일을 이제 다 그만 해야겠어."


하나의 토끼가, 자신은 마치 토끼가 아닌 것처럼 신성한 모습으로 다른 토끼 위에 서려고 하고, 그럼으로써 열정적으로 다른 토끼를 구원하려고 하며, 그 구원을 위해 또 다른 토끼를 격렬하게 제거하려고 하는 이 모든 일이 영 우스꽝스러운 3류 연극과 같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3류 연극이, 애초 대등한 입장의 같은 토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인 까닭에 결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소년의 친구는 꿰뚫어보고 있다.


철창에 갇힌다는 것은, 또 다른 표현으로는 강제로 연출된 무대 위에 올려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대 위에 올려져, 우리는 약한 토끼인 척 해야 하는, 또는 토끼가 아닌 강한 영웅인 척 해야 하는 연기를 강요받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죽을 수 없다고 하는, 어떻게든 또 이 모든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곧 우리가 철창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약한 존재가 결코 아니라고 하는 사실의 발견은, 그 3류 연극이 지속될 무대 자체를 붕괴시키는 가장 치명적인 발견이다.


그래서 이것은 다시 한 번 코미디다. 그리고 그러한 3류 연극을 대단히 엄숙하게 해왔다는 점에서, 코미디 중의 코미디다. 말도 안되는 것에 대해 부여하는 심각성은 언제나 우리를 제일 웃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비극 중의 비극이다. 희극을 심각하게 다룰수록 사람은 농담거리처럼 죽어가게 된다. 모든 마녀사냥의 역사가 그러하다. 허탈한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가야만 했다.


이 영화는 이처럼 희극에 대한 심각성이 어떻게 희극을 비극으로 전환시키는지, 그 역설적인 기제를 잘 묘사하고 있다. 영화 내에서 언급되는 릴케는, 희극과 비극이 언제나 뒤엉켜 우리의 삶을 구성한다는 바로 이 사실을 그의 시작(詩作)에 있어 주요한 소재로 삼곤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릴케가 정말로 전하고 싶어했던 것은 바로 토끼의 생태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릴케의 시를 전한다.


아름다움도 두려움도 모두 경험하라.

오직 걸어가는 일을 계속 하라.

느낌 속에서 이르지 못하는 먼 곳은 없다.

그렇게 나를 벗어나지 말라.

삶은 바로 그 가까이에 있다.


희극도, 비극도, 우리는 다 경험할 수 있다. 그 모든 역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그 느낌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찾는다. 그것이 삶이다.


그래서 결국 그 어떤 희극 또는 비극도 토끼를 죽일 수는 없다. 토끼는 그 모든 희극과 비극 속에서 살아남는, 그리고 다시 또 살아가는 이의 거룩한 이름이다. 서로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함께 춤추며, 그 춤으로 서로를 축하하는, 우리 모두의 같은 이름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당당한 토끼의 생태다. 이 사랑스러운 토끼들의 행성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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