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네가와 선생님의 인생수업
후쿠모토 노부유키는 실존철학적 사상을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해내는 일에 있어 가장 탁월한 작가다. 『무뢰전 가이』는 가히 실존철학의 입문서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며, 『텐-천화거리의 쾌남아』, 『은과 금』 등을 위시한 작품들에서도 실존적 경향성은 두드러진다.
그중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도박묵시록 카이지』에서는, 극 초반부에 등장하는, 그러나 그 강렬한 인상으로 말미암아 작품 전체 내에서도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각인되는, 토네가와라는 인물[이후, 토네가와 선생님으로 지칭]을 통해 이러한 실존적 메시지를 표현해나간다.
토네가와 선생님은 시종일관 차가운 냉소와 뜨거운 일갈을 번갈아가며, 거칠고 위압적인 형식으로 메시지를 발화하지만, 오히려 그러한만큼 그 메시지의 의미는 정곡을 찌른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마도 이러할 것이다.
"꿈 깨라."
실존이라는 용어는 사실존재의 축약어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존에서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서 사실과 대립항을 이루는 표현은 바로 본질이다.
본질은 '이것은 -이다.'라는 명제로서,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렇게 드러날 가능성이 있는 가장 핵심적인 속성의 그 무엇으로 묘사된다. 이를 쉽게 말하자면, 본질은 결국 꿈과 같다.
반면, 사실은 이미 드러나 '있는' 그것 자체다. 그리고 바로 그것 자체가 실존이다. 때문에 사실이 본질과 대립되듯이, 실존은 꿈과 대립된다.
그래서 실존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꿈에 대한 해체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토네가와 선생님이 말하듯이, 세상은 엄마의 요람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엄마의 요람으로부터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실존철학에서는 이것을 피투성(thrownness)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을 인간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실존적 사조들이다.
인간이 그 자신의 탁월한 지성으로 말미암아 훌륭한 기술문명을 이룬 까닭에, 역설적으로 소외시된 것이 바로 이 실존의 문제다. 소위 말하자면, 문명의 혜택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이 세상이 정말로 내던져진 황무지처럼 체험되기보다는,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을지언정 그럭저럭 생존할만한 정도의 친절한 영지처럼 체험된 것이다.
이처럼 선대의 인간이 쌓아준 호혜에 기대어, 자신을 아이처럼 위치시킨 인간의 응석은 시작되었고, 동시에 인간의 자기우상화 또한 시작되었다. 아이는 자신의 뜻대로 상당 부분이 이루어지는 것 같은 우호적인 환경 속에서는, 자신을 전능한 존재로 느끼게 되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 전능한 존재로서의 아이의 자기인식은 그대로 인간 자신의 본질 규정이 되었다. 아직은 충분히 전능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진정한 전능성의 담지자로서 스스로의 본질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전능성의 본질에 조금씩 다가가는 행위를 자기실현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그 자기실현의 중요한 기제로서 앎이라고 하는 지성의 원리를 채택하게 되었다.
지성을 통해 전능을 꿈꾼다는 것, 이는 표현 그대로, 전지전능한 인간적 본질의 탄생이다. 바야흐로 "아는 만큼 힘있어진다."라는 기획의 태동이다.
그리고 이 기획은 한참 부풀대로 부푼 과대망상적 팽창 속에서, 그로 말미암아 저 광활한 하늘 끝으로 비상해나감으로써 드디어 인간의 진정한 본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뜨거운 기대 속에서, 턱하니 보란듯이 중력이라는 쇠사슬의 견고함을 실감하고야 말았다.
곧, 이 중력의 행성 위에 발붙이고 있는 실존에 의해 그 창대한 비상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전지전능을 꿈꾸던 그 어떤 인간이라도 필멸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렇게, 전지도, 전능도, 모두가 "너는 반드시 죽는다."라는 위대한 사실 앞에서 무효화되었다.
인간은 아무리 전지전능을 꿈꾸어도 그 자신의 죽음을 결코 막을 수 없었으며, 인간은 아무리 전지전능을 행세해도 그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결코 막을 수 없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에게 주어진 이 실존적 조건들은, 이처럼 그 어떤 인간의 전지전능을 향한 꿈보다도 강력했다. 즉, 죽음은 언제나 앎보다 강력했다. 고로, 삶은 언제나 앎보다 강력했다.
그렇게 인간은 삶이라고 하는 것을 새로운 중요성으로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다. 진정한 자신의 본질을 향한 꿈에서 깨어나, 정직한 눈동자로 현실을 응시하며, 살아야겠구나, 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니체와 같은 과격한 어조로 토네가와 선생님은 사실 놀랍게도 하이데거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멍한 의식 속에서 주체적 생동감 없이 살아가는 삶을,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삶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자기기만의 삶이다. 그러나 비본래적인 삶을 나쁜 것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범주가 다르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아픈 것이다.
자기기만의 삶은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심리치료가 마음의 아픔을 다루는 활동이라고 할 때, 그래서 실존상담은 바로 이 자기기만이 낳은 아픔의 문제를 다룬다.
스스로를 속이는 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시린 아픔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망할 곳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대상 때문에 자신의 삶이 망쳐진 척 하며, 그 원망과 증오의 불길로 스스로를 화력발전시키는 일 또한 분명하게 삶을 살아갈 하나의 동력이 되어준다. 그러나 자기기만 속에서는 그것조차 불가능하다.
이 자기기만의 삶을, 다시 한 번, 꿈꾸는 삶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곧, 꿈속에서의 삶이다. 그래서 현실감이 없다. 망상으로 사실을 대체한다.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관계를 재단한다. 이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생각되기에, 사람들을 자기 이득에 따라 조종하고 통제하는 데에도 아무 거리낌이 없어진다. 이 세상은 자기만을 위한 꿈속의 요람이라고 간주하는 까닭이다.
아마도, 이상심리학의 묘사에 동의한다면, 이상심리학에서 말하는 모든 증세와 징후들은 바로 이 꿈꾸는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혹자는, 꿈꾸는 일이 왜 나쁜 것인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더 똑똑한 척 하는 혹자는, 애초에 이 세상이 언어로 만들어진 꿈과 같은 허상인데, 그 속에서 나쁜 꿈을 없애고 좋은 꿈을 꾸며 사는 일은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듯이, 꿈속에서 사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니라 아픈 일이다. 그리고 아무리 영화를 좋아하는 이라고 할지라도, 영화관 안에서 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삶은 영화관 밖에 있다. 삶은 꿈 밖에 있다.
때문에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꿈이 삶을 보다 진정하게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즉, 꿈이 삶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꿈은 삶이 선행한 뒤 남겨진 부산물이다. 꿈은 보물이 아니라 재활용쓰레기다. 재활용쓰레기는 다시 삶에 투여될 수도 있는 가치로운 것이지만, 황금의 신주단지처럼 모셔야 할 소재는 결코 아니다. 이것은 실존상담이 왜 무의식을 신성시하지 않는지에 대한 그 이유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삶이다. 삶을 다시 찾는 일이다. 다시 사는 일이다. 표현 그대로, 재생(再生)이다. 실존은 바로 이 재생이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번뿐이라는 실감이, 이 모든 것이 통째로 다 진짜라는 승인이, 우리로 하여금 삶을 다시 살 수 있도록 안내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찾은 삶은, 우리에게 가장 귀한 보물이 된다.
삶은 더는 앎의 설계도대로 실현되어야 할 레고블럭도 아니고, 앎의 통제대로 인도되어야 할 어린 양도 아니며, 앎의 자기도취대로 떠받들어줘야 할 의무를 지닌 콘서트의 청중도 아니다.
이 삶이 곧 나다.
삶이 가짜이며, 그러한 삶의 거짓된 장막을 명석한 앎으로 걷어낸 뒤에 실현될, 진정한 본질로서의 진짜인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토네가와 선생님은, 누구도 가짜로 살고 있지 않고, 가짜로 죽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이 사실적으로, 통째로 진짜인 나다.
이것은 실존철학에서 진정성 내지 일치성이라고 부르는 그 개념이다. 비본래적인 삶과 대비되는 표현으로서, 본래적인 삶이라고도 명명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본래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또 하나의 본질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즉, 진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앎의 논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본래적인 삶이라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몰라야 하는 것이다. 즉, 앎에 의해 삶을 이끌어 나가려는 의도를 기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삶에 대한 앎의 통제에의 의도를 해체할 때,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조우되는 것이 바로 불안이다. 본래적인 삶은 이 불안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불안은 그것이 실제로 살아질 때, 그 즉시 다른 이름을 얻는다. 그것은 바로 저 유명한, 그리고 영원한 실존철학의 생명인, 바로 자유다.
자유.
재생의 문이 열릴 때, 그 틈새로 가장 먼저 파고 들어 우리의 전신을 휘감는 것이 바로 이 자유의 공기다.
우리는 이 공기를 맛보기 위해, 이 공기로 숨쉬기 위해, 그렇게 이 공기가 우리의 몸이 되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러고자 살고 있는 것이다.
자유는 우리 삶의 모든 의미다.
그리고 자유는 꿈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실존은 그 어원적 의미에 있어 '본질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때문에 본질적인 진짜 나라고 하는 꿈 밖으로 나가 실존하는 것[정확히는, 이미 그렇게 실존함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자유다.
물론, 꿈꾸는 것은 자유다. 그러나 '꿈꾸는 것은 자유다.'와 '자유는 꿈꾸는 것이다.'는 동일하게 등치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다. 이것은 기초적인 논리학이다. 때문에, 꿈꾸는 것은 자유지만, 자유는 실존하는 것이다.
일견 토네가와 선생님의 과격한 모습으로 인해, 실존은 짐짓 벅찬 사조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실존은 벅찬 것이다. 그러나 받아들이기 벅찬 것이 아니라, 가슴이 벅찬 것이다. 처음으로 그 어떤 앎의 통제도 없이 흘러들어온 삶의 기운이, 곧 자유의 공기가 우리의 가슴을 가득 채운다. 꽉 찬다. 그래서 벅찬 노래가 되어 새어나온다.
"내가 진짜로 살아 있다!"
내가 거짓이 아니라 진짜로 살아 있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현실.
내가 나인 것을 정말 좋아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현실.
바로 그 고백의 현실을 살아갈 기회로서 다시 찾은 '이번'이다. 그렇게 우리가 간절하게 다시 찾고자 한 '이번'이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그래서 토네가와 선생님의 인생수업은 '이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