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은 스마트폰인데 마음은 왜 삐삐세요? #2

"인간의 자화상"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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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을 사는 호모 사피엔스 종인 우리는 이제 이렇게 기억해야 한다.


마음은 인간의 자화상이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어떻게 규정짓느냐에 따라 마음에 대한 이해도 달라져왔다.


인간이 스스로를 정서적 유기체로 보고 싶었다면 마음은 감정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된다. 더욱더 그러한 정황들로 드러난다. 또는 인간이 스스로를 생각하는 갈대로 보고 싶었다면 마음은 생각과 관련된 어떤 것이 된다.


이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자화상이 얼마나 확장되어 왔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자신을 더욱 큰 것으로 보려 하는 이일수록, 마음 또한 보다 큰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너무 당연하다. 크게 보려 할수록 그 시야각도 넓어질 수밖에는 없으며, 큰 그림을 그리려는 이는 더욱 큰 도화지 위에서 작업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마음의 확장사업이 현재는 막혀있으며 다소간에 헤매고 있다. 경제만 불경기가 아니라 마음도 불경기다.


이것은 인간을 지성적 주체로 간주하려는 경향성이 지배적으로 독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통용되는 마음에 대한 표현이 바로 mind다.


mind는 일종의 '생각형태소'이며, 그것들로 구성된 알고리즘이다.


형태소는 뜻을 가진 최소의 언어단위인데, 우리는 이러한 형태소의 특성을 갖는 다양한 생각들로 우리 자신이 이루어져있으며 또 작동한다고 간주한다.


자연스레 여기에서 파생된 관점이 바로 우리 안에는 다양한 마음들이 있다는 발상이다.


이것을 '마음소[마음형태소]'라고 임의적으로 이름붙여보자. 마음소에는 인격적 특성이 곧잘 부여되곤 한다. 토마스, 조지, 샤오란, 나카무라, 춘자, 세르게이, 진첸코 등의, 오늘날 PC문화에 걸맞는 각종 개성적인 인격들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 독립적인 주체이면서 동시에 서로 협력하고 있다. 나라는 유기체를 위해 자신들의 온전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가정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우리의 임무는 분명하다.


우리 안에 있는 다양한 마음소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또 그들이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 자신을 위해 기능하는 선한 주체들이라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다양한 마음들의 온전함을 알아주는 임무를 떠맡는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우리 자신을 위해 가장 잘 기능하는 산업역군으로 아무 걱정없이 일할 수 있도록, 우리는 자비롭고 인자한 왕이 되어 그들에게 덕치를 베푸는 것이다.


인류사에서 근세 전후기에 대표적으로 드러났던 방식이다.


이때 인간의 자화상은, 이성의 힘을 바탕으로 세상을 계몽하는 모습이었다. 즉, 솔로몬처럼 최고의 지성을 가진 왕이 되어 아직 어둠 속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무수한 생각들이 저마다의 욕망으로 충돌해 빚어내는 혼란과 갈등을 평화롭게 교통정리해줄 수 있는 최고의 생각을 가진 인간이 되는 일이 인간의 참된 자기실현이라고 가정되었다는 것이다.


생각 중의 생각을 할 수 있는 이는 가장 인간 중의 인간으로 판정되며, 그것은 모든 생각을 알아주는 생각을 하는 일이고, 모든 인간을 알아주는 인간이 되는 일이었다.


바야흐로 마음 중의 마음, 맘[엄마]이 출현한 것이다.


mind라는 개념이 이끄는 인간의 현실은 이처럼 언제나 엄마로 귀결된다.


인간은 마음이라는 거울 속에서 늘 엄마의 모습만을 보려 했고, 그것을 자기의 모습으로 삼으려 했다.


그렇게 모든 것의 엄마가 된 인간은 이제 자기가 제일 커다란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으로써 마음사업은 중단되었다. 자기가 제일 커다란 주체라는 지루한 동일성의 반복 속에서 더욱 큰 것을 향하려는 운동 자체가 멎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마음의 불경기가 일어나고 있는 양상이다.


공감이니 수용이니 같은 표현들을 남용해가며, 자기도 심리학과 심리상담 또 마음에 대해 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모두 다 내면에 있다고 상정된 마음아이들을 엄마처럼 알아주려는 그 일만을 한다.


여기에는 분명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크고 높은 것이라는 유아적 판타지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니 인간이 그릴 수 있는 가장 큰 자화상이라는 것이 언제나 엄마로만 수렴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엄마가 자기 내외면의 아이들을 지상과제처럼 끝없이 돌보려 한다는 이 그림만으로 이미 엄마는 커다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보자.


인간은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니 인간이 보는 모든 것은 마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보는 그 마음이 바로 인간 자신의 자화상이다.


자기가 대단히 높은 수준의 권위와 품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엄마가 세상 도처에서 자기가 돌봐야 할 것 같은 더 많은 아이들을 본다.


그러한 개인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전부 아이일 뿐이며, 그렇다면 그 자신 역시 아이 외에 다른 어느 것도 아니다.


자신의 자화상이 작은 아이인 이만이 세상 모든 곳에서 아이를 본다.


이미 크지 않다.


아주 작은 것에 고착되어 그 확장과 발달이 정체된 것이다.


마음이 내면의 아이들 따위일리가 없다. 고작해야 임의적으로 편집된 기억을 소재삼아 소설로 쓴 가상적 존재인 징징이들을 다독다독 달래주기 위해 인간이 이 우주에 기적적으로 출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간이 그렇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을 것이지만, 2024년의 인간의 자화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인간은 단지 정서적 존재인가, 단지 지성적 존재인가, 또는 단지 의지적 존재인가?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에 대한 어떤 단편적 정의도 불충분하다는 것을 이해해왔다. 특히 인간이 지성적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의 큰 상처를 통해 분명하게 배웠다.


인간은 설명될 수 없고 정의될 수 없는 어떠한 전체성일텐데, 이것은 부분들로 환원될 수 없다.


차라리 인간은 모호하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며 또 정확하다.


그러나 거대하다.


그 전모를 파악할 수가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크기를 이렇게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은, 우리가 마음에 대한 낡은 이해들을 기각하고 새롭게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하고자 가슴을 열 때다.


마음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아주 거대한 것이다.


마음을 알아주거나, 돌보거나, 챙기려는 그 어떤 주체보다도, 마음은 커다란 것이다.


더욱 크게 마음이라는 것을 보고 싶어함으로써 인간이 얻는 최대의 이득은 바로 그 크기만큼 거대해진 인간 자신의 자화상이다.


자유는 바로 크기의 문제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언급해왔다.


더 커다란 자신을 꿈꾼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를 꿈꾼다는 것이다.


마음이 더 크게 이해되어 마음의 자유가 생겨나면, 인간 자신의 자유도 생겨난다.


81억의 인류가 다 엄마가 되어 선의로 포장된 간섭과 간섭 또 간섭을 하고 있는 현실을 상상해보라.


그 상상이 조금이라도 끔찍하게 느껴진다면, 81억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유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25만 년 전부터 지금껏 인간은 그 자유의 소망만을 위해 자신의 얼굴을 그려왔다.


자유는 언제나 인간이 가장 보고 싶어하던 그 자신의 모습, 가장 최신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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