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은 스마트폰인데 마음은 왜 삐삐세요? #3

"대상이 아니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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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이 아니다.


지구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살고 있어도 대상이 아니다.


마음은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왜 삶이 길 위를 걷는 모두에게 똑같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가?


이 거리에 지금 운석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공통적인 사건인 것 같더라도, 지금 이 삶의 순간은 오롯하게 나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81억의 모든 이는 죽지만, 죽음은 실은 나만 경험하는 것이다. 아주 주관적인 경험이다.


삶의 속성이 이와 같다.


이 주관적 경험의 상태를 마음이라고 부른다.


마음은 나로서의 감각이다.


세상의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오직 나의 것으로서의 그 감각이다.


마음을 경험하는 이는 자신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며,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이야기 중의 하나는 나를 찾아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다. 더 이상한 이야기는 아무리 찾았는데 내가 없으니 이제는 나를 만들어가자는 이야기다.


나는 그런 대상적 소재가 결코 될 수 없다.


대상화에는 두 가지의 방향성이 있는데, 하나는 타인을 대상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대상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것을 대상화할수록 그것의 실재를 잃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이들을 잃었고 또 우리 자신을 잃어왔다.


자신이 특별한 이야기 속 주인공 같은 주체가 되려 함에 따라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대상화다. '주체'와 '대상'이라는 표현은 늘 함께 붙어다니는 한쌍이다. 대상을 도구로 활용해 주체는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착각을 거듭해서 되먹임해간다. 자신이 바로 그렇게 보이도록 연기를 해가는 상황과도 같다.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주체는 자기 자신을 독보적인 주인공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가장 외부의 시선들을 신경쓰고 있는 상태다. 아니 오직 그것밖에는 없다. 남들이 자기를 희극적으로 또는 비극적으로 바라봐주어야만 자기에게 존재감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내가 너를 위해 그렇게 한 거야." 또는 "내가 너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가 주체의 전형적인 대사다.


대상을 이용해 지금 자신이 얼마나 주인공으로서의 심정을 절절히 경험하고 있는지를 외부에 상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광대의 이름이 아니다.


나는 절대주관이다. 이것은 실존주의다. 실존주의는 나의 철학이다. 실존이라는 개념은 왜 관계라는 개념과 정반대편에 위치하는가?


나는 어떤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관계와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관계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즉자다.


그 즉자성은 오직 마음의 경험으로만 분출되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경험과 그 상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대상과도 상관이 없다는 것, 오직 내 자신에게만 일어난 바로 나를 알리는 경험이라는 것, 이것이 마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가장 멋진 방식이다.


인간에게는 커다란 물음이 있었다.


"나는 누구일까?"


인간은 나를 알고 싶어했다.


인간이 나를 알고 싶었던 그 순간부터 마음은 태어났다.


나를 알리기 위해.


우리가 경험하는 그 모든 마음작용은 나를 알리고 싶어 스스로 피어난 꽃이다.


어떤 악의를 갖고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 아니고, 어떤 잘못된 결과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고, 무엇보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어떤 오류가 아니다.


마음은 결코 그따위 것들이 아니다.


저 대상 때문에 자신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지금 이러한 마음을 경험하고 있다며, 대상에게 이 마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은 오늘날 아주 빈번하다.


우리가 마음에 대해 정말로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다.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인식하고 있다.


대상 때문에 마음이 생긴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대상이 활용된 것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오히려 대상은 괜히 쓸데없는 힘을 써서 우리를 돕게 된 경우가 된다. 우리를 도운 그 대가로 심지어 대상은 격하게 심판되고 처벌되어오기까지 했다.


대상이 마음을 만든다는 착각이 이 모든 굴절을 야기했다.


그렇지 않고 지금의 마음을 불러온 것은 나다.


내가 나를 알고 싶어서 불러온 것이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은 이가 거울을 눈앞으로 가져온 것과 전적으로 같다.


우리가 어떤 마음작용을 경험할 때 그게 무엇인지는 잘 모르더라도 '나는 이게 보고 싶었던 거구나.'라고 이해를 시동하려는 이는 아주 지혜롭다. 이 지혜의 방식에 대해 일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불교다.


왜 이런 마음을 보고 싶었을까?


그 마음을 통해 내가 보고 싶었던 나를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자신이 지각하는 세계에서 펼쳐지는 모든 일은 실은 다양한 대상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내 자신과 마음 사이에서만 펼쳐지는 일이다. 정확히는 스스로 펼쳐지는 일이다.


그런 것을 삶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삶은 아주 깊고 맑은 거울에 나날이 우리 자신을 비추어가는 그 과정이다.


그럼으로써 나를 알아가는 가장 내밀한 절대주관의 시간이다.


우리는 이 내밀한 고요함을 깨트리며 오늘날 오히려 더욱 부산스럽고자 한다.


자기가 보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대상에게 투사해, 그 대상을 향해 온갖 에너지를 투입한다. 그러면서 자기의 사랑이 보답받지 못했느니, 그래도 자기는 진정으로 대상에게 헌신했느니 등의 얘기를 하며, 자기가 얼마나 놀라운 주인공인지를 연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이것의 실상은, 대상에게 자기의 자아상을 집요하게 강제한 것과 같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한 것은 자신이면서, 대상에게 그 모습을 뒤집어씌워놓고는 제멋대로 조리돌림한 것이다.


원래 '주체'에게 '대상'은 장난감이다.


그러나 주체는 노리개처럼 대상화된 이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은 지극정성으로 대상에게 최선을 다했는데 왜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고 순결한 피해자 행세를 일삼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기가 계속 주인공이 되는 놀이를 지속하고자 한다.


이처럼 자각되지 않는, 아니 자각하려 하지 않는 폭력이기에, 이 폭력의 연쇄는 쉬이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마음이라는 것을 새롭게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자신이 어떠한 대상을 보고 외롭다는 마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럴 때 '주체'는 그 '외로운 대상'을 위로하고 돌보며 구원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그 대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알아주지 않는 대상으로 인해 주체는 이내 허탈감과 좌절을 경험한다. 그 결과 몹시 외로워진다. 자기는 대상의 외로움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오히려 대상은 자신을 외롭게 만들었다며, 쓸쓸한 자조로 심판과 원망의 감정을 추스린다.


이것은 자신이 대상을 억지로 조작하려는 폭력을 행사하다가 지친 이의 모습이다.


마음을 새롭게 이해하고 있는 지혜로운 이들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살아간다.


어떠한 대상을 보고 외롭다는 마음을 경험하게 되었다면, 이들은 '아, 내가 지금 외롭구나.'라며 외로운 나의 모습을 바로 본다. 그러면서 이해들이 증진된다. 자신이 친밀하게 끌리는 것을 향해 현재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외로움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는 아주 직접적인 대답들이 출현한다. 핵심은 외로운 대상을 돌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끌리는 것을 향해 이동해야 하는 문제였다. 삶에 대한 현명한 내비게이션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와 같다.


삶에 가하는 폭력은 어디에도 없이, 오직 삶의 활력만이 살아오른다.


나를 알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교양의 차원이 아니라, 이처럼 나로서의 구체적인 힘을 증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게 된 새는 날아오른다. 비행의 역량이 생겨난다. 그 날갯짓으로 삶을 힘차게 뻗어나간다.


대상이 아니다.


내가 나는 것이며, 내가 나인 것이다.


나는 자유롭고 힘찬 나를 보고 싶었다.


지금 이 마음은 그래서 내가 불러온 것.


반드시 내가 보고 싶어한 나와 연결되어 있는 길이다.


81억이 길 위에 있어도, 내 마음은 나로만 통하는 나만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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