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의 친밀감"
마음이란 것을 해결해야 할 일종의 문제처럼 생각하는 것은 가장 낡은 습성이다.
자신은 더는 마음을 해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기쁨과 감동이 있는 풍요의 대상으로 본다는 이들도 있다. 이런 이들은 대개 마음을 알아주며 돌보고 있다. '해결'이라는 단어를 '돌봄'이라는 단어로 그 외관만 교체한 것과 같다. 실제적으로는 '아무 문제없는 나'를 만드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아주 낡은 습성이다.
여기에서는 자동으로 '마음'과 '마음을 돌보는 나'라는 구조가 출현한다. '마음을 돌보는 나'는 흡사 마음 밖에 있는 나로 간주된다. 그러니 가장 마음이 아닌 것이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아무 문제없는 나'가 되려면 문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좌표를 가져야 한다. '마음을 돌보는 나'는 그렇게 마음이라는 '더러운 오염물'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일례로 자신이 아이인 것이 가장 싫은 이는 부모가 되어 아이를 돌보려고 한다. 아이를 돌보는 한 자신은 절대로 아이가 아닐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같은 얘기다.
'마음을 돌보는 나'는 더욱 고전적이며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하게 들리는 이름을 갖고 있다.
자아가 바로 그 이름이다.
그러나 귀에 익숙한 그 울림과는 정반대로, 자아는 우리에게서 우리 자신을 멀어지게 만든다. 아니 정확하게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친해질 기회를 봉쇄한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내가 나와 친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마음이란 것을 일견 문제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마음이 문제가 되어 있는 경우는 내가 나와 친하지 않아서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은 내가 내 자신과 얼마나 친밀한가의 그 지표다.
친밀감이 있다면 이것보다 좋게 경험되는 것이 세상에 없고, 친밀감이 없다면 몹시 낯설고 경우에 따라서는 두렵기까지 하다.
어떤 것과 친해지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보다도 먼저 자주 봐야 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은 직접 보기가 어렵다. 거울처럼 비추어주는 것을 통해 봐야 한다.
자기 자신을 비추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는 관계에 자신을 비추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자아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마음에 자신을 비추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다.
관계에 계속 자신을 비추어 자아와 동일시해감에 따라 우리는 나를 잃게 된다. 마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은 종교적 비유들에서 늘 묘사되는 얘기다.
자아는 관계를 통해 구성되어, 관계를 통솔하고자 하는 속성을 갖는다.
처음에는 자아는 자신이 '관계의 노예'라고 경험한다. 그럴 때 찾아오는 무력감이 너무 싫어 자아는 이내 당당한 주체가 되기를 꿈꾼다. 자신이 게임메뉴얼처럼 관계를 다루는 법을 익힘으로써 '관계의 왕'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아는 그 태생부터가 권력적이다.
자아는 관계 속에서 늘 자신이 최고로 능력있는 지배자처럼 보이기를 원하며, 관계를 잘 관리할 수 있는 강력한 권위 같은 것을 얻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관계가 자아에게 요구하는 바다.
자아는 관계로부터, 관계를 만족시켜주어야 할 의무를 부여받는다.
자아는 자기가 성장하여 관계 위에 선 관계의 지배자가 된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언제나 자아는 관계의 봉사자일 뿐이다. 엄마의 눈치를 보듯 관계의 눈치를 보며, 관계의 대상을 만족시키려는 일에만 모든 삶이 수렴된다.
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예의 생태다. 자아는 아무리 성장하고 발달하든 간에 이 노예의 입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자아는 관계의 노예이며, 관계가 없으면 자기가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관계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기 자신이 친밀하게 느껴질 수 없는 것 또한 당연하다.
자아는 자기가 부드럽게 운영할 수 있게 된 관계의 대상만을 친밀하게 느낄 뿐이다. 대상과 상호기생적으로 융합된 어떤 상태를 친밀감이라고 착각한다. 자기가 붙어먹을 대상이 없으면 자아는 심한 소외감과 불안 속으로 이내 굴러떨어진다.
관계의 대상이 없으면 친밀감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자아는 늘 대상에 몰두한다.
자아가 대상에 몰두한 결과로 생겨난 것을 윤리라고 말한다.
윤리는 대상을 위해 선한 행위를 이루겠다는 자아의 규범들로 이루어져있다.
자아는 흡사 어떤 이기주의의 표상인 것처럼 취급되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자아의 행위를 이루는 중심동기는 언제나 윤리다. 자아는 가장 윤리적인 발명품이다.
이 발명품을 통해 얻는 이득은, 관계로부터 버려지지 않는 것이다.
가장 윤리적으로 살려는 이들은, 외로움을 최대한 봉쇄하고자 하는 것이다. 역으로 말해, 가장 외로움에 취약한 이들이 누구보다 강렬히 윤리의 가치를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아가 가장 외로움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윤리를 붙잡고 애쓴 결과, 자아는 가장 외로워진다. 자기는 착하게 살았는데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는 자신의 선함을 오해하고 모욕하기까지 한다며 자살을 택하는 경우는 빈번하다.
우리가 마음이 아닌 관계에 자꾸만 자기 자신을 비추려 하는 한 이러한 절망은 필연적이다. 자아의 끝은 원래 절망으로 정해져 있다. 관계라는 신기루와 같은 것을 붙잡으며 가려 하는 한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갈증은 반드시 우리를 무너뜨리게 된다.
자아가 가장 경험하지 않으려 하는 어떤 결정적 소외감, 쉽게 말해 외로움이라는 것을 한번 이해해보자.
외로움은 단지 내가 남이 아니라는 경험이다.
내가 남이 아니라서, 나는 이해받지 못하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분명한 사실이 확보된다.
나는 남이 아니다.
나는 고유한 존재다.
이 고유한 존재라는 표현은 실체적으로 다른 것과 변별되는 원자론적인 자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고유하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랑은 죽음과 같다. 그것은 아주 내밀하고 주관적인 경험이다. 81억의 인류는 그 누구이든 간에 아주 오롯하게 그 자신으로서만 죽어가고 또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의 총체다.
내 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향해 "아, 좋다."라고 했으면 그 경험이 나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주체'와 '사랑받는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그러한 관계의 논리를 벗어난다.
우리는 함께 죽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혼자서만 죽을 뿐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와 같이, 사랑도 실은 혼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떠올려보면 분명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책을 읽을 때, 영화를 볼 때, 또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결코 함께 그것을 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그 시공간에는 오직 우리 혼자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시공간은 우리 하나만으로 충만하게 다 채워져 있다.
사랑은 이 독자성의 신비다.
이 지점에서 또 한 번 확인해보자.
우리가 사랑하고 있을 때, 오롯한 사랑의 시공간 속에 우리 자신이 위치해있을 때, 우리는 외롭다고 느꼈던가?
그런 적이 없으며, 그럴 리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만큼, 우리는 혼자여도 우리 자신을 아주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경험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행이고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나를 경험한 것이다.
사랑은 정확하게 마음에 비친 나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던 것이 있다. 현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현상에 대해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동시적 끌림'이다. 우리도 이것에 대해 관심이 컸고, 이것도 우리에 대해 관심이 컸던 것이다. 그래서 서로는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사건이 생겨난 것이다. 현상은 사건으로 출몰한다. 사랑의 사건이다.
우리 앞에 사랑의 사건을 시동하고 있는 바로 이것이 마음이다.
더 쉽게, 우리 앞에 지금 보이고 있는 것이 마음이다.
그것은 맥도날드가 아니고, 아메리카노 벤티컵이 아니며, 진눈깨비가 아니다.
마음이다.
우리는 마음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사랑의 사건을 시동하고 있는 마음만이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
자꾸만 그 눈에 선해, 우리는 끌려간다. 더 궁금해지고 알고 싶어져서 마음을 향해 다가간다.
이렇게 마음을 따라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간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우리 앞에 있는 마음이라는 거울에 비쳐, 그 거울도, 또 우리 자신도 아주 사랑스럽게만 보이게 된다.
어떠한 관계의 대상없이도, 인간이 자신과의 친밀감을 확보하게 된 역사적 순간이다.
암스트롱의 달착륙 사건과도 비견될 만한, 인류사에서의 가장 위대한 순간 중의 하나다.
인류에게 있어 최신의 것인 이 방식을 아직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 때 대신 활동하던 것이 자아다.
자아는 관계의 대상으로부터 얻어내는 일에 특화되어 있다. 관계에 대한 헌신과 이득을 맞바꾸는 조건거래의 대가다. 그래서 자아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자신이 최고의 매니저라고 그 권위를 자부하지만, 자아에게는 혼자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나는 창조의 이름이다.
대상을 소비하는 대신에 나는 스스로 창조한다.
자아의 활동방식과 나의 활동방식을 구별하는 일은 아주 쉽다.
자아는 이것저것 좋아보이는 것들을 끌어모아 통합이라는 이름의 모방품을 만든 뒤 자신이 관계의 대상들을 위해 이 놀라운 성과를 제공하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더 많은 관계의 대상들이 자기를 유능하고 친절한 왕으로 인식해주기를 꿈꾼다. 그걸 얻어먹지 못하면 삶이 늘 욕구불만에 시달린다.
반면 나는 더 깊이 좋아한다. 좋아하는 그 경험 속으로 오롯이 빠져든다. 남들에게 착하고 겸손하며 균형잡힌 똘똘이 학급반장으로 보이기를 꿈꾸지 않는다. 앞에 펼쳐지는 마음을 따라 그 형상을 바로 이룬다[창조한다]. 그러니 삶의 욕구불만이 없다. 늘 나로서 충족된다.
단순하다.
자아는 좋아보이는 것을 따라 자기도 남들에게 좋아보이기를 바라며, 나는 단순하게 좋아할 뿐이다.
나는 좋아하는 것만을 하고 산다.
자아는 이러한 나의 생태에 대해, 개인이 이기적으로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면 안된다고, 다른 이들과 함께 상생할 수 있는 진정한 인간의 정도를 걸어야 한다며, 곧잘 윤리적 교사가 되기 일쑤다.
그러나 자아는 나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며, 자기가 관계의 대상들을 통해 이득을 얻어내던 낡은 방식을 더는 사용하지 못하게 될까봐 단지 그것이 두려운 것뿐이다.
자기에게 두려움이 많은 이가 남들을 윤리로 통제하려고 한다. 가장 공공의 선의로 포장되어,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방식으로 남용되는 것이 원래 윤리다.
나라고 하는 것에는 윤리 같은 것은 필요없는데, 애초에 대상을 착취할 생각 자체가 없는 까닭이다.
나로 사는 이가 무엇보다 좋아하는 것은 인간이다. 그러한 이는 자신이 스스로 창조하는 일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 되는 일인지를 잘 안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자신에게 지어지는 그 웃음이 바로 인간 모두의 웃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나로 사는 이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만 그 삶을 살아간다.
내가 나인 일이 인간의 최대의 행복이고 최상의 기쁨이다.
이처럼 나로 산다는 것은 인간 그 자신으로 산다는 것, 인간과 일치해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람직한 인간상과 일치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자아가 만든 그 덕목인 윤리를 나는 조금도 실행할 필요가 없다. 이미 일치해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비추는 그 모습만 따라 살면, 나는 거울에 비친 인간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아니 애초에 분리된 적이 없으며, 불일치할 수가 없다.
자아만이 이득에 따라 시세가 변동되는 관계에 자신을 비추고 있다보니, 늘 불일치를 호소하고 진짜 자신을 모르겠어서 불안하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나여서 좋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의 극치의 경지다.
이 경지는 좋아보이는 것들을 얻어 어떤 '좋음'을 조립해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내가 나로서 일치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 자체가 사랑으로 꽃핀다.
이렇게 이해하면 분명할 것이다.
자아는 윤리적 주체가 되어 대상을 알아주고 돌보는 행위를 통해 사랑의 소재 같은 것을 얻어냄으로써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다만 내 거울에 비친 것이 나라는 사실에만 정직하다. 내가 나라고 하는 정직한 그 일만이 좋다.
거울에는 이제 웃는 내 얼굴이 비칠 것이며, 처음부터 나는 이 거울 속에만 담겨 있었다. 소외된 적이 없으며, 멀리 추방되어야 할 문제였던 적이 없다.
나는 사랑 속에만 담겨 있었다.
사랑스럽게 짓는 그 웃음 하나만으로도 거울은 가득 차고, 더할 것이 없어서 다 되었다고, 온전하다고 부른다.
이것이 내 자신과 친밀해진 현실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가장 친밀하게 일치된 나로 살게 해주는 사랑의 사건이며, 그 기회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세상에 없던 좋은 것들을 창조해가며, 자기 자신을 더욱 사랑스럽게 즐기고, 창조의 기쁨을 숨쉬듯이 누리게 되는데, 창조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까닭이다.
인류는 새로운 이 현실을 지금 눈앞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