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은 스마트폰인데 마음은 왜 삐삐세요? #5

"글쓰기무당의 작가독재 시대를 종결하자"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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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권력을 가지면 세상은 망한다.


자기 머릿속에 정답처럼 소유한 생각대로 세상을 끼워맞추려고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생각을 마치 진실된 어떤 영감 같은 것으로 자주 착각하기에 상황은 더 나쁘다.


히틀러의 행적은 철저한 작가주의의 발로였다. 제국주의 시대를 돌이켜보자. 더 진보적인 것으로의 계몽을 위한 땅따먹기, 이것이야말로 자기가 선구적 리더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행동양식이다. 제국주의 열강의 난립은 무슨 7인회 이런 것처럼 자기들이 다 한 스토리텔링 좀 한다는 작가들의 모임이자, 그 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우월한 작가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암투였다.


인식론과 계몽주의로 무장한 근대는 바야흐로 작가들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작가들에게 힘을 쥐어주면 인간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또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우리는 명백하게 확인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상사적인 근대가 오늘날 SNS 문화로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는 것은 의도적인 기억상실증 때문이다.


이 기억상실증은 '내가 하면 다를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한다.


왕은 왕이지만 자기만은 독재의 고통을 잘 알고 있기에 선별적으로 옥석을 가려 좋은 왕이 될 것이라고, 모든 독재자는 다 똑같이 생각한다.


그리고 나아가 모든 이가 자기와 똑같이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 시대에 수많은 작가들 내지 작가를 자칭하는 이들은 개인미디어를 활용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결국에는 사람들이 자기와 똑같은 발화를 이루도록 촉진한다. 이는 발화자들이 똑똑해보일 수 있는 정보를 계몽해주는 방식으로 집행된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개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해석할지에 대해 중요한 지침을 제공하는 인물로서 일종의 권세를 가지게 된다. 소위 말하는 인플루언서의 출현이다.


과거에 인플루언서를 부르던 이름은 바로 선지자다.


오늘날은 너무나 많은 선지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시대다. 포교는 더는 기성 제도종교의 활동이 아니라, 정확하게 인플루언서의 것이다. 유튜브와 SNS를 타고 현대의 선지자들의 포교활동은 열렬하게 집행된다. 이 선지자들의 목적은 단순한 금전적 이득만이 아니라, 자기의 말과 생각이 사람들에게 특별하고 중요한 무게로 자리잡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은 스승이 범람하는 시대라고도 말할 수 있다.


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가 중학교 수준보다는 조금 더 나은 걸 안 것 같으면 이내 스승전선에 스스로를 투입해서 스승 행세를 하는 일에 여념이 없다.


이런 이들에게 포교된 이들은 정확하게 자기 스승의 복제물로서 기능하게 되는데, 가장 핵심적인 특성은 자기의 스승이 보이는 모습과 똑같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스승이라는 역할이 전할 수 있는 것은 앎이 아니라 그 삶의 모습이다. 스승의 삶의 모습이 유치하면 아무리 좋은 정보를 전한다 해도 실제로 복제되는 것은 유치한 모습일 뿐이다.


자기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자기가 직접 경험해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말과 생각을 그저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그런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인 척 착각의 도취에 빠지는 일은 말 그대로 유치함의 총체다.


작가라는 이름하에 이러한 현상은 이 시대에 광범위하게 창궐하고 있다.


유치함이 더 많은 유치함을 복제해내고, 결국에는 온 지구를 유치함으로 뒤덮어 지배하려는 듯한 독재의 움직임이다.


이런 것을 '작가독재'의 현실이라고 임의적으로 명명해보자.


우리는 이 작가독재라는 개념에 대해 두 가지 요소를 살펴봐야 한다. 첫 번째는 유치함이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이며, 두 번째는 유치함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서다.


먼저 어떤 것을 유치하다고 말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삶을 앞서려는 앎의 기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그 삶이 아직 깊게 무르익지도 않았는데, 그럴 듯한 앎을 언술함으로써 자기가 그런 삶을 사는 존재인 척할 때, 이는 유치함의 핵심이 된다. '중2병'은 이 특성을 대표적으로 드러내주는 현상이다.


유치한 이는 자신의 삶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에 자신을 의존시킨다. 이 경우 언어는 자신이 이런저런 것들을 알고 있다고 하는 전시의 의도가 담긴 홍보책자 같은 것으로 활용된다.


여기에서 유치함의 작동방식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는데, 유치한 이들은 자신이 어떤 것을 문자언어의 화법으로 말할 수 있으면 자신은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 폭포에 대한 현란한 수사학을 동원해 멋들어진 글을 쓸 수 있으면, 자신에게 나이아가라 폭포에 대한 모종의 전문성과 존재론적 권위가 생겨난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언어로 만든 가상현실이 실제 삶의 현실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그만큼 실제적 삶에 대한 굴절은 시작되었다.


이제 유일하게 중요해진 것은, 자신이 얼마나 잘 아는 척할 수 있을지를 표현해낼 작문력이다.


작문력이 이 세상 무엇보다 우월한 유일신적 가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이 세상 무엇이라도 작문력으로 지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작가독재는 바로 이러한 생각에 빠져 있는 상태다.


이것은 정확하게 주술적 생각인데, 자기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수려한 글로 옮길 수 있으면 그것은 실제의 현실에서도 작동하게 된다는 마법적 사고의 반영이다. 근대의 인식론의 귀결이 이러했다.


요즘 유행하는 스토리텔링의 방식을 하나 예로 들어보자.


자기가 얻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미 그것을 얻은 인물로서 자기 자신을 묘사한다. 흡사 자기의 삶을 소설처럼 상정하여 자기가 원하는 결말을 미리 써버리고, 해피엔딩에 도달한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인 것처럼 현재의 자신이 메소드연기를 펼치면 결국 그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시크릿 같은 삼류주술서들을 보면 동일한 얘기는 지겹도록 반복적으로 서술된다.


이런 주술놀이를 하는 글쓰기무당들이 자신을 작가라고 자칭하는 시대다.


결국 그 내밀한 의도는 권력의 획득일 뿐이다.


자기의 생각대로 이 세상이 움직여야 한다는 독재의 힘을 손에 넣고 싶은 것이며, 글은 그 주술도구다.


과거에 거짓선지자들이라고 불리던 이들도 동일한 일을 했다.


따듯하고 인자한 엄마가 되어 세상 모든 것을 아이로 보며 그들 모두를 자신의 생각대로 만들어 구원하려 했다.


자신이 유치하기에 세상 모든 것이 아이로 보이는 것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이유는, 거짓선지자들은 언어로 무장한 만큼 자신들이 성숙한 존재인 줄 착각했기 때문이다.


언어로 성숙해지는 존재는 없다.


존재는 존재 자신의 운동인 삶으로만 스스로 성숙해진다.


자신의 존재가, 자신이 소비하는 언어만큼 성숙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앞서 말한 유치함이다.


성숙해보이는 언어를 쓰면 자기 존재가 성숙해진다고 자기최면을 걸어 믿었던 대표적인 부류들이 조선의 유학자들이었는데, 아무리 사서삼경의 고급언어들을 달달 외우고 있어도 이들이 나이를 한참 먹어서도 그 삶에서 실제로 했던 일들은 동네 골목대장 싸움이었다.


그렇기에 이러한 이들은 자신의 유치함을 자신에게서 최대한 보지 않기 위해, 유치함을 투사해 더 많은 유치한 이들을 세상에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전형적인 스토리를 잠깐 살펴보자.


주된 내용은 일진들끼리 싸우다가 "실은 그 녀석도 좋은 녀석이었어."의 약속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특히 주인공이 자상한 엄마 같은 태도로 일진아이들의 구원을 이루어낸다. 마음이라는 표현을 써서 비유하자면 "실은 그 마음도 착한 마음이었어. 세상에 나쁜 마음은 없다규!"라는 식의 디즈니 꿈동산을 펼쳐내는 그 일만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언어로 삶을 계속 기만하고 있으면, 그는 반드시 삶이 두려워진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속이기 위해 또 한 번 소설은 집필된다. 두려운 것을 최대치로 작고, 약하며, 말랑말랑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려는 작위적인 가공이 가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부드러운 것이 되어야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스토리텔링 주술을 집행한 작가가 한 일을 바로 '의미부여'라고 부른다.


자기가 세상을 창조하고 구성하는 신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의 글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인위적인 의미를 부여할 때, 이 행위가 정확하게 독재의 실제가 된다.


왜냐하면 의미라는 것은 개인들의 삶에서 저마다 고유하게 발견될 수만 있는 것이지, 타인에 의해 임의적으로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미부여'는 각각의 인간에게서 삶의 의미를 빼앗는 일이다.


이것이 그래서 표현 그대로의 독재다.


자기 삶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일 뿐이면서, 모든 이에게 선한 영향력을 제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모든 독재자의 말이다.


삶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권력을 자기가 얻기 위해 유치한 주술적 스토리텔링을 할 뿐이면서, 자신이 글로 이 모든 것을 구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군다면, 틀림없이 작가독재의 양상이다.


작가독재로 인해 가장 자유를 잃는 것은 단연 마음이다.


거짓선지자들은 자신의 글을 통해 신을 생각대로 다룰 수 있다고 믿던 이들이다. 거짓선지자들에 의해 신은 그 자유를 가장 빼앗긴 무능한 존재가 된다.


마찬가지로 작가독재의 주체는 자신의 글을 통해 마음을 생각대로 다룰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이것은 마치 글을 써서 엄마처럼 마음을 다독다독 어르고 달래는 일과도 같다. 일종의 굿이다. 여기에서 마음은 그 어떤 자율성도 없이 수동적으로 그저 징징대며 한풀이만을 바라는 바보로 가정될 뿐이다.


우리가 태양에 대해 글을 쓴다면 이런 식으로 쓰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가 태양이라고 생각하는 이만 자신이 계몽의 빛을 비추어서 마음을 구원해준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그것의 실체는 자신이 가장 상위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권력의 포식행위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마 진짜 작가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권력의 쟁취 같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더 중요한 자신의 임무를 안다.


작가는 성실한 관찰자다.


그 임무를 띠고 세상에 왔다.


세상을 알아주고 돌보고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깊이있게 이해하고 싶어 온 것이다.


세상을 자기 생각대로 되게 만들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있는 그 자체로 사랑해보기 위해 온 것이다.


자신이 세상을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오지 않았고, 세상에서 자신이 자유롭고자 왔다.


즉, 작가는 성숙함의 소망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마음의 자유가 성숙의 비결이라는 것을 그들은 다소간에 이미 눈치채고 있다.


존재의 흐름인 마음이 자유롭게 펼쳐지는 것이 삶이며, 그러한 삶으로 자신이 무르익는 만큼 세상도 한층 반가워진다. 자유란 원래 이 모든 것이 이 모든 것이어서 반갑다는 감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세상이 망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 성실한 이 관찰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실은 가장 깊이 참여한다는 것이다.


조화를 깨지 않으며 어떠한 자유가 펼쳐지는 장면에 스스로를 참여시킬 때, 그렇게 마음의 자유에 동참할 때 우리는 성실하게 관찰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자유의 향기가 세포에 스며들어 나날이 성숙되어 가는 중이다.


작가독재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진짜 작가가 될 것이다.


가장 유치한 일, 그것은 언어적 앎으로 자신을 만들어나간다고 하는 일이며, 세상 모든 것도 그런 자신과 똑같이 만들려고 하는 일이다.


가장 멋진 일, 그것은 삶이 만들어준 자신으로 아름답게 피어나고자 하는 일이며, 그렇게 그 전까지 세상에 없던 고유한 것으로 지금 와서 세상을 위한 선물이 되는 일이다.


무언가를 선물해본 이는 알고 있다. 선물은 오히려 선물하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선물이 되어있다는 뜻이다. 그럼으로써 선물받는 그것을 가장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숙함은 자신이 세상을 긍정하는 귀한 선물로 온 것이라는 이해가 조금씩 실감되어 무르익는 일이며, 진짜 작가는 바로 이 일을 한다. 그것은 아마도 다가올 시대의 생활양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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