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은 스마트폰인데 마음은 왜 삐삐세요? #6

"마음의 지동설, 그리고 우리는 왜 이제 융을 읽지 않는가에 대한 고백"

by 깨닫는마음씨




헤겔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 융을 보면, 이거 다 헤겔이 한 얘기네,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헤겔을 배운 이들이 거의 모든 사상에 대해 동일한 말을 할 가능성은 높다.)


중세의 연금술이니, 대극의 합일이니, 변증법이니, 다 헤겔이 먼저 제시한 개념들이다.


또한 융의 분석심리학적 지도가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과 몹시 유사해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애초에 헤겔 자체가 힌두철학과 상통한다. 아트만적 사유다. 당당한 주체로서 올바른 중심에 선 참된 나를 통해, 모든 것과 대화하며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실현되도록 돕는다는 발상이다.


더 쉽게는, 참나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이며, 우주는 참나가 알아주고 돌봐주는 행위를 통해 지속과 번영이 가능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융은 참나 사상을 심리학적 용어를 써서 묘사한 인물이다.


그래서 참나를 추구하는 영성이나 오컬트적 소재를 좋아하는 이들이 융에 열광하곤 한다.


특히 헤겔의 심리학적 마이너 버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융의 입지는, 빨리 영적 스승이나 마음의 도사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이들이 어려운 헤겔 같은 것을 읽으며 긴 시간을 쓰지 않더라도, 유튜브를 보듯이 참나 사상을 빠르고 쉽게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 같은 이득을 제공함으로써 오컬트 키즈들을 매료시킨다.


이 글은 분명 고백적인 어조로 쓰여야 하는 것이 분명한데, 고아로 자라 남들보다 늘 못나다고 생각해 하루 빨리 남들보다 위대해질 어떤 지름길을 찾아 헤매던 나는 바로 그러한 이유로 융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융도 자신의 심리학적 지도를 전개하게 된 동기는 커다란 열등감이었다. 무엇을 해도 프로이트를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결국 프로이트가 만든 구조 위에다 슬쩍 오컬트적 요소를 얹음으로써 자기가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뛰어넘은 척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은 융의 열등감이 얼마나 모성결핍에서 비롯되었는가다. 그의 모성결핍은 실은 모성과잉이었다. 헤겔이 그리스도교적이라면, 융은 모성을 신적인 것으로 과잉되게 강조하려는 행보를 펼쳤다. 헤겔의 마이너 버전일 뿐만 아니라 굴절되기까지 한 것이다.


여신숭배사상이 융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이유다.


융이 이상적 인물상으로 제안한 것은 잘 알려졌다시피 모나리자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양극성이 통합된 인물의 특성을 모나리자가 잘 보여준다고 융은 말했다. 그러나 그건 융의 말일 뿐이고, 모나리자는 여성이다.


융에게 있어 참나는 여성편향적인, 특히 모성적인 어떤 것이었다.


참나의 역할은 우리 안에 있다고 가정되는 다양한 심리적 소재들을 품어주고 알아주는 것이다. 즉, 융은 여신처럼 활동하는 마음의 엄마 같은 것이 참되고 진정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주장했던 것과 같다.


여신은 엄마에게 끈끈하게 고착된 아이가 보는 엄마의 이미지다. 이처럼 모성애착의 산물을 가장 신성한 것으로 말하고자 했던 이가 융이며, 바로 그 방식으로 융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구조에 가장 들어맞는 병리적 표본이기도 했다.


부성의 결여와 모성의 과잉, 그로 인해 생긴 마마보이적 열등감이 빚어낸 결과물들은 상상 외로 한국사회의 정서에 들어맞는다. 정확히는 이것은 조선의 분위기와 일맥상통한다.


융이 상위적으로 발달한 남성성의 표상으로 제안한 것은 늙은 마법사였다. 요다나 간달프처럼, 부드럽고 인자하며 똑똑한 머리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현자상이다. 그에 반해 융은 남성적인 몸에서 비롯한 강함의 요소들은 다 수준이 낮은 것으로 취급했다.


융은 결국 남성성의 거세를 남성성의 발달이라고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친절한 눈웃음을 짓는 내시 같은 모습이 우리가 제안받은 최상위의 남성성이다.


이것은 곧 엄마를 위협하지 않는 아빠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빠가 엄마를 힘들게 하면, 이제 엄마가 신경증적으로 자신을 힘들게 한다. 이 연쇄를 끊기 위해서는 아빠가 엄마의 비위를 맞추며 잘해야 한다. 그러면 가정이 평안할 것이다. 엄마와 정서적으로 융합되어 아빠를 문제로 여기며 살아온 거의 모든 마마보이들의 귀결이다.


이러한 경향성을 갖고 있는 이들은 융에 쉬이 빠지곤 한다.


융도 동일한 일그러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줄을 몰랐었다.


정확히 20세 때부터 13년간을 나는 융에 심취해서 살았다. 학부 때는 수업을 제끼고 도서관에 가서 융의 책을 읽는 것이 일과였다. 심지어는 졸업을 위해 내야 했던 조악한 소논문도 융을 주제로 썼다. 제목도 아직 생각난다.


「갈매기 조나단을 통해 고찰한 융의 연금술적 원리」


24세의 봄은 흑역사 정도가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인 시기였다.


처음에는 예이츠를 융과 비교하려고 했었다. 차라리 그게 나았을지 모른다. 노골적인 중2병 마법 덕후로 보이기 딱 좋았을 것이다.


융은 마법사를 꿈꾼 인물이다.


요즘 유행하는 이세계 전생물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다.


융의 책을 읽으면 마치 이 세상에 숨겨져 있는 어떤 마법공식들을 알게 될 것만 같다. 레드드래곤의 약점은 무엇이며, 오크족을 퇴치하는 좋은 수단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한 신기한 정보들이 가득 쓰여있을 것 같은 착각을 유발한다. 융이 비밀의 문을 열어 보여주는 세상에서는 용이 날아다니고, 기사들이 뛰어다니며, 섹시한 엘프공주들이 침대 위에서 들썩거린다.


융의 인기는 이처럼 판타지게임 메뉴얼 같은 그의 오컬트 지도에서 기인한다.


마치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듯한 그 메뉴얼만 따라 하면 누구나 쉽게 해리 포터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나는 융을 좋아하는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융의 원전을 직접 읽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융의 책은 정말로 재미없고 지루하다.


책을 펼치기 전에는 라이트노벨처럼 쉽고 재미있는 내용이 펼쳐질 듯한 기대감을 주지만, 실상은 생각이 많은 사람의 말을 듣는 피로감에 휩싸인다.


융의 개념들을 정복해나가면 자신이 마법사로서 엄청난 레벨업을 하게 될 것 같다는 환상만이 신기루처럼 생각의 사막의 지평선 저 너머에서 아른거릴 뿐이다.


물론 대개는 더 빠른 길을 택한다.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내면의 황금』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같은 책들을 통해 융을 마스터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간 이들은 조지프 캠벨의 신화학적 저서들을 통해 융에게 접근하기도 한다.


조지 루카스가 캠벨의 착실한 제자로 그의 신화학적 개념을 활용하여 '스타워즈'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어떻든 '스타워즈' 또한 융의 오컬트 지도가 낳은 유산인 셈이다. 융을 좋아하는 이들이 스타워즈를 좋아한다는 상관관계에는 분명 유의미한 점이 있다.


조지프 캠벨, 신화, 음모론, 영성, 여신사상, 판타지문학, 이런 것들은 융과 분리되기 어려운 소재들이다.


13년의 시간 동안 나도 아주 심취했던 것들이다.


Niow는 내 여신의 이름이었다. 내러티브 테라피를 통해 내 자신이 직접 내면적인 글을 써서 형상화낸 여신이다. 이런 글을 쓰다보면 막 눈물도 엄청 나고, 가슴에서 뭔가 따스한 빛 같은 것도 느껴지며, 그동안 세상으로부터 오해받았던 내 자신이 실은 얼마나 선하고 올바른 의도로 살았던 온전한 사람인지를 메타인지의 시선 속에서 이해받는 경험도 하게 되는 등, 각종 '정신적 자위'의 일들이 펼쳐진다.


실제로 오컬트는 이 정신적 자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했을 때, 오컬트는 아편 정도가 아니라 펜타닐이다.


중독에 빠졌는데 벗어날 수 있었다면, 분명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것이다.


융은 분명 이러한 종류의 중독재인데, 나는 그 중독의 상태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융을 통해 거의 최종적으로 내가 도달한 자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내면의 여신 같은 것과 내 자신을 동일시한 상태였다.


그것은 우주의 중심에 정좌해, 세상 모든 것을 자상하게 다 알아주는 가장 위대한 엄마의 모습이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천동설이다.


이러한 상태에 위치한 나는 양육에 과잉된 신적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가부장적 억압의 독재자처럼 인식되는 나쁜 양육자들을 비판하고, 내 자신이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모든 버림받은 아이들을 다 자유롭게 구원해내겠다며, 꼴값을 떨고 있었다.


그때 나는 분명 내 자신이, 영적으로 깨달았고, 심리적으로 성숙하며, 정치적으로도 공정한 진보성향에, 소외된 타자들을 다 온전하게 바라보는 깨어난 의식을 소유한 데다가, 그럴 수 있는 지성과 인격의 수준이 아주 높은 경지에 올라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깨달은 척을 하고 있던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의 상태를 20대에서 3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빠르게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행운이었다.


남은 긴 생애 동안 다시는 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때의 내 자신이 지금의 내 자신을 만들어주었다는 식의 거짓된 이야기의 교훈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순수한 쪽팔림일 뿐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도서관에 틀어박혀 융 같은 것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깨달은 척하며 한 번뿐인 내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나는 오롯이 나로 사는 내 시간을 더욱 누릴 것이다.


깨달은 척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융에 쉬이 빠지며, 빠르게 영적 스승 내지 심리학적 교사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융에 빠진다.


그들은 마치 융의 개념이 모든 심리학의 기초적 공통개념이라도 되듯이, 융의 프레임을 당연하게 깔고 그 위에서 모든 심리학적 담론을 전개하려고 한다. 거기에는 자기의 것을 당연한 진리로 전제하여 상대를 그 프레임에 은밀하게 끌어들이는 기만적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다. (니체가 가장 혐오한 그 폭력의 양상이다.)


이런 것을 전체주의의 폭력이라고 부른다.


통합을 말하는 이들은 다소간에 전체주의적이다. 남의 것을 중심으로 통합하려는 통합주의자는 없다. 통합은 언제나 자기의 것을 가장 중심에 위치시킨 천동설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유아적 전능성의 다른 이름이 곧 통합인 것이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지혜들의 통합자를 자처했던 이, 그가 융이었다.


물론 실제로 그가 그러한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통합주의자도 성공한 역사는 없다. 다들 자기가 지어낸 소설로 그런 척만 하고 있을 뿐이다.


선(禪)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융이 선에 대해 평하는 서설을 읽어보면 융의 몸부림이 느껴진다. 어떻게든 선에 대해 아는 자처럼 보이기 위해 필사의 힘을 다한다. 그리고 자기는 선보다 더 서구인들의 정신에 적합한 영적 길을 말하고 있다는 식으로 귀결짓는다.


그렇게 자신이 최소 서구권 인류의 진정한 양육자임을 알리기 위해 열변을 토한다.


내가 융을 벗어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정확히 융에게서 가장 유치한 내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품에 안겨본 기억이 없는 나는 엄마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비밀정원의 문을 열고 들어간 마법세계에는 내 엄마가 있을 것만 같았다.


똘똘한 마법사가 되어 엄마에게 사랑받듯 모든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었다.


그렇게 가장 칭얼대는 아이였으면서, 자신이 가장 고매한 양육자인 것처럼 행세하던 그 기만과 사기극이 낳은 분열을 그러나 나는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내 자신으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만이 가장 정직한 소망.


그리고 그 소망만을 향해 내가 이동했을 때 모든 환상은 벗겨졌다.


나는 내가 아이라는 꿈속에서, 내가 엄마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아이도 아니었고 엄마도 아니었다.


엄마를 필요로 하는 아이도 아니었고, 아이를 위해 존재하는 엄마도 아니었다.


내가 그런 것을 원하는 것처럼 13년을 살아왔다는 것이 더 마법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다만 나였다. 그리고 그 사실로 모든 것이 충분했다. 세상은 내가 나일 수 있는 기쁨으로 넘치고 있었다.


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오직 단 하나의 이유, 내가 깨달은 척하고 있어서다.


내가 융이었을 때, 나는 한참을 헤매였다.


발전적으로 뭐가 조금씩 되는 줄 알았지만, 실은 전부 다 머릿속의 미로를 뱅글뱅글 돌고만 있었을 뿐이다. 나를 중심으로 도는 무수한 생각들만이 어지러웠다. 마음의 천동설을 채택하여 살 때의 필연적인 결과다.


판타지소설의 작가가 되고 싶다면 융은 아주 유익하다. 새로운 시대의 톨킨을 꿈꾼다면 융은 최상의 조력자가 될 수 있다. 또 사람들 앞에 캡틴심리학 같은 대장놀이를 하고 싶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단순하게 다만 내 자신으로 살고 싶은 이라면, 일부러 더 복잡한 던젼을 헤맬 필요는 없다.


던젼 안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숨겨진 위대한 무의식의 보물 같은 것은 없다.


정말로 소중한 보물은 이미 우리 눈앞에 다 펼쳐져 있다.


자기를 중심화한 내면의 어두운 땅굴을 파고 들어가려는 이만이 고개를 들어 그 보물을 보지 못할 뿐이다.


최신의 것이란 언제나 우리 눈앞에서 즉각적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망상의 지속을 위해서만 붙잡고 있던 낡은 환상들을 벗기기만 하면 그곳은 언제나 가장 새로운 자리다.


나는 이미 부동의 중심에 위치해 있지 않고, 새롭게 이동해 있었다.


내가 태양이 아니라, 나는 태양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고, 그래서 이제 빛 속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태양 아래서 나는 태어나서 죄송할 것 없이 얼마든지 나로 살아도 되는 나였다.


마음의 지동설이 나의 세계에 업데이트된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 그 자체가 언제나 인간의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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