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은 스마트폰인데 마음은 왜 삐삐세요? #7

"마음어"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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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제 또 마음에 관해 이렇게도 이해해봐야 한다.


마음은 마음어를 배우는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는 일과 유사하다. 그 중에서도 불규칙변환이 매우 심한 외국어를 배우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마음은 전형적인 알고리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마음은 양극성이다."라고 마음에 대한 보편적 알고리즘 같은 것을 주장한다면, 그 말은 반드시 틀리게 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모든 영단어 동사의 뒤에 무조건 -ed를 붙인다고 과거형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마음어도 동일하다.


심지어 같은 상황처럼 보인다 해도 매순간마다 변환의 양상이 다르기까지 한 것이 마음이다.


마음어에 대해서는 정말로 끝이 없이 무한한 불규칙변환들의 다양한 용태를 하나하나 외워서 쓰는 일은 불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일을 하려 하기에, 또 해야만 한다고 간주하기에, 마음이라는 것이 어렵게 생각되는 것이다.


마음어가 쓰이는 생활권으로 들어가면 그냥 자연스럽게 익혀진다. 때에 맞게 알아서 변환되어 입에서 터져나온다.


실제 해당언어의 생활권으로 들어가 외국어를 배워본 이들은 지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너무나 잘 안다.


이것은 결국 우리가 자유롭게 열린 태도로 흐를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곧 유연성의 문제인 동시에, 놀랍게도 바로 규범(norm)의 문제다.


'유연성'과 '규범'이라는 표현은 일견 서로 모순되는 개념 같지만 실은 이 둘은 동일한 현실을 지시한다.


외국어를 잘 배우지 못하는 경우를 떠올려보자.


그러한 이는 모국어에 고착되어 있다.


언어는 그 자체가 규범이다. 하나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규범을 체화한다는 것이다.


모국어에 고착되어 다른 언어에 닫힌 이는 자신이 기존에 알아온 어떤 규범을 진리화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렇게 기성의 규범을 절대화하여 유일신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을 때, 그는 점점 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이 힘들어진다. 아니 거의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지기 때문인데, 이 두려움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가 두려운 것은 신격화된 기성의 모국어로 다른 언어들에 대해 십자군 전쟁을 벌이려는 잠재적 의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더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보자.


자기 모친의 규범을 절대화하며 살아온 이가 있다. 그 규범을 지키지 않으면 그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쁜 존재'로 판정받는다. 그러니 모친의 규범을 지켜야 하는 일은 그에게는 존재론적 무게가 담긴 필사의 일이다.


어떻게든 '나쁜 존재'만은 되지 않고 '착한 아이'로 보일 수 있도록 그는 전력을 다한다. 자기는 순결하고, 무오하며, 그 어떤 죄도 짓지 않았다고 쉴 새 없이 항균제로 손을 씻는 결벽증의 모습과도 같다. 이런 것을 존재론적 결벽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잘못된 것은 언제나 타인이고, 세상이며, 부당한 운명이다. 존재론적 결벽증은 자신의 삶에 대해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자기합리화와 변명의 전문가들을 낳는다. 그럴 듯한 궤변으로 이들은 자기에 대한 가상의 스토리텔링을 행해 자신이 얼마나 무고하고 선량한 사람인지를 호소하는 일에만 인생을 바친다.


그리고 자기가 '착한 아이'일 수 있는 지침을 제공한 모친의 규범을 위협하는 것들을 악한 세력으로 규정하여 그 타도에 또한 몰두한다.


이처럼 하나의 규범을 신격화하고 있는 이는 반드시 다른 규범들에 대한 적대자의 입장에 선다. 컬트종교에 빠진 신도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선량함을 가장하더라도 자신이 늘 악에 대한 심판자의 상태에 있는 까닭에, 이들은 늘 모친의 세력권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 준비를 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상시 임전태세인 까닭에 이들이 강렬한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규범을 절대화하면 문자주의가 된다.


이 문자주의가 윤리로 집행될 때 폭력이 발생한다.


모든 규범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너무나 유익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니 네 말만 진리가 아니라 내 말도 진리라는 식의 유치한 주장 같은 것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유튜브로 배운 이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해체하고자 한 근대의 주체성을 되풀이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장 모욕한다. (그리고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자기 자신을 해체하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정말로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이해한 이는 자기의 것을 고집스럽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참여하게 된 타인의 생활권에서 작동하는 다른 규범을 존중한다.


규범은 선악이나 진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다.


어떠한 환경적 조건에서 지속하고 또 번영하기 위한 편의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렇기에 하나의 고유한 삶의 방편으로 존중받아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렇기에 규범을 잘 이해하는 이는 규범에 대해 유연해진다. 그것들이 임의적인 것이기에 더욱더 존중된다.


인간의 삶이 언젠가는 사라질 임의적인 것이기에, 함부로 대해지지 않고 오히려 귀하게 존중되는 일과 전적으로 동일하다.


다른 규범을 무시하며 규범들 사이에 진리투쟁을 하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에게 내사되어있는 규범을 절대화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광신도들뿐이다.


이러한 이들은 다른 공동체에 들어가 그곳의 규범을 존중하기보다는, 자기의 모국어, 자기 모친의 규범을 종국에는 들이민다. 칼만 안들었지 깡패들의 행태다. 요즘 깡패들은 칼 대신에 펜을 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펜으로 이루는 규범의 절대화는 곧 언어의 절대화이며, 언어의 문제는 바로 이럴 때 출현한다. 언어가 삶의 자유를 억압하고 고문하는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폭력적 용법 속에서는 마음어를 결코 배울 수 없다.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삶이다. 마음어의 습득은 삶의 회복에 달려 있다.


그것은 생활인이 되는 일이다.


외국어를 배우러 외국의 생활공간으로 들어가 그곳의 생태를 반영한 규범을 익히듯이 마음어에 대해서도 같다.


마음어를 쓰는 생활공간 속에서 같이 생활하면, 그렇게 시작된 삶으로 말미암아 마음어가 자연스레 익혀진다.


애초에 규범이 생성된 목적이 지속가능성의 증진과 번영의 소망이라고 할 때, 그것은 결국 환경과 잘 조화를 이루고 싶다는 의미와도 같다.


이처럼 규범은 어울림을 위한 것이다.


잘 어울릴 수 있으면 규범이 잘 체화된 것이다.


규범은 십계명이 아니다. 자기만 혼자 존재론적 결벽증의 태도로 문자주의적 항목들을 잘 지켜간다고 "난 내 책임을 다했거든? 나머지는 니들 문제거든?"이라며 당당하게 말해야 할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영어권에 사는 이와 대화할 때, 자기는 성문종합영어에서 배운 문법대로 문장을 만들어 말하는 책임을 다했으니 대화가 안통하는 것은 상대의 책임이라고 하는 일과도 같다.


잘 어울리고 있다는 증거는 대화가 잘 통하고 있다는 것이며, 대화는 언제나 흐름이다.


대화는 그 내용이 아니라 흐름 자체가 중요하다.


들숨과 날숨을 함께 섞으며 서로의 존재를 나누는 일이 곧 흐름의 의미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가 흐르는 현상이다. 마음은 흐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대화는 가시적으로 우리의 존재가 함께 잘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인 셈이다.


함께 잘 흘러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제법 잘 어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큰 기쁨이 된다.


처음으로 자신이 배우고 있던 외국어를 해당언어의 상대에게 발화해보았을 때, 그 말이 받아지고 또 메아리로 화답되던 기억을 떠올려볼 수 있겠는가?


하늘을 날 것 같다.


세계는 더욱 넓어지고, 자신은 더욱 큰 존재로 한결 더 자유롭게 경험된다.


마음이 통한 느낌이다.


우리 사이에 마음이 흘러 정말로 마음이 통했기 때문에 우리는 환희했던 것이다.


마음어는 바로 이러한 현실이 우리의 매일매일이 되고 싶어서 배우게 되는 언어다.


모든 언어는 사실 마음어에 대한 모방이다. 다 마음어에 대한 대체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마음어는 외국어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순수한 모국어다. 그러나 우리가 이 태초의 모국어를 긴 시간 동안 망각해왔기에 이제는 외국어처럼 어렵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 회복의 열쇠는 삶이다.


엄마에게 배운 모국어로 자기가 절대적 대장인 척하는 일을 그만 하고, 다양한 공동체의 생활권에서 작동하고 있는 각각의 규범들을 존중하여 그 생활공간에서 조화롭게 어울리며 살아가다보면 마음어는 반드시 체화된다.


아예 더욱 직접적으로 마음어를 쓰고 있는 생활권에 참여해 마음어로 말하고 듣는 마음생활인이 되면, 가장 빠르게 마음어의 감각은 회복된다.


마음은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하!"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며, 알아주며 통합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살아야 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살면, 단순하게 통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것,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기쁨이다.


마음이 통한 그 기쁨이다.


마음어는 오직 이 기쁨을 향해서만 자연스럽게 흘러 발화된 최초의 언어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다시 찾은 최신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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