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은 스마트폰인데 마음은 왜 삐삐세요? #8

"정신분석, 조선의 미생들을 위한 심리학"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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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한반도의 정서에 잘 맞는 심리상담의 접근을 꼽으라 한다면, 압도적으로 정신분석에 표가 쏠릴 것이다.


정신분석, 더 크게는 정신역동적 관점은 애써 밭가는 일도 필요없다. 마이크를 든 스피커만 출현하면 이미 뜨거운 지지와 열광은 준비되어 있다.


이것은 한반도에 작동하는 지배적인 문화적 문법이 구성하고 있는 그 실체가 조선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은 조선에 아주 딱이다.


물론 프로이트는 조선에 대해 알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가 자신의 유태인적 사유를 펼쳐내기만 하면 그 결과물은 큰 어려움 없이 바로 조선에 적용될 수 있을 정도로, 어떤 정신적 핵심이 상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아버지의 상실이다.


프로이트가 씨름한 문제는 과학과 기술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이제 더는 신이 인간의 중심축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이것은 정확하게 아버지의 권위가 추락하여 아버지를 잃은 현실과 같다.


가부장제는 이념화된 아버지를 추구하는 현실이다. 여기에도 아버지의 상실이 있다. 현실에서 아버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그것을 인간의 내면에 재구성한 결과가 바로 이념이다. 이른바 이념은 아버지를 상실한 이들의 정신적 아버지인 셈이다.


조선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그러니 고집센 가부장의 전통만이 이어졌다. 조선의 지배적 사상인 유교는 이념으로서의 아버지를 실현하는 길을 조선인들에게 뜨겁게 주장해왔다. 오늘날에는 그 열기를 조금 식혀도 되다. 이제 정신분석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윤리다.


정신분석은 철저하게 개인이 윤리적 힘을 강화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 전통이다.


라캉 같은 이가 프로이트의 적자를 자칭할 수 있었던 것은, 프로이트의 핵심이 윤리라는 것을 그가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그 역시도 프로이트 못지 않게 윤리적 의도에 집중했다.


융이든, 현대정신분석이든, 프로이트의 후예들은 다소간에 다 이 윤리적 의도를 공유한다. 역으로 말하면, 윤리적 의도를 심리학적 구조의 중심에 위치시키고 있는 한 그는 프로이트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윤리적 의도를 집행하는 원천이란 바로 내면의 아버지다. 프로이트에게는 초자아라고 명명된다.


외적인 현실에서 아버지[신]를 잃고 아버지의 권위가 실추된 까닭에, 현대인들은 길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고 프로이트는 진단했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그의 기획은 대단히 창의적이었다.


신이 죽은 자리에 프로이트는 윤리를 위치시켰다.


외적 현실에서 상실한 아버지를 내적 현실에서 윤리장치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 이것은 일종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모든 혁명이 그렇듯이, 언어로 삶을 이끌겠다는 또 하나의 계몽주의적 기획이었다.


여러 정신역동의 관점에서 내면의 아버지를 어떻게 지칭하든 간에, 그 임무는 하나다. 그것은 복잡하고 혼란한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교통정리를 하는 일이다. 즉, 무의식에 질서를 가져오는 일이다.


아버지가 공정하게 제정한 언어적 법이 있으면, 또 그 법을 따라 살면, 인간의 마음은 그 영광된 빛으로 인해 이제 조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되었다. 결국 이것이 정신분석의 목적인 셈이다.


또한 이것은 모든 윤리적 기획의 목적이다. 하늘 같은 아버지로부터 전해받은 참된 언어로 삶을 이끌 수 있는 리더를 요청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윤리다. 윤리는 개인이 윤리적 리더로 거듭나는 현실을 꿈꾼다.


프로이트가 구약성서의 모세에 관심을 둔 이유다.


구약성서는 분명 윤리적 텍스트이기도 한데, 그래서 신약이 출현했다.


윤리로 추락한 종교성은 더는 종교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프로이트는 라캉만큼이나, 모든 이가 종교적 감수성을 갖고 그의 자유를 누리며 사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임이 분명한데, 그래서 그는 차라리 종교성의 대체품으로 윤리를 보급하려 한 것이다.


유학자들도 동일한 생각을 했다. 도(道)를 따라 사는 대신에, 언어적 윤리를 따라 사람들이 살도록 하는 일에 그들은 매진했다.


프로이트나 조선의 유학자들은 아무래도 마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놓을 수가 없던 까닭일 것이다.


자기들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면서, 사람들이 마음을 따라 살면 위험하니 자기들이 제공할 윤리적 장치를 따라 살아야 안전하다고 말하는 일은 기만적이다. 이 기만이 자각없이 계속 작동하면 인간에 대한 억압이 된다.


정신분석 스스로가 인간을 억압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접근이라고 자임하지만, 정신분석 자체가 억압이 되는 역설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생겨난다.


이것은 말하자면, 나쁜 독재자들에게서 해방시켜주는 참된 지도자를 통해서만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는 언제나 숨겨진 억압이 된다.


독재자와 싸우던 이들 자신이 독재자가 되어 있는 경우는 오늘날 조선사회에서도 빈번하다.


586이라고 불리는 어떠한 문화현상의 소재들은 이러한 경향성을 자주 드러낸다.


유학으로 단련된 기개높은 선비의 인물상과 동일시되어, 아직도 자신들이 제일 생각이 깨어있고 자유로운 척하지만 실은 제일 꼰대다.


나쁜 리더가 아니라 좋은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즉 삶에는 반드시 리더의 언어적 법[윤리]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야기된 일이다.


아마도 586만큼 윤리적인 세대는 없을 것이다. 윤리적 리더를 꿈꾸며, 그 리더상과 자기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윤리의 아바타들이다.


이들이 나쁜 아버지들에 대한 저항자로 스스로를 입지화한 이유는, 그 내면에 이념화된 아버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 있는 이념의 아버지상을 기준으로 삼아 이들은 외부의 지도자들의 자격이 적절한지를 평가했다. 그 기준이 높은 만큼 이들은 아버지의 부재를 크게 경험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상실의 크기와 이념의 크기는 비례한다.


실은 누구보다 참된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적으로 따르고 싶었지만, 그러한 아버지가 실제의 현실에 없기에 거의 대부분의 아버지에 대해 반역하게 된 입장이, 이들이 가진 특유한 고뇌의 색채를 구성한다. 이것은 늘 양가적으로 충돌하는 모순 속에 위치한 듯한 감각이며, 스스로를 적절한 대상에게 흡착시켜야 한다고 믿는데 그러지 못해서 오는 불안으로 결국 경험된다.


이처럼 윤리라는 것은 참된 리더라는 대상을 향해 대상지향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념적 대상을 향하는 한 그 행위는 언제나 현실에서는 불안으로 귀결될 수밖에는 없다.


더욱 윤리적일수록 더욱 불안해지는 이 상태는 실증적이다.


물론 정신분석가들은 개인이 나쁜 억압적 윤리를 따르고 있기에 생겨난 불안을, 이제 현실적이고 유연한 윤리를 따를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해소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신경증적 불안에 대한 얘기일 뿐이다.


무엇인가 내면의 언어가 삶을 리딩하게끔 설정되어 있는 이 구조 속에서는, 존재론적 불안은 피할 길이 없다.


선한 진리의 이념으로 내사된 내면의 아버지는 좋은 것 같으나, 우리 자신의 존재와는 더욱 멀어지게 만든다.


이념으로 살수록, 나로는 살지 못하게 된다.


영원한 이념일수록, 영영 나를 잃는다.


정신분석에서 잘 기능하는 '나'로 가정하는 것은, 아버지처럼 알고, 어머니처럼 알아주는 것이다. 아버지의 법을 따라 어머니의 품으로 세상에 집행하가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착한 자식이고, 성실한 신도이며, 순종적인 어린 양이다.


조선의 어머니는 불을 끄고, 이처럼 자식이 아버지의 법을 바르게 잘 내사했는지를 테스트하고자 했다. 자기 자신도 그 법을 잘 따르고 있다는 증거로 고르게 썬 떡을 보여주며, 자식이 가야 할 윤리적 길을 전하곤 했다.


조선의 자식들이 어머니를 신성시한 것은 실은 이러한 어머니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무서운 것을 신성화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습성이다. 벼락이 내리치면 하늘의 신을 만들고, 지진이 일어나면 땅의 신을 만든 그 방식이다.


물론 어머니도 아버지의 부재가 두려웠고, 그만큼 이념적 아버지는 한층 더 견고히 신성화되었다. 이념적 아버지상을 진리의 척도로 삼아 조선의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훈육했다. 이제 어머니와 자식은 신앙심이 깊은 이념의 신도가 되었고, 실제의 아버지는 이념의 성공적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불쌍한 양반' 정도로 밀려나게 되었다.


아버지는 점점 더 현실세계에서 상실되고, 상실된 그만큼 내면의 이념적 권위로만 그 세력이 강해지는 순환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이 선순환인지 악순환인지 말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존재는 이념이 아니며, 또한 내적인 어떤 심리적 소인이 아니다.


존재는 윤리에 위탁하여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윤리 이전에 스스로 서있는 것이다.


존재는 단 한 번도 미생(未生)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


윤태호 화백의 '미생'이 얼마 전 시즌2로 완결되었다.


장그래는 선비가 되고 싶은 586의 대변자이자 후계자였다. 그런 최종의 감상이 남는다.


미생에서 묘사된 회사생활은 해당의 인물들이 30대로 그려질지라도, 그것은 지금의 30대가 아니다. 586이 386으로 불리던 그때의 30대다. 그때의 낭만이며, 그때의 영광이다.


장그래는 586처럼 일하고, 586처럼 연애하며, 특히 586처럼 고뇌한다.


삶에 적극 뛰어드는 도전자로 보이지만, 그 앞에는 이념이 한참 앞서있다. 생각이 많은 것은 길을 가면서도 자신이 지금 이념에 부합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반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에 자신을 비춘 결과는 언제나 사람들 앞에 감사하고 또 미안하다는 것이다. 윤리적 의도가 낳은 죄책감이다.


이 죄책감이 극복되는 때는, 장그래 자신을 향한 타인들의 신뢰가 가득해졌을 때다. 장그래는 자기를 비추는 관계의 시선들을 통해 비로소 자기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경험한다.


그 시선은 언제 작동하는가?


장그래가 윤리적 이념을 성공적으로 체화해 그러한 인물상에 근접하게 되었을 때다.


미생의 인물들이 장그래를 평하는 최종의 관점은 이러하다.


'참된 리더.'


장그래는 이념의 체화에 성공한 것이고, 586의 꿈은 실현되었다.


정신분석은 조선땅에서 그 목표를 성취했다.


미생에서 완생을 이루었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관계의 완성을 통해.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자발적으로 잘 훈육받은, 어머니의 착한 자식이 마침내는 윤리적 리더의 왕위를 계승받았다.


이것을 이념의 실현이라고 말할 것이고, 윤리의 결실이라고 말할 것이다.


좋은 말은 무엇이든 다 가져다 붙여도 좋다.


존재만 아니다.


아무리 서로의 최선으로 완성된 삶이라도, 내 삶은 아니다.


리더의 자리에 오른 장그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 각자가 자기 자신의 리더가 되도록 이끌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리드하는 것이 참된 리더쉽이라는 것을 보이려 한다.


이것이 바로 오래된 근대의 꿈.


이념이라는 것이, 모두가 자기 자신의 리더가 되어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더불어 실현하는 유토피아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옛시절의 꿈이다.


헤겔도, 마르크스도, 조선의 유학자들도 꾸었던 그 꿈이다.


그 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수사학을 더욱 동원해 묘사해도 된다.


존재만 아니다.


아무리 언어적으로 영롱해도, 내 삶은 아니다.


정신분석의 한계는 인간의 마음이 이렇게 빨리 커질 줄은 몰랐다는 점이다.


나라는 이름의 존재의 운동이 이토록 가속화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윤리적 이념의 언어게임을 하고 있는 동안, 인간의 핵심은 종교성이었다는 것을 인간 자신은 신속히 회복해갔다.


나는 단지 나로 자유롭다, 이것은 종교성의 핵심이다. 관계가 개인을 지지하지 않아도, 또 개인이 관계를 의지하지 않아도, 인간은 본래 죄가 없고, 부족함이 없으며, 다만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였다.


우리가 오랜 시간 지속해온 가장 크고 낡은 착각은 우리가 못난 죄인이라는 것이고, 우리의 존재가 결핍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안의 중심이 되어줄 윤리적 이념[내면의 아버지]이 필요하다는 것이며, 정신분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마음을 존재현상으로 이해하는 우리의 최신의 입장은 어떠한가.


우리는 거기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자신이 부족하고 못났다는 착각 속에서 미안함과 감사함을 끌어안으며, 그로 인한 성장을 통해 사람들의 소중함을 마침내 알게 되었고 이제야 자신 또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참된 리더신화의 내러티브를 더는 소비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생을 꿈꾸는 미생이 아니다.


존재는 처음부터 자생했다.


정신분석의 정반대편에서 실존주의 심리학은 그렇게 말한다.


정신분석은 정치적이고, 실존주의 심리학은 종교적이라고 흔히 평해진다. 전자는 관계지상주의이고, 후자는 존재자체주의다.


미생과 완생은 다 관계적 프레임 위에서의 표현이다. 이 프레임에서는 삶은 관계를 통해 조직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존재의 관점에서는, 삶은 존재가 스스로 꽃잎을 틔워가는 운동이다.


꽃은 바라봐줄 이가 없어도 핀다.


대상을 위해 피지 않으며, 대상을 통해 피지 않는다.


꽃은 꽃이며, 그렇게 나는 나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그 모든 관계를 통해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현상인 마음을 통해서만 나로 선다.


나에게는 리더가 필요없으며, 나는 스스로의 리더도 아니다.


나는 자유로웠다고만 불릴 것이다.


자유를 경험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내 삶이라는 것을 살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만 말해질 것이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렇게 살 수 있는 이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 150년 전에는 스마트폰으로 우리가 지금 당연하게 하고 있는 것들을 누리는 일은 아예 불가능한 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정신분석은 150년 전을 추억하며 그 시절의 낭만을 지속하려 한다. 586이 자신들의 30대를 추억하듯이, 또 유학자들이 조선을 추억하듯이.


이들에게 미생은 낭만의 이름. 미생이어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시절의 낭만이기에, 미생은 완생의 꿈속에서 그 상태로 지속되고자 한다.


내면의 아버지를 꿈꾸는 이는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간다는 영원한 꿈속에서 사는 아이로만 지속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깨어나 자유롭고 싶다.


그때 그 시절에는 아련한 낭만이었던 정신분석을 뒤로 하며.


마음을 윤리적으로 리딩하는 주체가 아니라, 마음을 자유롭게 사는 나로 성숙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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