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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Feb 17. 2024

폰은 스마트폰인데 마음은 왜 삐삐세요? #9

"마음은 문화다"




  마음은 우리 내면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마음에 대한 이해가 아직 충분하지 않을 때 생겨난 이 낡은 오해와 착각은 빨리 지양될수록 좋다.


  이것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해 그러하듯이 마음에 대해서도 대상적으로 취급하려는 주체의 작용이다.


  대상은 주체에 의해 소비되는 품목이다.


  주체는 소비품들에 둘러싸여 그것들을 관리하고 운용하며 살아간다. 즉, 주체는 소비의 대상들을 유능하게 해결하려고 한다. 해결은 궁극의 소비방식이다.


  이처럼 주체는 자기가 다루어야 할 대상 없이는 살 수 없는 대상의 노예다.


  관계는 대상들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장치다. 그래서 주체로 살려는 인간은 늘 관계의 노예로 살게 되는 것이다.


  관계는 그렇다면 무엇이 만들어내는가?


  바로 언어가 만들어낸다. 언어는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의 위에 신처럼 군림하게 된다. 마음이라는 것 또한 언어에 의해 그 처우가 달라질 수 있는 하위의 소재로 몰락한다.


  해결되어야 하는 대상이 됨에 따라 마음은 관계의 노예가 되고, 언어의 노예가 된다.


  마음의 자유는 더 깊은 지하감옥 안에서 봉쇄된다.


  마음은 지금 지옥에 갇힌 것이다.


  지옥에 갇힌 이들의 생활양식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있다.


  지옥에서 사는 이들은 일부러 흡연실 가까이를 지나가며 흡연자들을 욕하고,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 앞에서도 천식에 걸린 것처럼 기침을 해댄다.


  여기에는 죄책감을 전가하기 위한 필사의 의지가 있다.


  지옥에서는 언제나 "누가 잘못한 자인가?"의 격전이 펼쳐진다. 죄책감으로 인한 자기의 고통을 잊기 위해 최대한 빨리 다른 이를 잘못한 자로 만들어 죄책감을 떠넘겨야만 한다.


  지옥은 그래서 윤리적인 이들로 가득한 곳이다.


  지옥의 행동원리는 윤리다.


  윤리에 의해 심판되고, 처벌되며, 고문이 가해진다.


  주체라는 것은 언제나 윤리적 주체다. 혼란스러운 모든 것에 자기가 질서를 부여하겠다며 정립된 개념이 곧 주체인 까닭이다.


  주체로 계속 사는 그 끝에서 반드시 만들어지는 것은 불지옥이라는 것을 우리는 가스실과 원자폭탄의 역사에서 아직  충분히 배우지 못한 듯도 싶다. 그러니 당당하게 세상에 나를 외친다는 식의 말이 인기를 얻는 것이다.


  주체는 언제나 나를 외친다. 자신이 얼마나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착한 존재인지를 호소한다.


  더 큰소리로 외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존재하지 못하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실은 지옥에서 꺼내달라는 절규일 것이다.


  그렇다면 큰소리도 이해가 간다.


  근대적 주체의 비극은 결국 인간이 모든 아름다움의 담지자인 것처럼 행세해놓고는, 스스로 그 모든 아름다움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문화의 파괴.


  이것은 인간 자신에 대한 부정이다.


  동시에 마음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가장 잔혹한 처사다.


  마음은 문화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 자유롭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실현되었을 때의 그 모습이 바로 문화다.


  마음이 문화로 현실에서 드러나는 그 작용을 창조라고 부른다.


  이처럼 마음은 결코 추상적인 소재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현실의 소재다. 마음이 회복되어 그 생명력을 찾았을 때는 반드시 문화적 형상으로 꽃피어나게 된다.


  섬세하게 피어난 꽃을 못알아볼 수는 없다. 하물며 꽃을 짓밟는 일도 그것이 꽃이라는 걸 알아보아서 생겨나는 일이다.


  현실에서는 투박하고 촌스러운데, 자기 내면의 마음은 풍요롭다고 주장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문화의 핵심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이해해보자.


  생활의 기초는 먹고, 자고, 싸는 것이다. 이 기초에 충실하면 문화가 태어난다.


  멋있게 먹고, 멋있게 자고, 멋있게 싸게 된다.


  인간의 생활양식이 밀도있게 집중되고 깊이있게 숙성되어 멋의 향기가 흐르게 된 것이며, 이것이 바로 문화다.


  마음은 반드시 이처럼 문화로 펼쳐지고자 하는 운동의 방향성을 갖는다. 마음이 흐르고자 하는 것은 문화가 되기 위해서인 것이다.


  우리가 그 흐름을 타고 갈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창조의 즐거움이다. 


  이때 우리는 주체라는 이름의 소비자가 되지 않는다.


  나로서 창조하며 산다.


  삶의 근원적 기쁨이 우리를 에워싼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거리마저 새로운 색으로 빛난다.


  거의, 다시 태어난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비자에서 창조자로 이동하게 된 이 순간은 정말 감동적이다. 우리가 그 전에 세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그것은 우리를 가로막는 장벽이 아니라 우리 앞에서 펼쳐져가는 것이다. 내일은 어떤 행복이 기다릴까, 잠드는 그 순간조차도 설렘으로 가득하다.


  이 문화창조자의 생활양식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한 콘텐츠를 늘 안간힘을 다해 쥐어짜내서 생산하는 일과는 다르다.


  문화는 무엇보다 먼저, 아니 어쩌면 유일하게도, 내 자신과만 연관되는 것이다.


  문화의 창조적 향유자가 될수록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아름다운 존재로 확인해가게 된다.


  그럴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욕구불만이 사라지고, 삶은 더는 지옥이 아니다. 죄인찾기 게임도 멈추게 된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결국 인간의 비극을 낳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스스로 우리 삶을 비극으로 만들어 그에 빠지는 이유다. 비극에서는 극의 문법구조가 제공하는 아름다움의 효과가 창출된다. 그러니 비극 속에서는 어떠한 아름다움의 편린 같은 것을 다소간에 자신이 주워먹을 수 있는 것처럼 경험할 수 있다.


  이를 가난한 문화생활자의 방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마음이 가난하면 이처럼 아름다움의 쪼가리만을 구걸하며 비극을 살게 된다.


  마음이 부자인 이는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경험할 기회가 거의 무한대다. 마음이 문화로 실현되며 그 자신이 함께 꽃피어난다.


  마음의 부자가 되는 방법은 정말 단순하다.


  해결해야 할 문제로만 삼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마음은 처음부터 그러했듯이 풍요와 번영의 소재로 그 위상을 바로 찾는다.


  마음은 원래 어마어마한 고급재다.


  마음을 문제로 생각하는 이는, 비유하자면 1000억을 가진 이가 어떻게 하면 이 돈을 자기가 지켜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그게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이 귀한 고급재이니만큼, 마음은 써야 하는 것이며 펼쳐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해결하려는 이는 자기 자신에게 인색한 이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해진다.


  마음을 따라 그 마음이 향하는 바대로 에너지와 자원을 적극적으로 가용하려는 이는 자기 자신을 귀한 존재로 발견하려는 이다. 이렇게 마음이라는 것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마음은 더욱 커진다. 마음의 부자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화는 마음이 인간 자신의 귀함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확인 속에서, 그 거울에 비친 상을 다시금 현실에 되먹임한 그 결과다.


  그래서 문화적 인간이란 스스로 귀할 수 있는 존재다.


  더는 그 사실이 의심되지 않는다. 이제 삶은 내 자신이 귀하다는 이 사실을 하루하루 확인해가는 기쁨의 과정이 된다.


  창조하는 문화생활자의 모습이다.


  현재 드러나는 문화적 양상이 남의 말이나 따라하고, 성공적이라고 말해지는 언어적 방식이나 모방하려는 미숙하고 투박한 성질로 전개되고 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우리 마음의 빈곤함을 보여주는 지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나 폭력적으로 하대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방증이다.


  문화의 파괴는 우리 자신의 파괴다.


  윤리적 미명하에 모든 것을 도구적으로 대상화해가며 자신을 선한 주체로 영광되게 하고자 하는 그 일이 문화의 파괴를 부르며, 우리는 결국 아무리 성공적인 그 무엇을 얻더라도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우리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윤리의 신봉자들은 지옥을 좋아한다. 지옥에서는 올바로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기 자신이 상대적으로 더 빛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장 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언제나 더 많은 지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천국이라는 비유는 창조 속에서만 성립된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이는 이미 천국에서 산다. 마음이 가난한데다가 자기는 수준이 높다고 자위하며 위악적이기까지 한 이들이 자주 망상하듯이 천국은 지루한 곳이 아니라, 늘 자기 자신을 더 아름답게 펼쳐갈 창조의 즐거움이 넘치는 곳이다. 


  천국은 가장 그 마음이 창대한 문화생활자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은유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지구가 그런 천국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볼 만한 시점이 되었다.


  인간의 마음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커졌기 때문이다. 특이점은 금방이다.


  물리학적 빅뱅과 함께 이 우주가 창조되었다면, 이제 마음의 빅뱅에도 우리는 설레여본다.


  마음은 문화다, 이것은 우리의 심리학적 혁명의 표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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