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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Feb 26. 2024

폰은 스마트폰인데 마음은 왜 삐삐세요? #10

"마음의 부자"




  오늘날 성공포르노 등의 SNS 산업은 화석연료 대신에 '있어보이는 척'으로 생산라인을 가동시키고 있다.


  있어보이는 척의 스토리텔링을 누가 잘하느냐가 얼마나 타인의 욕망을 성공적으로 자극해 사람들로부터 자원을 획득해낼 수 있는가의 지표가 되어 있다.


  소위 부자가 되려면, 먼저 부자처럼 있어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상품을 파는가보다 그것을 누가 팔고 있는가의 문제가 지배적으로 중요해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를 산다. 그 누구처럼 똑같이 살려고 한다.


  있어보이는 자신을 일종의 허구적 우상으로 내세워 팔고 있는 이 일은 윤리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니체의 말처럼 생리학이다.


  팔지 말아야 할 것을 파는 일은 인간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인간이 인간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사기는 존재에 대한 사기다.


  요즘 사기꾼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보면 다 이 존재에 대한 사기꾼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자기가 꾸며낸 언어대로 자신이 정말로 '있어진다고' 간주한다. 자신은 자신의 생각대로 존재하게 된다는 식이다.


  존재의 사기꾼들은 이 세계가 일종의 언어게임이자 프로그래밍으로 구성된 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기는 세계를 구성하는 핵심법칙을 파악했기에 이 세계를 생각대로 조종하거나 운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인드해커, 라이프해커, 라이프코치, 언어술사, 멘탈리스트 등이 이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다. 자기를 매트릭스의 네오 같은 인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이들이 모종의 메타인지 체험을 했을 가능성은 높다.


  방구석에서 아무 능력도 자원도 없는 자폐적 찌질이임을 자학하며 고통받다가, 또는 그러한 자학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이상한 자기계발서들을 읽거나 명상 등을 하다가, 그 끝에서 그들은 갑자기 갑갑했던 상태가 편안해지고, 정서적 안정이 찾아오며, 또 좁았던 시야가 마치 안개가 걷히듯이 확 투명해지고 맑아진 경험을 하곤 한다.


  뒤편 45도 각도에서 어떤 커다란 시선이 되어 자기를 내려다보는 듯한 경험도 했을 수 있고, 또는 아주 작은 자신을 우주에서 관조한 듯한 경험도 했을 수 있다.


  세계는 언어적 이야기로 만들어졌고, 자기는 그 이야기 밖에서 이제 이야기에 영향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이야기를 편집하거나 집필할 수 있는 어떤 초월적 작가가 된 것 같은 감각도 생겨났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이러한 상태를 자기가 드디어 무협지에서 본 것처럼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렇지 않고, 이것은 그저 메타인지를 경험한 상태일 뿐이다.


  학창시절에 열심히 공부해본 이들은 자주 이 상태를 체험한 적이 있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어떻게 하면 자기 엄마 보기에 대단한 사람이 되어 빨리 성공할까 사기칠 생각만 하던 이들에게는 이 상태가 신기할 수 있지만, 성실하게 자기 일에 집중하며 살아온 이들에게는 이것은 익숙한 상태다.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의 저자 마이클 셔머는 그 자신이 이러한 상태를 경험했을 때 거기에서 작동하던 생리학적 기전을 잘 묘사한 바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러너스 하이'도 같은 현상이다.


  그런 즉, 이 메타인지의 경험은 신묘한 마법적 소재가 아니고, 자신이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이 세상에서 특별하게 선택받은 존재가 된 증거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사기꾼들은 자신이 이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메타인지의 효과가 늘 정신없고 산만하며 잡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던 이들에게는 매우 크게 경험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메타인지는 가장 뒤로 물러서 모든 것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객관적 대상이 되는 소재에는 그 자신도 포함된다. 그러니 메타인지의 상태 속에서는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더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 것만 같다.


  가장 현재의 상황에서 철수한 뒤 인식의 기능만을 극대화한 상태이기에, 현재의 상황이 일종의 가상적 연극처럼 경험되며, 자신은 그 모든 상황으로부터 안전하게 된 것으로도 경험된다.


  그렇게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제는 가장 객관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 같기에, 이들은 자신에게 지혜로운 통찰력이 생긴 것처럼 간주할 수 있게 된다.


  삶으로부터 철수한 결과 얻게 된 인지적 이득이다.


  마음공부판에서는 이런 짓을 하고 있으면 대개 스승역할을 해주는 이로부터 박살나게 된다. 이 자리는 자기가 깨달았다고 쉬이 생각하게 되는 함정이라서다. 자기가 공부를 다 마친 사람인 마냥 가장 깨달은 척을 하게 되는 것도 이 자리다. 가장 깨달은 척하고 있기에 결코 깨달을 수 없게 되는 것도 물론 이 자리다. 가장 막힌 자리고, 가장 끝난 자리다.


  이들이 인식의 기능을 극대화한 결과 얻은 이득 또한 세상 모든 것을 다 꿰뚫어보게 된 듯한 통찰력이 결코 아니다.


  이들은 그저 자기가 언어로 만든 자기의 내적 세계를 보게 된 것뿐이다.


  그렇게 그저 자기의 세계만을 보고 있으면서, 자기의 세계를 투사한 그 눈으로 모든 세계를 아는 척하고 있는 것이 이들의 실상이다. 완벽한 자기우상화다.


  사이비무당의 모습이며, 요즘 사기꾼들은 다소간에 분명히 사이비무당의 면모를 띤다.


  존재의 사기꾼들의 불행은 이들을 이끌어줄 스승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이비가 된다. 그러나 또한 이 불행의 상황은 이들 자신이 창조한 바이기도 하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높은 권위를 갖기를 원했기에 이들에게는 스승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배격된다. 자기보다 나아보이는 이가 있으면 언어적으로 복제해서 자기도 똑같은 수준의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얄팍한 발상이 이들의 주된 행동원리다.


  존재의 사기꾼들의 '있어보이는 척'하려는 전략도 바로 이 언어적 복제로 실행된다. 여기저기 좋아보이는 언어들을 도둑질해온 뒤 자기에게 덕지덕지 붙임으로써 자기가 그런 존재처럼 보이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자기가 그런 언어들로 가득 무장해있으면 언젠가는 그것이 존재의 사실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거짓말도 계속하면 진실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인류는 이 얘기를 근대 말미에 이미 다 끝낸 바 있다.


  언어는 존재의 사실을 건드릴 수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언어적으로 주장하든 간에, 삶은 개의치않고 그냥 들이닥친다. 욕심많은 새끼돼지의 언어로 만든 성채는 삶의 콧김 앞에 와르르 무너져내린다.


  내가 언어로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 스스로가 나로 일어서는 것이다.


  인간은 바로 그렇게 우주에서 존재하게 되었다. 우주 스스로가 인간이 된 바로 그 방식으로.


  누군가가 인간이 그렇게 있다는 것을 보아주지 않아도 인간은 엄연한 사실로 존재한다.


  인간은 있어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하게 있다.


  있어 보이는 척하는 이들은 실제로는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있어보이는 척하는 이들이 자주 느끼는 감각은 생존이 두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존은 현실에서 자기의 힘을 운용할 수 있는 즐거움의 소재이지 두려움의 소재가 아니다. 이것은 이들이 비현실적인 가상의 존재처럼 되어 있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메타인지의 경험을 신격화할수록 자신의 본질을 허공에 붕 떠있는 전능한 눈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성은 짙어진다. 더욱더 비존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언어로 만든 가상현실에 자신을 위탁함으로써 '있어보이려는' 일을 더욱 많이 하게 되며, 그 결과 점점 더 비현실적인 위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생존의 두려움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증대되어 간다. 두려우니 더욱 있어보이는 언어로 자기를 무장해야 하며, 끝없는 악순환이다.


  있어보이지 말고 그냥 있어버리면 된다.


  있어 버리는 것은 있는 것 말고는 다 버리기를 선택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있는 것 위에서만 가능한 일들이다. 있는 것 외에는 다 여분이라는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있다는 사실,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존재의 사실 대신에 다른 것을 더 중요시하려고 하며, 되려 존재의 사실을 갖다 버리고 다른 것을 챙기려 할 때, 고통은 출현한다. 고통의 시작이며, 고통의 이유다.


  또한 고통은 다음의 방식으로 더 심화된다.


  자기가 더 많이 더 잘 보이는 만큼, 우리는 더 많이 더 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자기를 봐주는 만큼 자기가 더욱 존재하게 된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코카콜라를 앞에 놓고 생각해보자.


  잘 보면 코카콜라가 두 개가 되는가, 또는 콜라가 더 고급진 음료가 되는가?


  양적인 면에서건 질적인 면에서건 아무리 잘 보인다 해도 존재는 증감되지 않는다.


  이걸 뒤집어보자.


  아무리 못보여도 우리 존재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존재는 곧잘 반석으로 비유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를, 그 어떤 대상없이도 스스로 발견하게 되면 이제는 두려울 것이 없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존재를 감히 망칠 수 없다. 심지어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함부로 영향을 미칠 수조차 없다.


  이것이 존재의 존엄성이다.


  누가 존엄하게 봐줘야 존재가 존엄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원래 특성이 존엄하다.


  그러니 존재에게는 힘주어 외치는 당당함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존재는 그 당연함으로 이미 최강이다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기적의 생명체다.


  마음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이 가능했다.


  마음은 존재를 비추는 거울, 그러한 존재현상이다.


  이제 우리는 마음이라고 하면 존재의 신비를 파악할 열쇠라고 생각해야 한다.


  마음이 있는 그대로를 비추니 거기에 우리는 분명하게 있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어디 가지 않았고 그대로 있었다. 그냥 있었다.


  나는 나였다.


  나는 나에게만 의지해서 스스로 나였을 뿐이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는 붓다의 간곡한 유언은 소중한 약속처럼 성취되었던 것이다.


  자신이 그 무엇으로도 부정될 수 없이 존재한다는 존엄한 사실만이 인간의 근간이 될 때, 모든 것은 있어버리게 되며, 존재는 최대치가 된다.


  있어보이려는 가난하고 비루한 일을 하지 않아도, 삶이 충만하다.


  마음이 부유한 자는 있어보이려고 하지 않고, 그냥 있다. 애초부터 최대치로 가진 그 마음으로.


  그냥 원래 다 있는 마음의 부자, 우리는 이제 이렇게 사는 법에 멀리 해리시켜 놓았던 시선을 가까이 집중시켜야 하는 때인지 모른다. 봐야 한다면 자기만의 언어적 세계를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충만한 이 한 번뿐인 것들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험되는 그 마음을 다 가지면 된다.


  내 마음은 처음부터 내 자신의 것이었다.


  남부끄러울 것 없고 남부러울 것 없이, 나도 그런 것을 느껴도 되는 사람이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 번뿐인 이 모든 것을 여한없이 다 누리며 살아간다. 마음이 있어 그러한 삶이 가능했다.


  행복은 우리가 이러한 마음의 부자로 살 때 느껴지는 그 감각이다.


  마음의 부자는 언어적 허상을 내세워 남들로부터 더 많은 자원을 획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방향성이 반대다. 마음의 부자는 인색하지 않다. 아름다움을 창조하고자 자신이 아낌없이 마음을 쓴다.


  그리고 마음을 쓰는 바로 그 행위가, 그가 마음의 부자였음을 증명한다.


  쓰면 쓸수록 더 넘쳐나게 되는 것도 마음이다.


  정확히는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곧,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의 크기가 분명하게 알려진다.


  자꾸만 우리가 근대적 사유 속에서 '당당한 나' '주체적 나' '다 알아주는 윤리적 나' 같은 것을 말하는데, 너무 케케묵고 촌스러운 옛날이야기라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나=마음이다.


  내 존재가 거대한 것이라 마음도 부자인 것이다.


  마음을 아낌없이 쓴다는 것은 내 존재가 운동한다는 것.


  존재의 운동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기로 우리는 꽤나 약속해왔다.


  마음이 부자인 이는 사랑할 줄 아는 이며, 반드시 사랑하고 있다. 그 일을 위해서만 산다. 그러려고 태어난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는 일이 아니다. 숨쉬기가 일이 아닌 것과 같다. 그냥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것이 사랑의 운동이 펼쳐지는 자연스러운 삶의 양상이다.


  자기를 팔 시간에, 그는 사랑을 산다.


  그럴 때야 우리는 정말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죽음이 가까워오면 그렇게 산 날들만 기억난다. 바로 조금 전인 것 같이 생생하다. 행복도 다시 실시간이다. 태어나서 존재할 수 있었다는 그 행복감이 죽음 앞에서도 든든하다. 사랑이라는 운동을 하고 있는 존재에게는 죽음도 두려움이 아니다.


  생존은 이제 실존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불리게 될 것인데, 사랑으로 생존하는 방식이 바로 실존이기 때문이다.


  실존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꾼다는 식의 한심한 자기최면의 언어게임 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삶의 기쁨을 자신에게 허용하려는 그 용기일 뿐이다.


  우유죽을 울면서 먹은 붓다의 마음이다.


  그에게는 기쁨의 생기가 넘쳐흘렀고, 이내 그는 깨달았다.


  태어나서 이 모든 것이 좋았다.


  특히 좋았던 것은 이 모든 것을 다 내 마음으로 내가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불교는 마음의 부자로 사는 법을 가르친다.


  2500년 전의 가르침이지만 지금 긴요한 최신의 것이다.


  있어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하게 있는 것.


  그러면 다 있다.


  나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렇게 마음의 부자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제 그 이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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