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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따위 엿이나 먹어라 #4

"유니버스의 끝"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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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스는 모든 것의 솔루션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뭔가 잘 안풀릴 때 유니버스를 구성하면 한계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함께 뭉쳐 콜라보하고 유니버스를 만드는 일로 연명하는 일이 이제는 얼마나 구차하고 구질구질해졌는지.


관계의 힘으로 지속가능성을 부여하려는 방식이 이제는 얼마나 피곤하고 비생산적이며 오히려 서로를 괴롭히는 일이 되었는지.


이제 우리는 더는 이런 방식으로 갈 수 없다는 걸 배워야 한다. 정직하게 이미 우리는 각종의 유니버스들에 질릴대로 질려버렸다. 질렸다는 것은 그것이 한참이나 낡았다는 것이다. 유니버스의 근거가 되는 노마드, 리좀, 연대 등의 개념들은 실상 매우 낡은 것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무척이나 낡은 개념이다. 지금 들뢰즈나 푸코 등을 읽고 있다고 뭔가 최신의 철학적 성찰을 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인간 자신의 성장이 훨씬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예로 들면 많은 것이 분명해진다. 출현한지 20년도 안되어 스마트폰은 우리의 생활방식을 전방위로 바꾸어놓았다. 인류가 1만 년간 이루어온 진보보다 근 100년간의 진보가 훨씬 밀도가 높다. 스마트폰은 그 밀도를 더욱 압축시킨 하나의 상징이다.


변화는 더욱 신속하고 극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고, 어제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늘 바로 그 권위의 자리를 내주고 있다. 내일은 또 새로운 왕이 등극할 것이다.


예전에는 사상이 조금 더 앞서서 인간을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그 유효기간도 100년 단위로 길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에는 아니다. 10년만 지나도 낡은 사상이다. 인간의 현재에 잘 접목되지 않는다. 인간의 성장속도를 사상이 조금 앞에서 발맞추어 더는 서술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반작용도 일어난다. 인간의 위상을 회복하는 일에 도움이 되어야 할 사상이 오히려 인간을 정체시키는 역기능을 갖게 된 것이다. 특히나 인간 자신이 지금 스스로가 소비하는 사상을 최신의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이러한 애기가, 우리는 이제 실시간적 흐름에 따른 최신의 사유를 더욱 빠르게 채택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영미권의 논문도 찾아보고, 국제세미나도 참석하며, 신규의 연구동향들도 살펴보는 식으로 지금보다 더 좋은 모종의 정보재를 소비해야 한다는 식의 그런 의미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이제 정보재로부터 자신을 조금 멀리두어야 한다. 어제의 유행과 다르게 오늘은 새로운 유행의 옷이 출시되었다고 우리가 매일매일 그에 발맞추어 새로운 옷을 사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또 너무나 피곤한 일이다.


'인싸'라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그것은 최신의 정보재를 빨리 공유하여 연대감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지속가능성을 보존하려는 일종의 유니버스의 형식이다. 그래서 인싸라는 형식의 실천에는 반드시 큰 피로감이 동반된다. 그렇다고 그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 자기만 도태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결국 우리는 두려움 대신에 자기소진이라는 길을 택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인간은 자신의 내면과도 이러한 '인싸' 관계를 맺고자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종종 유니버스의 개념으로 묘사된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마음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고유한 역할을 다함으로써 결국 전체가 건강하게 기능하게 되는 양상으로 드러나는 그 유니버스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우리 주변의 것들을, 그리고 우리 자신의 가장 핵심적인 측면까지도 점점 더 유니버스로 만들어감으로써 이르게 되는 그 종착역은 분명하다.


유니버스의 끝은 아노미다.


왜인가? 누구도 더는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책임질 주체가 없다. 한때는 성공적으로 보였던 유니버스의 기획들이 결국에는 지리멸렬해지게 된다는 실증들을 우리는 이미 넘치도록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유니버스의 기획들은 흡사 많은 자식들을 가진 엄마의 이상적인 모습을 실현하기라도 하려는 듯한 목표 속에서 출발한다. 어느 하나의 자식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게 주인공으로 조명될 수 있도록 엄마와 같은 유니버스의 기획주체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일정 부분의 결과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남들에게 각각의 아이들을 다 훌륭하게 키워낸 좋은 엄마라는 평가도 들을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유니버스가 확장되고 아이들이 이제 10명에서 100명으로 증가한다.


그들 하나하나에게 다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주면서도, 유니버스가 존재해야만 하는 그 구체적 창조의 당위 또한 충족시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만 집착어린 엄마의 자식자랑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결과가 일어나고야 만다.


못난 자식도 어떻게든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포장하려면 말이 길어져야 하고, 작위의 서사가 지배하게 되며, 유니버스는 심히 지루해진다.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모두가 다 잘난 세상만큼 권태로운 세상은 없다. 각각의 개성을 가장 잘난 모습으로 살리겠다는 그 개성에의 집착은 결국 몰개성을 이끌 뿐이다.


누구나 다 똑같은 파인다이닝에서 식사를 하고, 똑같은 호텔에서 숙박을 하며, 똑같은 프라이빗풀에서 똑같은 각도로 셀카를 찍는다.


이것이 우리의 유니버스다.


가장 앞서 있는 최고의 정보를 공유해 가장 특별한 것을 하자며 서로를 SNS로 연결지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특별함의 소재를 소비하면 할수록 개인은 가장 특별하지 않은 것으로 화한다.


그러니 늘 허기를 느끼고 목이 마르다. 존재의 결핍을 경험한다. 자신이 정말로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도 확신할 수가 없다. 자존감은 늘 바닥이고, 그를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낸 자존심만 높아져 고집스럽기만 하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하게 존재의 위기라고 불린다.


그것이 우리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니버스의 거미줄은 실은 우리 아래에 갈라져 있던 지표의 균열이었던 것이다.


유니버스는 이미 답이 아니며, 이제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코로나 상황을 관통하면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배운 바 있는데, 그것은 뭉치면 죽는다는 것이다. 존재의 위기는 하도 뭉쳐서 그 관계의 무게가 우리 자신을 짓누르기에 발생한다. 우리가 더 많은 관계의 거미줄을 뻗침에 따라 우리에게는 관리의 책무도 따라붙는다. 늘 알아주고, 챙겨주고, 돌봐주어야 한다. 몹시 피곤한 일만이 우리의 일상에 가중되어 숨막히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개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는 일에는 이러한 무게가 없다. 마음에는 원래 무게가 없다. 마음이라고 착각하고 있던 그 무거운 것은 관계의 부산물이었을 뿐이다.


더 분명하게 말해보자.


마음은 유니버스가 아니다.


마음들이 모여 유니버스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소위 마음은 온전하다, 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마음은 그 마음 하나로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 마음 하나로 다 되었으며, 유니버스 따위를 이루어야 할 그 어떤 결핍이나 부족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협력해서 전체의 공동체를 위해 기능하는 것이 마음인가? 생리적인 비유로 바꾸어보자. 폐와 심장은 서로 협력하고 있는가?


그것은 너무나 로봇만화의 주인공파일럿 같은 생각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머리의 컨트롤타워에 탑승해있는 어떤 주인공처럼 여기고 있을 때 우리는 이러한 감상에 빠져들 수도 있다.


'아, 눈과 심장과 십이지장과 발가락이, 이 모든 것이 다 나를 지키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있구나.'


이것은 마치 아이언맨 영화에서 각종의 아이언맨 수트들이 토니 스타크를 지키기 위해 날아오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또는 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같은 아파트 단지의 조폭 부모들이 사시미칼을 들고 달려오는 장면 또한 연상시킨다.


우리의 유아적인 어떤 부분이 이러한 장면 앞에 짠해지며 감동받는다 할지라도, 이것이 사실은 아니다.


우리의 신체는 어떤 것에도 봉사하고 있지 않다. 신성한 뇌속 주인공을 위해 헌신하는 어떤 군집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있을 뿐이다.


살아있다는 사실은 다만 살아있다는 것일 뿐, 어떠한 주인공이 상정된 서사가 아니다.


삶에는 원래 주인공이 없다. 그러니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주어야 할 대상도 없다.


삶은 자체발광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미 빠르게 그 유효기간이 끝나버린 과거의 예지들 대신에 우리가 실시간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불에 대한 단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불과, 새로운 문명, 새로운 생활양식이 필요하다.


프로메테우스는 유니버스가 아니었고 유니버스의 일원도 아니었다. 그는 혼자서 그 일을 했다. 그가 혹여 신들의 유니버스에 속한 존재였다 할지라도, 불을 인간에게 가져오는 행위를 통해 그는 스스로 유니버스를 깼다.


무엇이 그 일을 가능하게 했는가?


마음이.


설레며 환하게 일렁이던 그 마음이 거기에 있었기에.


우리의 삶을 스스로 빛나게 하는 것은 그렇게 삶의 중추에서 타오르던 마음이라는 불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제 가져야 할 새로운 불.


마음이 인간에게 무척이나 좋은 것임을 알고,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갖고자 나아가는 인간은 이 시대의 프로메테우스다. 새로운 문명을 위한 혁명가다.


프로메테우스는 올림푸스 산 위에서 각자의 고유한 개성과 역할로 서로 뭉쳐 또아리를 틀고 있던 한없이 권태로운 신들의 세계를 끝장낸 이. 인간에게 마음을 전한 존재. 유니버스의 끝에서 우리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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