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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따위 엿이나 먹어라 #7

"생각없는 삶"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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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한 2000년쯤 후의 사람들은 이 말을 2000년 전의 어느 현자가 말한 지혜로운 금언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소크라테스의 말을 기억하는 그 방식으로.


세상에서 인간을 집요하게 괴롭혀온 아주 못돼쳐먹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마음(mind)'이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든 다루어내려고 여러 방법론들을 고안해서 힘쓰게 되는 그 이유도 마음이라는 것이 우리를 괴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괴롭다면 굳이 피곤하게 곁에 두고 다룰 필요가 있을까?


그런 마음이라는 것 없이 살면 더 편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그 일에 성공한 이들도 있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붓다와 예수 같은 이들.


그들은 아무 생각이 없이 살았으며,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마음(mind)이라는 어떤 이해로 굳어진 그것, 그 정체는 생각이다. 특히 통속적인 용법으로 이 표현이 일상에서 쓰일 때는 거의 반드시 생각을 지칭한다.


그러니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우리의 생각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마음 같은 것에 대해서는 실은 모른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것인데, 그게 우리를 괴롭힌다고 말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반대로 확실한 것은 우리는 분명 우리의 생각 때문에 고통받는다는 사실이다.


멀쩡히 잘 쉬고 있던 주말에도 한 생각이 몰려오면 주변은 점점 어둠으로 덮여가고, 지표면은 요동치며, 하늘은 조각조각 깨어져내릴 것 같은 불안의 소재로 화한다. 미래는 더욱 불확실하며, 자신이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무한한 회의감이 든다. 대단히 중요한 어떤 것을 남들은 다 아는데 자신만 모르고 있는 것 같은 초조감에 휩싸여 더 자학의 구멍을 판다. 차라리 내일 눈을 뜨지 않을 수 있다면, 아니면 운석이 날아와 모든 것을 평등하게 끝장내줄 수 있다면.


아무 일도 없던 주말 오후에 생각이 만든 지구종말의 일이다.


이런 것이 뭐 그리 좋다고, 생각에 마음(mind)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에 대해 분석하고, 성찰하고, 알아차리고, 글쓰기도 하고, 상담도 받는 등의 무수한 일들을 해나가며 우리는 불편한 동거를 지속하려 하는 것일까.


그냥 다 갖다버리면 안되는가?


물론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버릴 수 있다면 버리고 싶은데 그게 안된다고, 버려도 버려도 자꾸만 사탄의 인형 처키처럼 따라붙는다고.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렇게도 물을 수 있다.


어디로 가든 우디와 버즈가 있는 토이스토리 세상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냐고.


따라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놓지 않은 것이다. 봉제인형을. 그 봉제인형으로 꿈꾸던 어떤 동일한 세상을.


우리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생각의 속성을 한번 살펴보자. 그것은 전부 다 하나의 생각, 바로 통제에 대한 생각이다.


우리에게서 생각이 가장 많이 일어날 때를 또한 떠올려보자. 통제되지 않는 것이 있고, 그것을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할 때다.


통제의 강도와 생각의 정도는 정비례한다.


심지어 이는 끊임없이 되먹임된다. 어떤 것을 통제하려고 하니 생각들이 많이 일어나 힘들어지고, 그래서 이제는 그런 생각들을 통제하고자 또 생각을 일으킨다. 생각들을 하나하나 아이처럼 잘 알아주면 이제 그 생각들이 잠잠해지리라 믿는 그런 생각 위의 생각을.


그러면서도 이와 같은 생각 위의 생각에는 마치 생각이 아닌 것처럼 다른 이름을 붙인다. 마음(mind)을 알아주는 큰 마음(big mind)이니, 깨달음의 시선이니, 현존이니 하는 식으로, 이제는 자신이 이러한 생각 위의 생각의 기제를 통해 생각이라는 것으로부터 해방된 척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통제의 의도만 언어 뒤에 숨어 더 교묘하고 은밀한 형태로 강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이 통제의 의도를 지속하려 하는 한 우리가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날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이 말을 떠올려보자.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이 없는 이들은 통제하려 하지 않는 이들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통제하지 않는 통제를 통해 세상 모든 것이 착한 학생들처럼 자발적으로 알아서 자기통제를 이루는 현실을 바라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원래 인간은 아무 생각이[통제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저 자유로울 뿐이다.


"나는 자유롭다. 왜냐하면 자유롭기 때문이다."


자유는 그 자체로 뿌리이자 열매이며, 알파와 오메가고, 시작과 끝이다.


그러니 조건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며, 무조건이다.


자신이 근본적으로 무조건 자유롭다는 이 사실에만 관심을 둘 때 우리에게는 그래서 여분이 사라진다.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반대로 통제의 의도는 자신이 얼마나 자유롭지 않은가에만 관심을 둘 때 생겨난다. 자신이 충분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경험하는 이는 자유라는 것을 인위적으로 더 얻어내기 위해 자기 주변에 무수한 생각의 울타리를 치게 된다. 그리고는 그 울타리를 하나하나 시련의 과제처럼 뛰어넘은 뒤 자신이 이제는 자유로워졌노라며 그리스의 영웅처럼 외치곤 한다.


즉, 통제는 바로 이런 식으로 발명되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자유를 그냥 가지기보다는, 스스로 조건을 만들고 그 조건과 투쟁한 결과로 얻어내는 보상물처럼 자유를 쟁취하려는, 자유에 대한 어떤 변태적 도착의 소재로서.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힘이 들기 마련이다.


삶은 가만 놓아두면 자유를 향해 흐른다. 그 과정이 자연스럽다. 자유는 인간의 생리다.


그러면 역산도 가능하다. 우리가 지금 생각이 많고 힘들다면 우리는 통제의 의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중이며, 자유의 반대편을 향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자유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오인하는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버티고 있는 와중에는 흥미롭게도 자꾸만 우리가 손을 놓게 만드는 물살의 흐름이 때로는 격하게 또 때로는 우리의 손을 간질이는 엉뚱한 자극으로 밀려들곤 한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 우리가 원래 우리의 자리였던 자유에 합류하게끔 돕는 어떠한 운동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그 운동에 한번 마음이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보고자 한다.


이 마음이라는 운동에 우리의 몸을 맡겨 살게 된다면 그것은 아주 멋진 삶.


무수한 생각 속에서 자유없이 표류하던 시간이 끝나고, 이제는 분명하게 자유로 안내되고 있는 생각없는 삶을 우리는 살게 될 것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아주 멋진 자유를 살았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한 2000년쯤 후에도 널리 전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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