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음 따위 엿이나 먹어라 #6

"수치심으로 닫힌 문의 열쇠"

by 깨닫는마음씨


old-vintage-key-on-wood-texture-background-with-space-free-photo_%281%29.jpg?type=w1600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감정이라고 하면 우리는 대부분 수치심을 꼽을 것이다.


이것은 정말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서랍 가장 깊은 곳에서 이제는 얌전해진 듯 보어더라도 어느 날 빼꼼히 머리를 내밀고는 악다구니를 치며 우리를 지옥으로 다시 끌고 들어간다.


반면 어떤 마음의 선구자들은 수치심을 대단히 중요한 소재로 다루기도 한다. 우리가 차마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수치심은 영적 현상이라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우리는 수치심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우리가 먹고 싶지 않다면 우리에게는 그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스승들은 수치심을 통해 단단히 배워야 한다고 호통을 치기도 한다. 사람이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금수처럼 살지 않고 도덕적이며 이성적인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서 수치심으로부터 필히 배워야 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고통을 받아가면서까지 우리가 꼭 배워야 할 것이 있을까? 또 그렇게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런 것이 정말 우리의 행복에 필요하기라도 한 것일까?


우리가 자학의 채찍질로 배우는 것이라고는 채찍을 쓰는 방법뿐이다.


많이 맞아 보았으니 어디를 때려야 아플지를 잘 알게 되며, 그 정확한 방법론으로 채찍의 끝은 이제 타인을 향하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수치심은 분명 이러한 작용을 일으킨다.


수치심을 느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도 참혹하게 고문한다. 우주에서 우리 자신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악의를 집행하기라도 하듯이 스스로를 맹렬히 비난하고 자책하며 저주한다.


그래서 수치심은 가장 어려운 감정이다. 반드시 자학이 일어나며, 그 자학을 어떻게 멈추어야 할지도 모를 만큼 끝없는 자기파괴를 이루어간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는 이 고행의 길로 꼭 들어서야만 하는 것일까? 가지 않아도 된다면 그 길이 제일 좋은 길인 것은 아닐까?


그러한 길을 모색해보기 위해 수치심의 작용을 살펴보자.


어떠한 사건의 자극이 발생했다. 그리고 우리가 수치심의 반응을 일으킨다. 이 자극과 반응의 과정 사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다음과 같은 물음은 더욱 효과적이다.


지금 어떠한 성질의 인물이 수치심을 경험하고 있는가? 그는 왜 수치스러운가?


수치심을 경험하는 이는 반드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그랬으면 안되었는데 대체 왜 그랬을까. 분명 조금만 더 주의를 살폈으면 그런 결과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그는 지금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 것을 심히 자책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는 일이 당연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결국 수치심이란 그 자신이 진리처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스스로의 완벽성이 깨진 것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그가 하는 자책과 비난은 자기 자신이 신처럼 전지전능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몫이다.


그렇다면 수치심을 경험하고 있는 이 주체의 특성은 분명하다. 그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유려하게 해결가능한 지성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다. 자신이 그러한 수준의 지성을 갖고 있기를 꿈꾸며, 일정 부분은 이미 그러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자신은 유능한 지적 해결사로 기능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라고 전제해왔는데, 그러지 못해서 수치심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수치심은 분명 어떠한 종류의 자기과잉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를테면, 패션의 영역에서 자기과잉을 이루고 있는 이가 만약 어느 날 전체의 의상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짝짝이 양말을 신고 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는 엄청난 수치심에 휩싸일 것이다. 심지어 누가 그 상태를 다소간의 웃음을 띤 얼굴로 지적하기까지 했다면 그는 거의 공황에 빠지거나 커다란 증오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그런 즉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통상적인 수치심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있어 순수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뭔가 인위적으로 파생된 것이다.


여기에는 문화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현대의 정보화사회에서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지적인 자기통제가 가능한 인물상이다. 유려한 지성의 힘으로 정보들을 능숙하게 관리하고 다루어냄으로써 효율적으로 문제들을 풀어가는 개인의 모습이다. 이처럼 지성에 집중된 바람직한 인물상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면 도태되고 추방될 것 같은 두려움과 함께 부정적 자기평가가 생겨난다. 자신이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열등한 존재처럼 인식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식이 바로 수치스러움의 전모를 구성한다.


이런 경우 우리는 사건 및 상황들에 능숙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한심하고 무능력한 찐따처럼 자신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소위 똑똑한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통제력을 잃지 않고 현재의 문제상황들을 능숙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잘못된 저주에 의해 생겨난 일이다. 바로 지성절대주의의 저주다.


이러한 저주에 씌인 이는 근본적으로 자신을 '다 알고 있어야만 하는 자'로 상정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두 착각이 이 저주의 축을 이룬다. 하나는 자신이 정말로 다 알 수 있는 존재라는 '한계에 대한 착각'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그렇게 다 알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능력에 대한 착각'이다.


착각에 의해 저주는 구성되고, 저주는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며, 그 굴절된 인식에 의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잘못된 상을 얻게 된다. 정신적으로 일그러진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수치심은 바로 이러한 착각의 문제일 수 있다.


자신이 다 알고 있으며, 또 다 알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착각하는 이만 돌연히 출현하는 삶의 사건들 앞에서 수치심을 경험한다. 당연히 알고 있어야만 하는 자신이 한순간의 바보같은 실수 때문에 (실은 어리석은 남들의 악영향 때문에) 그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며 스스로를 비난하고 책망하기 시작한다.


곧 죽어도,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인지 몰랐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몰랐다고 말하지 못하니까 수치심만 커지며, 수치심을 상쇄하기 위해 실은 아는 척하는 거짓말의 산도 계속 쌓아가보지만, 한 번 자라난 수치심은 영영 지워지지 않는다.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었다고 말할 때까지.


'다 알고 있어야만 하는 자'로서의 왜곡된 정체성이 포기될 때까지.


앎을 통한 통제력의 패배가 자백될 때까지.


수치심, 그것은 앎의 질환이다.


앎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신앙하며, 자신도 그러한 앎의 권위를 얻으려 하는 앎의 종교에 빠진 이들이 치명적으로 이 수치심의 문제를 경험하게 된다.


앎을 광신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수치심의 문제가 상대적으로 약하다. 동일한 상황을 수치스러움으로 경험하기보다는 그들은 더 정직하고 순수한 형태로 경험한다.


당황스럽다.


이렇게 정말로 있는 그대로의 것을 경험한다.


우리는 다 알고 있는 자로서 적절히 대처하지 못해 수치스러웠던 것이 아니라, 모르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서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 두 현실은 완전히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


수치심은 자신이 똑바로 하지 못했다는 자책의 감옥만을 향한다. 답이 꽉 막힌 현실의 지속이다. 그러나 당황스러움은 우리에게 탐구의 감수성을 촉진한다. 지금까지 몰랐던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우리가 이제 배울 수 있게 됨으로써 답이 열려가는 현실을 창출해낸다.


단순한 예를 들어보자.


우리와 대화를 하던 상대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우리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있다.


수치심은 이 지점에서 자신이 어떤 말실수를 했는지를 정신없는 계산기처럼 검토한다. 그 사람이 예민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파악해서 표현을 더 조심스럽게 골랐어야 했는데, 관계의 전문가인 자신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상대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통제하는 일에 실패하다니, 치욕적이다. 잠깐 방심한 자신에게 이가 갈린다. 지성의 힘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다 통치해야 하는데 이 한 번의 실수로 통제력을 잃고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다니 원통하고 원통하다. 가문의 수치다.


그러나 정확하게 당황스러움을 경험한 이는 단지 이렇게 말할 뿐이다.


"야, 갑자기 엄청 당황스럽다. 대체 지금 뭘 경험했는지, 내가 누구로 보였고 또 내 말이 어떤 말로 들렸기에 화를 내는지 애기해줘봐."


이처럼 수치심은 더욱더 닫혀가는 자기폐색의 현실을 향하고, 당황스러움은 다시 새롭게 열릴 수 있는 대화의 현실을 향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것이 마음이다. 우리를 고통받게 만드는 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배워야 하는 것이 마음이 아니라, 이처럼 오히려 고통의 반대편으로 운동함으로써 고통을 끝내고 우리가 상쾌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내는 것이 마음이다.


이런 맥락에서 어떤 마음의 선구자들은 수치심을 영적 현상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수치스러워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수치심이라는 작용을 둘러싼 착각의 기제들을 관통하면 거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정직한 사실로부터 삶의 중요한 핵심에 접촉할 수 있다는 그 의미를 말한 것이다.


우리가 삶에 접촉해있지 않을 때 일어나는 대표적인 현상은 우리가 연극처럼 살게 된다는 것이다. 머리로 다양한 변수에 대처할 시나리오를 쓴 뒤 우리 자신이 그에 맞춘 인물이 되어 연기를 하며 대사를 발화한다. 그러면서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이제 좀 알겠다며 자기가 대단히 능숙한 삶의 전문가가 되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그렇게 자기도취가 생겨나며 자기과잉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 본질은 AI가 자신을 누구보다 인간답다고 착각하는 그런 상황과 같다.


이 연극적 태도 또한 수치심에서 발로한 것이다. 자신이 지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부정하며 통제력을 잃지 않은 것처럼 행세하려면, 결국 우리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노련한 인물인 척하는 과장된 연기를 해야 한다. 당황하고 있는 그 표정을 필사적으로 숨기기 위해 연기에 몰입하는 정도는 심화되며, 결국 우리는 실제의 삶을 더욱 잃어가게 되는 것이다.


더 수려하게 연극을 펼치는 모습을 더 멋지게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때, 스토리텔링의 중요성도 강조된다.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가상의 시나리오들을 집필하는 역량에 따라 삶도 제대로 살 수 있다고 오해되는 까닭이다. 그러한 자기의 완벽한 스토리텔링이 방해받거나 해체되는 상황이 일어났을 때, 자기의 삶도 끝나게 되는 것처럼 경험되며, 그 결과 자기는 자기를 성공적으로 책임지지 못한 형편없는 무능력자로 간주된다. 이렇게 또 수치심이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적 현실이 이 수치심을 자극받기에 좋은 조건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좋다. 본디 문명의 출발과 함께 수치심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문명보다 앞서있는 우리의 삶이 수치심에서 기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해진다.


우리의 삶은 죄스럽게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당황스러운 것, 신선한 충격, 바로 그것일 따름이다.


우리가 아주 크게 모르는 것, 그래서 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 그러나 그 당황스러움이 오히려 우리를 더 크게 열리게 하는 기회가 되는 바로 그런 것.


우리는 바로 그런 것을 신비라고 부른다.


우리의 삶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신비일 뿐이었다.


우리는 수치심이라는 작용을 이해함으로써 그 신비의 문으로 통하는 열쇠를 얻게 된 것이다.


우리 자신을 더욱 큰 존재로 만나게 되는 그 문의.


바로 마음이라고 하는 문의.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마음 따위 엿이나 먹어라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