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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따위 엿이나 먹어라 #5

"백종원놀이"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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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만 보면 아주 가관이다.


실제의 백종원 님과 무슨 상관이 있겠냐만, 너나할 것 없이 틈만 나면 백종원 흉내를 내고 싶어한다.


심지어는 자기의 분야와는 아무 상관없는 영역에까지도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온갖 선생질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다 무슨 특급의 코치이고, 단골손님으로 TED에 나오는 세계적 석좌이며, 인류의 위기를 구해내는 만능해결사다. 심지어는 이쪽에서는 전혀 요청한 적도 없는데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거의 정신병의 증세를 의심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를 백종원놀이라고 임의로 명명해보자.


유능하고 멋있어보이는 사람을 따라하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 유아적인 정신의 특징이지만, 그러나 이 놀이는 그렇게 마냥 순진하기보다는 더 괘씸한 의도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일그러진 열등감, 피해의식, 그로 인해 생겨난 병적 우월감의 의식상태가 총체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 백종원놀이의 보상으로 획득되리라 기대되는 것은 권력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하찮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며, 자신이 보잘 것 없다고 경험한 이가 단번에 위상의 역전을 꾀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힘에 대한 추구를 가리킨다.


가스라이팅은 당연히 이 백종원놀이와 관계된 현상이다. 누군가의 인생에 절대적이고 유일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신적 입장이 된다는 것은 백종원놀이가 작동하는 모든 이유다.


백종원놀이는 처음에는 모종의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일견 친절한 태도의 접근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점차 그 영향력을 증대시켜 타인의 인생을 잠식하려는 경향성을 갖는다. 기술적 문제를 인생의 문제로 슬쩍 뒤바꾼 뒤, 타인의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타인의 인생에 대해 절대적 권위를 갖는 스승의 입장을 구성하려는 것이 이 백종원놀이의 본질이다.


이를테면, 집에 전등을 교체하기 위해 부른 전기기사가 어느 틈에 지금 남편과 이혼해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조언질을 하고 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인생이 망하게 될 것이라며 불안감을 부추기는 교묘한 협박과 공갈의 기제를 통해 스스로의 말에 강한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상대를 자신의 생각대로 조종하려고 한다.


이러한 백종원놀이의 구조에서 자식을 자기 생각대로 조종하려는 엄마의 편집증적인 지배욕의 모습을 읽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모성적 독재의 기원은 인류사에서 매우 오래된 것이며 여러 신화들에서도 그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반드시 여신이나 여성적 소재가 아니라 하더라도 일종의 신적 조력자의 역할로 묘사되는 인물상은 그 자체로 이와 같은 속성을 내포하거나 또는 백종원놀이를 위한 문법적 장치로 활용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우리는 매우 좋은 모델을 아서왕 전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청년 아서가 왕이 될 수 있도록 그 뒤에서 전방위로 활약한 대마법사 멀린이 바로 그 표본이다. 현대에 와서는 간달프나 요다 등의 원형이 된 이 멀린의 핵심적인 속성은 킹메이커다. 유능한 조언자이자 든든한 수호자가 되어 다른 누군가의 성공을 조력하는 역할이다.


멀린 또한 마찬가지로 무슨 잘못이 있겠냐만, 과거로부터 멀린의 흉내를 내며 소위 멀린놀이를 했던 이들도 많을 것이다. 상대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은 자신의 권력을 획득하려는 데만 그 모든 목적이 있던 매우 음흉하고 치사한 놀이들.


이것이 놀이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백종원놀이 또는 멀린놀이를 하는 이들에게는 현실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어서다. 그가 실제로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흉내내기의 놀이가 아니라 백종원 자신이며 멀린 자신이다. 그러나 실제 살림의 능력이 없는 아이들이 실제를 흉내내는 소꿉놀이를 한다.


그러니까 이러한 놀이 속에서는, 해당 분야의 능력도 없는 이가 자기 말만 들으면 성공할 수 있다며 타인에게 매우 위태로운 길을 종용하게 되는 일이 결국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이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피조력자가 정말로 왕이 되는 일이 아니라, 그렇게 킹메이커로서 누군가가 왕이 될 수 있게끔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하는 자기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대단하고 뛰어난 주체로 올려세우는 일인 까닭이다.


오늘날 백종원놀이가 가장 창궐하고 있는 분야는 단연 심리치료 분야다.


자기가 내담자를 위해 가장 헌신하는 한없이 겸손하면서도 진정성있는 조력자인 것 같은 형상을 취하고는 있지만, 또 자신도 자기최면을 통해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지만, 실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기가 획득한 마음을 보는 힘 따위로 내담자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스승으로 대접받고 싶어하는지는 놀라울 정도다.


심지어는 처음부터 스승이 되기 위해 심리학에 관심을 갖고 심리상담을 배우려 하는 수요도 대단히 크다. 자신이 세상에 내세울 수 있는 별다른 장점이 없다고 간주하는 이들에게 특히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 마음이라고 하는, 왠지 남들은 아직 잘 모를 것 같은 뭔가 신비하고 비밀스러워보이는 것만 잘 알게 되면 빠르게 인생스승의 지위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마음'은 아주 촌스럽고 저질스러운 숏컷 같은 것으로 화한다. 사기꾼마법사의 공중부양 같은 소재와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마음의 몰락이다.


능력은 없는데 빠르게 능력있는 스승처럼 보이려고 온당한 것을 망치는 이 기만의 행위가 곧 백종원놀이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스승질이라고 하는 지점을 살펴보자.


인간이 병적으로 스승질에 미쳐있을 때는 자기의 인생이 막혀 있을 때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도가 있다. 하나는 자기만 막혀 고립되고 싶지 않기에 스승질을 통해 자기가 막힌 그 방식을 안내함으로써 모두가 자기와 같은 자리에 머물게 하려는 의도다. 두 번째는 막힌 자기 인생의 정당화다. 다른 이에게 자기가 가서 막힌 그 길의 가치를 계속 주장함으로써 더 많은 이가 그러한 길을 가게 되면 결국 자기가 틀리지 않았다고 자기합리화를 꾀할 수 있는 까닭이다.


숨이 막히도록 지배적인 성질로 우리를 힘들게 했던 엄마는 그때 왜 그랬는가?


자신의 인생이 당시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식을 대신 닦달한다. 자식 밖에는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소재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서다.


자신이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남을 대신 화장실에 보내 방뇨를 이루도록 하려는 이 일은 관련된 당사자들 모두에게 힘겹다. 그러니 마법이 요청된다. 마법적인 힘만 있으면 나오지 않는 소변도 억지로 누게 만들 수 있을 것 같고, 무엇보다 상대가 방뇨를 하더라도 내 자신 역시 시원해질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마음이라는 것이 대충 이딴 마법의 소재가 되어 있다.


마음만 알면 상대를 내 생각대로 바꿀 수 있는 모종의 권력집행의 수단으로 전락해있다. 그런데도 이 권력욕의 자기포장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너를 위해. 다 너 잘 되라고."


자신의 고귀한 희생으로 남의 행복을 이루어주기 위해 살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삶이 지루하고, 막연하고, 괜히 자꾸 짜증이 나며, 이유없이 공허하고 불안한 증세 등으로 막혀있을 때 인간이 보이는 대표적인 반응이다.


그러니 놀이를 하는 것이겠지만, 이 놀이의 방식은 폭력적이다. 꼭 누군가를 못나고 약한 것으로 만들어야만 자기를 띄워올리며 할 수 있는 놀이다.


예전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노예를 사자 앞에 세운 뒤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는 그 모습을 관람하면서, 어떻게 사자와 싸워야하는지 코치해주고 무기를 던져주며 깔깔 웃던 그 습성에서 비롯한 놀이일 것이다.


다 가학의 감각이다.


구원자와 피구원자의 관계는 이처럼 실은 가피학 관계다. SM의 감수성이 종교적 감수성과도 유사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상대적인 이들끼리 거짓의 절대성을 꾸며내어 가피학의 지배관계를 즐기는 일종의 우상숭배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거듭 말하듯이 이 놀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 위선의 언어들로 포장되어, 놀이를 하고 싶지 않은 이에게도 강요되고 있는 까닭이다. 상기한 놀이를 거부하는 이에게 돌아오는 것은 대개 저주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 어디 제대로 실패하는 꼴을 지켜보고야 말겠다는 그 음험하게 비틀린 시선이다.


차라리 저주놀이라면 나홀로 숨바꼭질이 나을 것이다. 상기한 놀이는 더 악질의 저주놀이다.


그리고 이러한 저주를 발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시 한 번 지금 그의 인생이 얼마나 막혀있는지를 방증한다.


인간은 자신이 고통스러울 때 세상을 저주한다. 자신만 고통스러운 것 같을 때는 불특정다수를 향해 수류탄을 깐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분명한 사실은 하나뿐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물음도 하나뿐이다.


왜 고통스러워졌는가?


삶을 배워야 할 때 환상과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이 막혔다는 것은 지금 어떤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으로부터 정당하게 배우는 대신에 가피학적 놀이를 통한 숏컷을 꾀했다. 그게 고통의 이유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삶을 무시하고 자꾸만 가상현실에 위탁해서 자기를 보상하려 한 것이 고통의 이유였다고.


스승질을 하고 있던 주체는 자신에게 그러한 환상 속 마법의 스승이 필요하다고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이 세상에 없기에 이제는 자기가 그런 스승주체처럼 서려고 했을 가능성은 높다.


그러니 그가 부족하고 약하게 보던 그 모든 대상은 결국 자기가 인식하는 자신의 모습일 뿐 다른 어느 것도 아니다. 정말로 자신이 화장실에 가야 하는 문제를 남에게 대신 가도록 종용하고 있던 그 문제인 것이다.


자신을 위해 배우는 이는 백종원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무런 관심이 가지 않는다.


자신을 위해 배우는 이, 그가 이미 스스로를 위한 스승인 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놀이가 아니다.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가르치는 이것이 바로 삶의 실제다.


무엇을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가르치는가?


우리는 여기에서 마음이라는 표현을 가장 정당한 방식으로 다시 찾을 것이다.


지옥으로 동행하던 폭력의 놀이가 멈추고, 인간에게 가장 재미있는 삶은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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