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딩"
그라운딩(grounding)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현실에 접촉하는 일을 의미한다. 땅에 잘 붙어 건강하게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일에 대한 것이다.
지금은 그라운딩이 필요한 시대라고들 말한다. 가상현실이 만들어낸 드높은 환상의 구름들만 쫓다가, 이미지의 버블을 타고 자기도 그 하늘 위로 상승하려는 꿈만 꾸다가, 결국 현실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이들이 오늘날에는 처참하게 많은 까닭이다.
자기가 뻥튀기처럼 부풀려놓은 자아상, 또는 어떤 성취의 기대들이 거품처럼 터지게 되었을 때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 꿈이었구나."하는 구운몽의 자각이 아니다. 우울이거나 증오다. 자기를 죽이거나 남들을 죽이거나 혹은 둘 다다. 그 실재하는 것들이 자신이 꿈꾼 가상현실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가상현실에 더 진짜의 권위를 부여하고 오히려 실제의 현실을 적대하려는 이 상태를 가리켜 심리치료의 용어로는 그라운딩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개는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를 자기라고 착각하며 그에 도취되어 있을 때, 또 자기가 만든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 근거한 이상적인 정체성에 빠져 살 때 그라운딩의 필요성은 요청된다.
이것은 신체심리학의 관점에서 기원한 개념이기에, 우선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과 재연결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언어의 중요성을 광신함으로써 자신이 하는 언어적 생각이 실제의 삶이라고 착각할 때, 우리는 곧잘 자신의 몸으로부터 분리되곤 한다. 그라운딩은 이렇게 분절된 우리와 우리의 몸 사이에 다시 다리를 놓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은 가브리엘 마르셀 같은 철학자를 통해 잘 묘사된다.
그가 그라운딩이라는 개념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몸을 가진 것이 아니다. 내가 바로 몸이다."라는 그의 진술은 몸과 재연결되고 몸을 회복한다는 그라운딩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몸에서 경험되는 무슨 감각들을 하나하나 느끼고 알아주는 그런 행위적 방식이 아니다. 즉, 대상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지만 실은 몸을 미묘하게 대상화시켜 마음의 내과의사처럼 다루려는 일이 아니다.
그라운딩은 오히려 더 단순하고 본질적인 방향성을 갖는다. 무엇이 일어나든 그냥 무조건 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라고 생각하던 그런 자아상이나, 자기가 꿈꾸던 이상적인 정체성으로서의 자기개념을 그냥 다 떠나 실제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생각들이 다 날아가며, 그 잡생각들이 만들어낸 헛감정들도 같이 날아간다.
지금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그러한 나라고 하는 존재의 상태만이 명료해진다.
반대로 우리가 몸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는, 우리는 몸을 잃은 것처럼 잡생각과 헛감정 사이를 둥둥 떠다닌다. 그러면 잡생각은 점점 강화되어 망상이 되고, 헛감정은 점점 강화되어 그 끝에선 반드시 화가 된다. 그러한 화가 무겁고 괴롭기에 어떻게든 화를 처리할 기회만 엿보게 되며, 그게 결국 우울이거나 증오다. 자기 안에 늪을 만들거나, 다른 이에게 투기하는 방식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지금 이러한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는 "맞아맞아. 내 애기 같아 공감된다."라고 경험할 수도, 다른 누군가는 "글의 내용이 하나도 안 들어오고 화만 난다."라고 경험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그라운딩은 모니터 밖에 있는 자신에게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안쪽으로 눈을 연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앉아 있든, 누워 있든, 지하철 손잡이에 매달려 있든, 어떠한 자신에게라도 그 순간 그러한 자신에게로 관심을 향하면 더는 모니터 안의 현실은 중요해지지 않는다.
그냥 자기 자신이 의식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상현실의 스크린을 보며 일으켰던 그 모든 잡생각과 헛감정이 마치 꿈만 같을 것이다.
그것들은 나에게 어떤 문제를 가져다준 것처럼 착각되었지만, 실은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만약 우리가 통속적으로 잡생각과 헛감정을 '마음'이라는 이름으로 칭하고 있었다면, 그런 것은 사실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도 문제라곤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상태다.
"나는 문제가 없다." 이것이 우리의 1차현실이며, 우리의 삶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문제가 있었다면 잡생각과 헛감정이라는 콘텐츠의 문제이지 나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의 내용 속에서 일어나던 그 모든 문제는 영화관에 앉아 영화를 보던 관객의 문제가 아닌 것과 같다.
그 사실은 어떻게 증명되는가?
스크린을 무시하고 영화관에서 나와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잡생각과 헛감정은 실은 바로 멈출 수 있다. 그것들이 우리를 침략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상현실의 콘텐츠에 중독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소의 중독상태라 하더라도 이 또한 문제없다.
우리의 몸은 중독재보다 한참을 강하다.
우리가 몸으로 존재하는 이 존재방식이 온실 속 화초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연약한 자신이 있고, 그러한 자신을 짓밟고 망가뜨릴 무수한 외부의 대괴수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바로 콘텐츠의 주된 내용이다.
사실은 매우 다르다.
우리의 몸은 어쩌면 식물을 가장 닮아 있을 수 있다. 우리를 식물로 비유하는 그 표현은 정당할 것이다.
그러나 식물은 대체 어떠한 존재방식인가?
포스트아포칼립스물에서 문명이 무너진 그 잔해를 휘감으며 강인한 생명력을 뽐내고 있는 것은 바로 식물군이다.
식물에 대해 우리가 갖는 통속적인 인상과는 달리, 실제의 식물은 매우 적극적이며 또 탐욕스럽다. 이 표현은, 식물은 자신의 목마름을 자기의 것으로 알고 그 목마름에 대해 정직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태양빛을 받으려고 몸을 사방으로 뒤틀어댄 모습을 구성하고, 또 더 많은 물과 양분을 얻고자 뿌리를 사방으로 뻗쳐댄다.
식물은 평화주의자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실제의 삶에 대해서라면 식물은 전사다. 가장 용감하고 강하기로는 으뜸가는 전사다.
식물이 한 자리에 뿌리를 내려 고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식물에게 나약한 피동성의 속성을 부여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 반대로 식물은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뿌리내리고 살아도 아무 문제없어."
그 자리가 바위 틈이든, 모래밭이든, 빌딩의 콘크리트벽이든, 식물은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용맹하게 모험한다.
그라운딩이 현실에 뿌리내리는 일을 상징한다면, 이것은 이렇게 식물처럼 사는 존재방식에 대한 회복이 될 것이다.
인간의 몸이 이미 그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가 하나하나 신경쓰지 않더라도, 이 몸은 이미 사방으로 촉수를 뻗어 자신의 목마름에 응답하며 현실적인 필요들을 채워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몸으로 돌아올 때면, 우리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경험되는 것이다. 몸이 스스로 알아서 너무나 잘하고 있었기에. 그러한 몸이 바로 나이기에.
우리에게 잡생각과 헛감정으로 구성된 가상의 콘텐츠인 '마음'이 굳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제 스스로 너무 잘해가고 있는 이 몸의 작용에 마음이라는 명예의 이름을 전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라운딩은 우리가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에 안착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역설은 우리가 뿌리를 내리면 내릴수록 오히려 우리는 더 자유롭게 이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땅 자체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이며, 그렇게 우리의 기초현실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움직여야 한다는 착각은 해지되고, 수고는 덜어진다. 우리가 어쩌면 가만히 아무 문제가 없을 때, 이제 양상이 뒤바뀐다.
문제가 있냐 없냐의 차원을 벗어나, 우리에게 문제가 없다는 사실은 더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이제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다가오는 우리의 자유를 어떻게 성대히 누릴 것인가에 삶의 초점을 맞추게 된다.
우리는 거기까지 그라운딩으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제안되어야 하지 않을까.
진짜 자유로운 것은 실제의 현실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실제의 자신이 자유로운 것이다.
언제라도, 어느 순간에라도, 가장 현실적으로.
몸은, 이 본래적인 마음의 작용은 분명하고 실증적인 그 가능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