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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마법사전 #0

"실존적 대화를 위한 핸드북"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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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꿈꾼다면 제대로 꿈꾸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누구나에게 재현가능한 신뢰로운 방식으로, 우리 삶의 기쁨과 자유의 증진을 위하여.


이를테면 마법은 가능성이다. 그 전까지 불가능했던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 막힌 벽이 열린 문으로 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마법은 창조의 힘을 행사하는 일이다. 단지 잠재적인 가능성의 이미지로만 존재하던 것이 현실로 그 구체적인 형상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법을 초월적인 힘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마법은 분명하게 넘어선다. 그 전까지의 한계를, 어떤 장벽을, 우리가 갇혀 있던 그 감옥의 쇠창살을.


이러한 마법의 특성을 묘사하는 표현으로 내가 제안하는 것은 '치유와 성장(healing & growing)'이다. 치유는 원상으로 회복되는 것, 곧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성장은 거기에서 앞으로 나아가기까지 하는 것이다.


시간의 개념으로 비유하면 이는 과거의 상처에 속박되어 그 옛적의 자리에 봉인되어 있던 우리가 이제 현재의 제자리를 다시 찾는 것이고, 이제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일이다. 미래에도 존재하기를 꿈꾸며, 자신의 지속가능성을 미래로 연결짓고자 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생명의 운동이라고 말한다. 모든 생명은 과거를 딛고 일어나, 현재에 중심을 잡고 서서, 미래를 향한 날갯짓을 시작한다. 치유와 성장은 생명의 기초운동이다. 심지어 누군가 관리하는 이가 없어도 이 작용은 스스로 자율적으로 일어난다. 생명에게 내재된 패시브스킬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마력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마력은 곧 생명력이다. 마법은 생명이 자기의 내면에 있는 이 생명력을 활용하여 그 자신의 세계를 펼쳐내는 것이다. 생명의 운동은 그 자체로 창조의 운동인 셈이다.


이 운동은 우로보로스처럼 그치지 않는 흐름을 이룬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사이를 순환하며 정말로 우리의 세계라는 것을 만들어내며 그것이 조화롭게 지속되도록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한 개인이 건강한 자신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일은 하나의 지엽적 현상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라, 분명 전체의 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다. 비유적으로, 우주와 자신을 하나의 몸으로 상상하는 일 등이 마력의 기초를 키우는 훈련법으로 그려지는 것은 유의미한 묘사다.


실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마법이라는 말에 설렘을 느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이 우주에 버려져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갈 작은 먼지이고 싶지는 않다. 무엇인가 우리 자신이 태어난 지금 이 시공간에서 중요한 의미일 수 있기를 바란다.


마법은 그러한 우리가 분명하게 이 우주에서 매우 귀하고 중대한 존재들이라며 말해주는 것만 같다. 마법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넘어선 아주 거대하고 거룩한 어떤 사태와의 연결감을 느끼기도 하며, 지금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아주 멋진 우주적 사건들의 당사자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생생한 실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이 우주에서 아주 의미로운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발견해가는 삶의 방식, 우리는 이를 실존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가 사실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는가의 양상을 다룬다. 그리고 마침내는 대체불가능한 절대적 사건으로서의 개인을 묘사해내는 일에 성공하고야 만다. 추상적인 '있음'의 존재론으로부터, 구체적인 '삶에서 있음'의 존재론으로 이행한 것이다.


삶은 의미의 바다다.


물고기가 물을 관심의 소재로 삼는 일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까. 인간에게는 그것이 가능하다. 인간은 이미 자신을 둘러싸서 포함하고 있는, 그래서 인식되기에 무척이나 어려운 바로 그 삶이라는 것을 직접적인 탐구의 소재로 삼을 수 있다. 직관과 상상력 그리고 감수성이 인간이 삶을 포착하는 데 쓰곤 하는 바로 그 '눈'이다.


이것은 마력을 보는 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흐름을 보고, 그 작용을 이해하며, 이를 통해 자신에게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더 깊고 거대한 맥락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인간이 이 마법의 눈을 갖고 있어서다.


이 '좋은 눈'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눈은 대화를 위해 존재한다.


대화는 실은 언어의 교환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순수한 에너지의 교류다. 마력을 서로 나누며 흐름을 회복하고, 그 흐름을 다시 세계를 향한 더 거대한 흐름으로 흐르게 하는 일이 곧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화야말로 우리가 사실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진짜 마법이다.


우리에게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그래서 우리 스스로도 강박적인 한계를 만들곤 했던 많은 것들이 대화를 통해 기적적으로 풀려나가곤 하는 상황들을 우리는 도처에서 목격한다.


이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진짜 마법사란 대화를 잘 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들은 언어에 능숙한 언어술사들이 아니다. 마법의 힘은 언어의 힘이 아니다. 그들은 언어라는 매개보다 직접적인 힘을 쓴다. 마력이라고 하는 존재의 힘을 진동으로 발산해 전한다. 이세계 판타지에 등장하곤 하는, 마법주문을 외울 필요가 없이 의도만으로 바로 마법이 사용가능한 고위의 마법사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게 바로 이 세계에서 대화를 잘 하는 이의 모습일 것이다.


말을 잘 하는 일과 대화를 잘 하는 일이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사실 또한 우리는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캐치볼을 떠올려보자. 상대의 글로브에 170km의 직구를 꽂아대는 일이 둘 사이의 흐름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캐치볼의 핵심은 상대가 잘 받아서 다시 돌려줄 수 있도록 공을 던지는 일이다. 그래야 흐름이라는 것이 생성될 수 있다.


부끄럽게도 이런 글을 쓰는 나 역시도 이러한 지점에서 자주 틀리곤 한다. 파이어볼 200개를 연사하면 반가운 이는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마력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MP는 늘어나겠지만 쓰지도 못할 마법을 많이 쓸 수 있게 되는 일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아가야 할 자리는 마법의 기초다. 어떻게 섬세히 힘을 운용해서 흐름을 창출해내는가, 바로 그것이다.


대화는 아마도 최초의 창조일 것이다. 우리가 창조의 힘을 구사하게 되는 가장 첫 번째의 현실이다.


"빛이여 있어라."라는 말은 명령이 아니라 대화의 시동문이었다. 이 말에는 마법의 아주 놀라운 핵심이 담겨 있다.


여기에서는 전면적으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시작한다. 상대가 다른 어떤 것이 되기를 임의적으로 꾀하지 않는다. 상대의 본질을 멋대로 규정짓지 않는다. 빛이 있는 그대로의 빛으로 존재하리라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기만 한 것이다.


이렇게 존재를 먼저 인정하고 난 뒤에야 대화는 가능해진다. 존재를 무시하는 이들은 반대로 한다. 자신의 언어로 상대의 존재를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마법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일방성의 폭력일 뿐이다.


실존주의는 이러한 '흑마법'의 폭력을 고발했던 거의 첫 번째의 사상적 전통이다. 진리[본질]와 윤리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존재를 짓밟고 그 힘을 빼앗아 자신의 위상과 힘을 증대시키려던 흑마법의 시절을 끝내고, 개인들 각자에게 그 마법의 힘을 돌려주고자 구성되었던, 비유하자면 백마법 대위원회 같은 것이다.


우리는 생명을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오히려 생명의 기쁨이 넘치도록 살리는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백마법사의 길이다. 생명과 생명 사이에 흐르는 마력의 흐름을 회복하여 함께 융성해지는 그 생명의 길, 실존의 길이다.


생명은 대화로 회복된다. 그리고 미래로 전진해나갈 힘을 얻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진짜 마법의 역사일 것이다.


이 글은 그러한 현실적 마법을 배우고 또 활용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쓰고 있는 일종의 마법서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마력의 근원이자 그 현현된 상태들을 풍부하게 묘사하고자 사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제로는 「실존적 대화를 위한 핸드북」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사전'이라는 단어와 '핸드북'이라는 단어는 언뜻 모순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의미의 차원에서는 사전이고, 실용의 차원에서는 핸드북이다. 마음의 마법이라는 존재회복의 의미는 실존적 대화라는 실용적 형태 속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실존적 대화란 대개 엄숙한 한자어로 표현되는 비장한 삶의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정반대다. 이것은 생리적 대화다. 실존은 먹고, 자고, 싸는 일에 대한 것이다. 그러한 유기체적 순환계의 운동에 어떠한 막힘이 생겨 우리는 그것을 고통으로 경험한다. 마력이 유연하게 순환되지 않고 끊겨 있기에 우리의 생명성이 약화되고 우리는 창조의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권태, 욕구불만, 불감증, 무기력증, 만성적 분노, 우울, 이러한 소위 '현대병'의 증세들은 우리가 지금 창조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들이다. 다른 표현으로 '실존적 질환'이라고도 불린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이 실존적 질환들에 대해 아직까지 충분하게 대화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혼자서 해결하려 하거나, 또는 상대에게 강탈해 얻은 마력으로 일시적인 도핑효과를 누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계속 갈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함께 살거나, 함께 벼랑으로 떨어지거나다. 인간이란 말은 우리가 운명공동체라는 그 사실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을 군집의 시스템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관점은 전혀 아니다. 우리는 근대의 말미에 그 착각을 이미 폐기한 바 있다. 가장 완벽한 시스템은 가장 어리석다는 것을 전체주의가 낳은 일방성의 폭력은 잘 보여주었다.


인간의 운명을 미래로 연결짓고자 한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전체의 계를 바꿀 모종의 커다란 통합적 힘이 아니다. 열쇠는 개개인들에게 나누어졌다. 개인이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생명성을, 그 존재의 힘을 회복가능하게 된다면 전체는 바뀐다. 우리는 각자가 다 지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나비들이다. 트리나 폴러스가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자, 이것은 무척이나 철없고 낙관적인 관점인가? 그러나 나는 반문하고 싶다.


마법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닐 것인가?


그렇게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어떤 지점을, 분명한 어떤 희망을 자극하고 있기에, 마법이란 말은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믿고 싶다.


우리가 정말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당신과 내가 함께 존재할 우리의 미래와, 그때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을 그 어떤 정다운 대화를, 그런 아주 멋진 희망을.


그렇다면 나는 마법을 꿈꾸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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