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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마법사전 #1

"지와 사랑"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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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魔道)를 걷는 이라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앎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아무리 큰 껍데기를 만들어봤자 더 공허한 울림만 내면에서 메아리칠 뿐이다. 그렇다면 그 안을 채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미지에 대한 호기심.


바로 그것이 내면에 존재할 때 그 미지에의 호기심은 언제나 표피적 앎의 껍데기를 깨고 나와 더 큰 형상을 이룬다. 그러다가 이제 새롭게 드러나게 된 그 형상에 대해 다시 얇은 앎의 껍데기가 생기겠고, 미지에의 호기심은 다시 또 그 껍데기를 뚫고 나오는 식으로, 불사조는 거듭 태어나는 것이다.


마도를 간다는 것은 이처럼 스스로를 계속 새롭게 재생해가는 불사조의 알의 여정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기존의 앎에 대한 죽음이 있고 새로운 앎의 탄생이 있다. 그 과정을 이끄는 것은 아주 강렬한 미지에의 호기심, 바로 그것이다.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표현을 우리는 더욱 흥미로운 형태로 바꾸어 이해할 수도 있다.


미지에 대한 사랑, 이렇게 쓰면 어떤가.


사랑이 없는 앎은 그저 딱딱한 갑피, 많은 경우 폭력의 도구로 전락하게만 될 뿐이다. 서구의 근대를 지배했던 것이 바로 이 앎의 폭력이었다. 진정한 앎을 보급해서 모두가 똑같이 참된 모습이 되면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실현되리라 믿었던 그 기획의 결과는 전체주의의 전횡에 불과했다.


오늘날이라고 이 앎의 폭력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정보는 자본이 된지 오래다. 앎은 이전 날과 같이 계급을 구성하고 차별을 심화한다.


그래서 이러한 소외와 불평등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마법이 추구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남들은 모르는 모종의 신비한 마법적 힘을 자신만 소유함으로써 특별한 계급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마법에는 힘이 없다. 거기에는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마법을 배운다는 것이 어떤 오컬트적 지식자본을 손에 넣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마법이라는 것이 이렇게 오해되는 경우는 흔하겠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오해일 뿐이다. 전통있는 마법서들 또는 경전들은 그 시작부터 '지'와 '사랑'이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리며 출발한다.


'지'와 '사랑'은 마법을 구성하는 두 축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것이다. 앎이 없으면 사랑은 그 형체를 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실에서 힘을 갖고 활동하기 위해 사랑은 앎의 표피를 입는다. 동시에 사랑이 없는 앎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빈 껍데기일 뿐이다. 앎이 사랑의 지향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향할 때 앎은 비로소 의미를 찾는다. 인간을 위해 이로운 앎이 된다.


대화라는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해보자.


정보를 전달하는 일이 대화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그것은 앎에만 경도된 관점이다.


대화는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누는 일이다. 이것은 사랑의 관점이다.


레비나스는 이에 대해 아주 멋진 얘기를 들려준다(『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에서).


"내가 당신을 향해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을 인식하기 전에 먼저 당신을 축복했던 것입니다. 나는 인식을 초월한 곳에서, 당신의 인생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를 시작하는 인사말로 "안녕하세요."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적으로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향해있는 우리의 사랑을 먼저 전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상담에서 자주 나오는 인카운터(encounter)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흔히 '참만남'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을 서로가 알리려 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이 경우 서로는 서로에게 완전한 미지다. 내 앎을 초월해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미지의 모습으로 부정할 수 없이 분명하게 내 앞에 존재하고 있는 그런 상대가 있다.


바로 그것에 접촉하고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보는 일이며, 나와 같은 마음으로 상대도 뻗고 있던 그 손가락의 끝이 함께 닿는 일이다. 이티와 엘리엇의 만남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어떤 정보를 나누고 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나누고자 시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미지의 존재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던 순간의 그 감격, 그 환희, 그 떨림이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 마법반응이었다. 시간은 어떠한 창세를 알리는 종소리로 가득했다. 그것은 당신과 나 사이에 피어난 영원의 동산. 마르틴 부버가 노래했던 그 본원의 고향에 우리가 함께 도달한 순간이다.


아아, 이것은 전이마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서로에게 관심가질 여유도 부족한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아는 것만 챙기기에도 바빠 죽겠다고 외치던 그 현실 속에서, 터무니없게도 미지를 향해 관심을 가지며 손을 뻗어보았던 어떤 마법의 훈련생들은 다른 차원으로 전이하고야 만 것이다.


그곳은 우리가 더는 서로에게 외딴 섬이 아닌 곳, 그러한 만남이 충족되는 현실.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며 서로를 알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이들을 따듯한 바람이 감싸안고 있는 어느 온화한 우주.


우리는 지금 마음을 나누고 있다고도 말할 것이며, 커다란 마음속에 있다고도 말할 것이고,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고도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련다.


마음을 알아가는 일은, 정말로 배워가는 일은 사랑으로만 가능하다고.


마음이야말로 가장 미지인 까닭에.


가장 미지인 당신과 나,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의 표현인 까닭에.


마도를 걷는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마음을 통해 인간에게로 향하는 길이다. 인간을 알아가며, 인간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현실로 전이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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