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마법생물이 가진 창조의 힘"
우리는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니 우리가 보는 세상은 다 마음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결국 우리가 산다는 것은 매일매일 마음을 입고, 먹고, 자고, 놀고, 싸는 일을 의미하는 셈이다. 인간에게 마음을 벗어나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마음은 그렇게 특정상황에 적용되는 국지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 삶의 총체를 일컫는 표현이다. 김밥을 소화하는 위장과 파스타를 소화하는 위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마음을 자동적 생각과 서사적 감정의 복합작용인 마인드(mind)라고 오해하고 있을 경우에는, 우리는 마인드를 통제하거나 극복할 어떤 방편을 세울 수도 있으며, 또 일정 부분 효과를 거두기도 한다. 마인드세팅을 바꾼다는 표현처럼 상황에 따라 마인드의 작용을 임의로 조종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시험칠 때와 놀 때의 생활기어를 다르게 놓는 식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우리가 마음에서 벗어나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은 우리가 몸에서 벗어나 사는 경우도 있다는 말과도 같다.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애당초 마음이란 것은 인간에게 걸려 있는 대마법이다.
누군가는 이 마법을 사악한 마왕의 저주로, 다른 누군가는 신성한 여신의 축복으로 간주하겠지만, 실은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이다. 이 마음이라고 하는 마법은 신도 악마도 아닌, 그것보다 더 거대하며 인간에게 아주 우호적인 것으로부터 온 선물이다.
신학자인 틸리히는 이것을 궁극적 실재라며 '신 위의 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어떻든 우리에게는 '신비'라는 표현이 더 익숙하다.
인간은 이러한 차원에서 이미 마법생물이다. 신비가 내려준 마음[마력]으로 살아가는 신비로운 마법생물이다.
이 마법생물의 핵심적인 특징은 자유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유의 가능성이다. 바로 앞서 말한 것처럼 신도 악마도 실은 상관이 없는 이유는, 인간이라고 하는 마법생물은 자신의 마음[마력]을 활용해 그 자신이 신도 악마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아주 잘 묘사한다. 천국과 지옥은 그가 마음을 쓰는 방향성에 달려 있다. 한 개인이 현재 괴로운 지옥에 있는 것 같다면 객관적인 지옥이 그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자신의 마음[마력]을 지옥을 만드는 일에 썼기 때문이다.
창조의 문제를 크게 다루지는 않는 불교적 사유이지만, 여기에서는 분명 어떻게 창조가 이루어지는지를, 즉 어떻게 마법이 작동하는지를 충분히 묘사하고 있다.
마음이 창조한다. 마음이야말로 창조의 힘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은 마음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마음[마력]으로 창조된 세상을 보며 살아간다. 80억의 인간이 있다면 80억(실은 그 이상의)의 세상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각자가 창조하고 싶은 세상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이렇게 다시 말해질 수 있다.
모든 개인에게는 반드시 그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 창조의 힘이 있다고.
즉,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그 마법적인 힘이 개인에게는 반드시 존재한다고.
그러나 자신에게 창조할 수 있는 마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또는 자각하지 않았을 때는,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힘에 스스로 놀라며 치이곤 한다. 자기가 창조한 것이면서 오히려 그것이 자기를 공격하거나 위협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림자놀이 같은 현상은 심리상담의 전통적인 주제다.
인류의 역사속에서 인간 자신에게 그러한 힘이 있다는 사실의 자각을 돕기 위해 일했던 수많은 대마법사들이 있다. 철학자들은 대체로 그와 같은 대마법사들이었다. 니체는 독보적이다.
니체는 왜 신의 죽음을 선언했는가?
인간 스스로가 마력으로 창조해낸 신이라고 하는 것에(또 악마라고 하는 것에) 복종하며 오히려 더 궁색하게 살아가는 주객전도의 현실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마법사인 니체가 볼 때 이것은 인간의 몰락이었다. 인간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갖고 있는지를 망각하고, 오히려 그 힘으로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웃픈 코미디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마법을 시전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신이라고 하는 '작은 것'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신이라고 하는 작은 프레임으로 더는 인간 자신의 자화상을 포착하기에는 인간의 마음이 한참을 거대해졌다는 명확한 현실인식에서 비롯한 기획이었다.
작은 것에 큰 것을 담으려고 하면 억압의 고통만 생겨날 뿐이다. 언제나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의 이유는 이러하다. 특히 절대화되고 신념화된 언어는 이와 같은 고통을 양산하는 주범이다. 언어는 임의로 걸치는 옷 같은 것이다. 우리의 몸집이 커질 때마다 입게 되는 옷 또한 수시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언어가 자기를 진리처럼 절대화하고 있다면 우리는 오히려 우리의 몸을 옷에 끼워맞추어야 하는 악성의 사태가 발생한다.
실존주의는 자신의 신체변화에 따라 옷을 유연하게 갈아입어야 건강하다는 메시지를 펼친 사상적 운동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은 이 의미를 잘 함축하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거룩한 사회적 합의로 구성된 언어라 할지라도, 오히려 그 언어가 자신을 속박하는 더 작은 것이 되어 있다면 개인은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창조할 자유가 있다. 니체에게 있어서도 이 관점은 분명했다. 신이라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입던 낡은 옷, 어느덧 크게 성장해버린 개인들에게는 다른 옷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위해 자유로이 창조할 수 있는 자, 니체는 결국 우리가 그러한 초극인[위버멘쉬]이 되기를 제안했다. 그것은 아마도 마법사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아마도 새로운 니체, 새로운 짜라투스트라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이렇게 선언하게 될 것이다.
"영웅은 죽었다."
신이 죽은 자리를 빠르게 대체한 것은 인간영웅들이었다. 선호되는 영웅들의 특성도 빠르게 변해갔다. 고전적으로는 오디세우스, 현대에는 아이언맨으로 대표되는 지성적 영웅들이 최후의 스포트라이트 위에 올랐다. 영웅이라는 것이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가장 큰 인간의 자화상이라고 한동안은 믿어졌고 또 유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지성에 대한 추구는 지나치게 과잉되었고, 무수한 정보량은 인간을 실시간으로 질리게 한다. 저마다 다 소영웅주의에 빠져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두꺼운 대서사시의 자서전들을 남들에게 전하려고 하고 있다 보니 서로간에 정신적 피로가 막대하다. 차라리 교류하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유익할 지경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웅에 대한 추구는 오히려 대화를 단절시키고 마음의 흐름을 봉쇄하는 계기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영웅의 죽음이 선포되어야 할 때다. 이제 더는 영웅이라는 프레임은 인간을 담아낼 수 있는 큰 것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을 억압하고 그 안에 갇히게 만드는 작은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영웅은 인간이 중학교 2학년 때 입던 낡은 교복[수트], 어느덧 영웅보다 더 늠름하게 커버린 개인들에게는 또 다른 옷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듯 신도 죽고, 영웅도 죽은 현실이라면, 이것은 인간에게는 두려운 현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신과 영웅의 보호가 사라진다면 저 어둠의 골짜기에서 사악한 악마와 괴물들이 몰려와 인간을 위협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악마나 괴물도 신이나 영웅과 똑같이 인간이 마음[마력]으로 창조한 것이니, 그들도 바로 죽는다. 인간의 선포 앞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 자신밖에 없다던 붓다의 그 선포를 기억하는가? 그것은 이 모든 것이 다 마음이 창조한 것임을 알아챈 아주 지혜로운 인간의 자기이해였으며, 몹시도 당당한 자기선언이었다.
인간은 누구인가?
마음의 힘으로 창조해가는 대마법사. 나날이 그 위격이 상승해가는 창조의 주권자다.
인간이 창조하는 일에는 신도 필요없고, 영웅의 조력도 필요없으며,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잡힐 필요도, 괴물의 피를 마셔야 할 필요도 없다.
이 신비한 마법생물은 스스로 창조한다. 그것이 본성이다. 그러려고 태어났다. 창조를 자신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안다.
자신에게 행복한 것을 더 많이 창조하며 살라고, 신비는 인간이라고 하는 이 마법생물을 축복했다. 창조의 힘, 바로 마음을 선물했다. 마음이라는 행복의 대마법을 걸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어디에서라도 인간은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 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는 그 위대한 행복의 대마법으로부터 벗어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우리의 대화도 이 행복의 대마법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대화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의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고 있었는지에 대한 자기증명. 그러나 상대에게 전하는 언어적 리포트가 아니다. 현재 자신의 천국에서 살고 있는 이의 그 얼굴, 바로 그 표정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그렇게 행복의 대마법을 다시 서로에게 걸어주는 것이다.
마법생물들은 이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대마법 속에서, 더욱 대마법을 통해, 대마법으로 대화한다.
마음으로 대화한다.
그리하여 내 앞에는 당신이라고 하는, 내가 아주 행복할 또 하나의 천국이 창조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