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마법사전 #3

"우리는 어떻게 마법을 잃어갔나"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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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에 인간으로 태어나 살고 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확률적으로는 말도 안되는 마법같은 일이다. 생명은 누구도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할 수 없음에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마법현상이며, 삶은 그 자체로 마법적 사건들이다.


삶은 막힘없는 대화처럼 흐르며 그게 본래의 성질이다. 그러니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게 경험될 때에는 반드시 거기에 어떠한 막힘이 있다.


실제 대화의 상황이라면 우리는 현재 소통되고 있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소통의 의도가 막혀 대화도 막히고 삶도 막힌다. 그러면 삶이 늪처럼 답답하게 고여 있게 되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썩어간다. 질병도 생겨날 것이다. 그렇게 죽음이 암시되니 지금의 삶이 두려워진다. 우리가 삶을 점점 더 소외하게 되는 악순환의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삶이라고 하는 마법의 사건들은 우리에게서 멀어져간다. 영롱한 마법의 색채는 다 날아가고 건조한 기계음만이 우리의 귀에 메아리친다.


삶의 마법성을 상실한 우리는 이제 알고리즘처럼 일어나 먹고, 자고, 싸는 반복적 노동만을 하루하루 집행해갈 뿐인 기계장치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먹고, 자고, 싸는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이 마법생물은 그 고유한 생기를 다 잃고는 흡사 언데드가 되어버렸다. 죽지 못해 살고, 살지 못해 살 뿐인 무기력하고 우울한 존재가.


그러한 무력감에서 벗어나보고자 서사를 동원해 억지로 화를 만들어냄으로써 몸을 움직일 에너지로도 삼아보지만, 도핑시간이 끝나면 무력감은 더 크게 밀려온다. 이럴 때는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자신만 빼고 멀리 가버린 듯한 심정이 경험된다. 다른 이들의 행복과 미소띤 얼굴에 살의와 증오를 느끼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언데드들이 살아있는 인간을 미워하는 이유다.


이쯤에서 언데드의 특성을 살펴보는 일은 마법의 핵심적인 이해에도 큰 도움이 된다.


언데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스스로에게 저주를 걸든가, 타인에게 저주를 받아서다.


그 저주의 작용은 분명하다. 내적 시간의 동결, 곧 존재론적 시간의 동결이다. 언데드에게는 이 살아있는 시간의 흐름이 정지한 채 끊어져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마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내적 생명력[마음, 마력]의 흐름을 활용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며 사는 일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언데드는 반마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생명력의 흐름이 끊어져 있기에 그는 아무 것도 창조하지 못한다. 대신 창조된 것들을 증오하며 오히려 창조의 일을 말살하려고 한다. 여러 판타지 문학들에서 언데드들이 창조의 세력과 대립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묘사 그대로다.


이처럼 마법을 가장 적대하고 부정하는 존재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언데드는 그 자신을 가장 마법적인 존재처럼 드러내려고 한다. 반마법은 원래 마법보다 더 대단한 마법을 꿈꾸기에 시도되는 것이다. 자신만 독점적으로 특별한 마법의 힘을 소유하고자 할 때 반마법은 발동한다.


그것은 모든 태어난 것들이 자연스레 반짝이며 사라져갈 때, 자신만은 끝이 없는 불멸이라고 주장하려는 일. 존재의 섭리를 거부하는 일이다. 거짓의 영원을 추구하는 일이 곧 반마법인 셈이다.


그러나 이처럼 존재의 섭리를 벗어나 불멸인 척하기 위해서는, 다른 살아있는 것의 생명력을 빼앗아 자신을 채우지 않으면 안된다. 거기에 언데드의 모순이 있다. 자기가 특별한 척하려면 자기가 부정하고 있는 창조의 세력에 의존해서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뱀파이어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스스로 창조할 수 없는 언데드는 반드시 타자로부터 창조의 에너지를 갈취해야 하며, 그렇게만 불멸인 것처럼 꾸며낼 수 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반마법은 거의 반드시 흑마법의 의도로 이어진다.


자신의 시간은 동결하고 남의 시간은 약탈하는 이 언데드의 모습에서 미카엘 엔데의 『모모』에 나오는 회색사나이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사람들은 나중에 행복해지리라는 미래의 약속을 기대하며 회색사나이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헌납한다. 그러나 자신의 시간을 준 만큼 오히려 이제 사람들은 시간에 쫓겨 더 가난하고 여유가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은 현대에 만연한 증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통속적인 말을 공허하게 반복한다고 해소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 이제는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는 또 자신의 시간을 바쳐야 할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보자.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음을 잃게 되는 방식이라고 먼저 이해해보자.


언데드는 마음[생명력, 마력]을 잃은 상태다. 언데드는 또 다른 언데드를 만드는 방식으로 전염된다. 반마법은 확산되고, 이에 따라 흑마법은 더 많은 착취의 현실을 창출한다. 마음은 모두에게서 가장 크게 상실된다.


마음을 잃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기계장치가 되고 언데드가 되었다는 것, 우리로부터 마법의 시간이 끝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잃어 마법을 잃었다. 내일 아침은 더는 새로운 것을 향한 기대와 설렘으로 빛나지 않을 것이다. 어제와 같은 잿빛의 하늘만이 무겁게 우리를 짓누를 것이다.


우리의 세상에 마법이 사라지니, 우리는 이제 더는 행복하지 않다. 인간이라고 하는 이 마법생물에게서 마법이 거세되는 일은 그 존재를 부정당하는 일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을 잃음으로써 우리의 행복의 원천을 잃게 된 것이다.


미래에는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는 마음을 동결하고 헌납했는데, 그 대가로 얻은 것이라고는 행복의 막대한 상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왜 현재에는 행복하지 못했는가? 이 현재는 행복하지 않다고 결정지으며 우리는 왜 행복의 가능성을 미래로 보내야 했던 것인가?


언데드는 끝을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의 상태다. 그것은 그의 현재가 행복하기에 그것을 끝내고 싶지 않아서가 실은 아니다. 그는 현재의 조건에서 도무지 행복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끝낼 수가 없다. 마치 노래방에서 어떤 노래를 만족스럽게 부르지 못해 계속 노래방의 시간을 연장하는 모습과도 같다.


이것은 흡사 무한히 동일하게 반복되는 루프물의 성격을 띤다. 현재의 루프가 아직 끝나지 않은 속에서도 그는 벌써 다음 번의 루프를 생각한다. 계속해서 반추하고 반추하는 생각의 작용과도 흡사하다. 지금 이 현재에 결코 머무르는 일이 없으며, 그러한 방식으로 끝이라고 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녀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아직 헤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하나의 실연자의 상태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언데드가 되는 저주를 스스로에게 거는 모습은 판타지물에서 클리셰에 가깝게 자주 묘사된다.


모든 실연자는 자신이 대상을 잃었다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에 자신의 행복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은 이제 행복을 잃었다고 경험한다.


그러나 모든 실연자는 또한 정직해져야 할 것인데, 실연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 자신이 이미 그 대상을 통해 행복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실연 후에는 마치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유일한 대상을 잃어 영원히 저주받은 자[언데드]가 된 것처럼 자조한다.


이런 일은 대체 왜 일어나는가?


자신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를 계속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에 귀속시키려 해서다.


즉, 자신의 행복에 책임이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아직 이해하고 있지 않아서다.


이 말은 보다 심리학적인 진술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행복의 기준을 자신이 아닌 관계적 대상에 두고 있어서, 우리는 늘 후회하고 원망하며 동일한 고통을 반복하는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다고.


노래방에서 부르던 노래는 왜 만족된 적이 없던가. 자신이 그 가수처럼 부르지 못해서다. 그 가수의 목소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과 그의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남이 그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어떤 모습을 자기의 기준으로 삼아 살면, 우리는 반드시 불행해진다.


동일한 일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처럼 행복해지지 않는다. 그건 그의 삶이고, 우리 자신의 삶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시간이 다르다.


각자가 쓸 수 있는 마법의 색채가 다르다.


장미와 해바라기는 각기 다른 마법 속에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의 마법이든 간에 근사하고 영롱하며 아름답다.


우리가 이처럼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서 중요한 것들을 잃고야 만다.


남의 인생을 따라하다가 자신의 인생을 놓치고, 남의 시간에 쫓겨 살다가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며, 남의 마법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다가 자신의 마법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남의 삶을 살려고 해서 야기된 불만족에서 생겨나는 것이 자신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는 불만이다. 이 불만은 이내 남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며, 이에 따라 우리 자신도 언데드로 바뀌게 된다.


우리의 시간을 동결시켜 우리를 언데드로 만드는 저주의 내용이란 결국 "자기 자신의 삶을 살지 말고 더 좋은 남의 삶을 살아라[자기 자신이 되지 말고 더 좋은 남이 되어라]."였던 셈이다.


모방, 우리는 지금 모방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모방을 통해 우리는 마인드를 학습한다고 말한다. 성공적인 사회적 반응양식은 이 모델링을 통해 효과적으로 얻어질 수 있다고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말한다. 마인드라면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론적 시간의 표현으로서의 마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았는가.


우리가 더 좋은 이상적 모델이 되기 위해 모방을 하고 있는 동안 가장 빠르게 잃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이다. 그 마법적인 색채다. 한 번뿐이기에 그리도 눈부신 그 빛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닐 때 우리의 존재는 더는 빛나지 않으며, 우리는 바로 그렇게 마법을 잃어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찾을 수 있다.


반드시 다시 찾을 수 있기에 대화라는 것은 시도된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이 아닌 것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대화다. 그런 것을 우리는 실존적 대화라고 부른다. 표현 그대로 서로 다른 삶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만약 대화라는 것이 우리가 상대를 우리 자신에게 동화시키거나, 반대로 우리 자신을 상대에게 동화시키려고 하는 상호적 모방의 일이라면, 그런 것은 이미 대화가 아니라 독백일 것이다. 동어반복의 무한루프다.


대화를 통해 우리가 상대를 우리 자신이 아닌 것으로 발견하는 일은 가장 좋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지루한 동어반복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마주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이 우리 앞에 명확하게 떠올라 있는 까닭에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 또한 분명해진다.


대화에는 이처럼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기쁨이 있다. 자기회복이 있다. 그렇기에 대화는 정직한 우리 자신의 필요로 시도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회복하고 싶어 목마른 것은 우리 자신이다. 상대에게 어떤 좋은 것을 시혜해주기 위한 대화란 애초 성립이 불가능한 것이다. 반대로 상대로부터 상대가 가진 좋은 것을 받기 위한 대화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이 서로를 동화시키지 않으며 이루는 대화의 구조가 성립될 때, 이제 대화의 진짜 멋진 국면은 그 다음으로 전개된다.


통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이 통하고 있다.


우리가 악착같이 상대를 동화시키려 하거나 상대에게 동화되려 했던 이유는 그러지 않으면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실은 서로가 각자의 자기 자신일 때 우리는 가장 잘 통한다. 이상하게도 통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임이 분명해져 이제 마력회로가 다시 개통되었기 때문이다. 상대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 사이에는 빛나는 마력의 흐름이 막힘없이 순환을 이룬다. 언어는 다를지라도, 어떠한 생기의 활력이 우리 사이를 흐르며 우리를 아주 충만하게 한다. 함께 있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분명 이러한 감각이다.


장미의 삶과 해바라기의 삶은 달라도, 함께 있는 그 모습은 조화롭다.


대화의 핵심은 조화다.


그리고 우리는 마법의 핵심 또한 이 조화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창조의 일은 조화롭다. 창조한다는 것은 조화롭게 만든다는 것을 내포한다. 우리가 먹고, 자고, 싸는 일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처럼 조화로운 유기체적 작용을 이루어간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어서다. 우리에게는 매일매일 이 조화의 작용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작용들이 우리를 충만하게 하여 우리 또한 조화로운 존재로서 스스로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조화로움의 충만감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행복의 내적 기준일 것이다.


누가 뭐라든 상관이 없다. 외적으로 아무리 하찮게 평가되는 것이라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 자신이 진실로 기쁘게 먹고, 기쁘게 자고, 기쁘게 쌀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우리가 이 현재에 충만하게 행복한 길이다. 그렇게 사는 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마법사다.


인간의 행복은 외적 기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 이것은 인간이 어떤 외적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게끔 인간의 내부에 원천적으로 설정된 최고의 마법이다. 조화의 마법이라고 우리는 부를 것이다. 부조화의 저주에 잠시 마력회로가 막혀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 설정값이 바뀌는 일은 없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금방 다시 회복할 수 있다.


그렇게 보자면, 인간은 차라리 불굴의 존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마음을 동결해 언데드와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되기를 꿈꾸는 것은 끝이 두렵기 때문이다. 창조의 힘이 없을 때 우리는 끝이 두려워진다. 그리고 그 두려움으로 인해 생겨난 부조화로 인해 더욱 창조의 힘을 망각하고 만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에게 매일같이 작용하고 있는 조화로운 창조의 힘을 안다. 자연스럽게 끝을 향해 사는 그 태도도 조화롭기만 하다. 그러니 끝이어도 실은 끝이 아니다. 창조의 마력으로 모든 것은 다시 새롭게 시작된다. 인간은 또 일어선다. 그는 불굴이다. 다시 또 스스로의 행복을 이루어내고야 말 것이다.


마법, 우리가 그 이름으로 꿈꾸던 것이 전부 다 이 불굴의 존재의 모습에 담겨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마법을 다시 찾게 되었는가?


그런 적이 없다. 처음부터 잃었던 적이 없다.


처음부터 우리는 그 어느 저주 속에서도, 우리 자신이 불굴의 존재라는 이 사실을 잃은 적이 없다.


태양계의 세 번째 행성은 그러한 존재들이 사는 별로 아직도 유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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