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마법사전 #4

"라이칸스로프의 시간: 불과 변형의 예술"

by 깨닫는마음씨




모든 힘은 자신이 그 힘의 주인이 되지 못할 때 오히려 힘에 먹히는 현실을 낳는다.


이런 상태를 '씌었다(possessed)'고 말한다. 빙의, 신들림, 홀림, 트랜스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현상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우리에게 경험되곤 한다. 사실 아주 일상적인 현상이다. 특히 자신이 마치 자신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게 되는 대표적인 순간은 우리가 화에 씌었을 때다.


화는 세기의 수준으로 말하면 아주 강한 심리적 에너지이기에, 많은 이들은 이 화를 다루는 일을 어려워한다.


실제로 이는 불을 다루는 일과 유사하다. 판타지 세계에서 드워프들이 대접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불의 장인이라서다. 불을 효과적으로 다루어 희귀하고 유용한 여러 무구와 도구들을 만들어내는 특급의 대장장이로서 드워프들은 명성이 높다.


여기에서 화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창조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일견 눈치챌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한 이래 인간의 문화가 꽃피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 점은 더욱 명백해진다. 예술가들은 드워프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화를 통해 작업한다. 스스로를 땔감으로 태워 창조적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예술적 삶을 사는 데 좌절하는 이유는 이 화를 다루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일 것이다. 강력한 에너지를 다루려면 그만큼 섬세해야 하며 고도의 집중력을 동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창조의 의도로 그 방향성이 분명하게 자리잡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불은 여기저기로 번져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만 하는 악재가 될 것이다.


그것은 화신(火神)에게 '씌인' 모습과도 같을 것이다. 창조와 파괴는 원래 동전의 양면이다. 힌두교의 시바는 파괴의 신이자 창조의 신이기도 하다. 아니 애초 창조를 관장하는 브라흐마, 유지를 관장하는 비슈누, 파괴를 관장하는 시바는 동일한 것의 세 표현이다.


우리가 화를 창조적 에너지로 다루는 일에 실패하면 그 화는 우리 자신에게 씌인다.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격이 높은 신을 불러낸 영매가 거기에 씌이는 문제와도 같다. 더 구차한 예로는, 아직 충분한 훈련이 되지 않았음에도 자기가 깊이 있는 예술가처럼 행세하고 싶어하는 이는 늘 울렁거리는 초조함과 답답함의 기운을 경험한다. SNS에서 남들을 따라 자기도 힙한 예술적 존재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이들이 그렇게 늘 자기 자신을 향한 화에 치인다. 자기가 불러낸 화가 자기를 공격하는 것이다. 소위 예술병의 말로다.


이처럼 예술적 의도와 화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성이 있다. 그러니 예술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화를 이해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된다.


예술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우리는 보편적이고 실용적인 정의를 하나 갖고 있다. 그것은 '자연의 재구성'이다. 그래서 예술은 문화의 근원이다. 모든 문화는 자연의 재구성을 통해 태동하고 발전해나간다. 그런데 이 재구성에는 명확한 방향성이 있다.


우리의 몸이 더욱 기쁘고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현실, 그것이 방향성이다. 문화는 분명 그런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이것을 자연의 초월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다. 초월은 언제나 포함하며 초월하는 것이다. 자연의 초월은 그렇게 자연을 포함하면서 자연보다 더 자연스러움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화산의 분화나 지진 등 자연이 우리에게 어떤 고통의 이유가 되었을 때, 문화적 기술발전이 오히려 그러한 자연의 상태를 초월해 인간의 몸이 기쁘고 편안해질 수 있는 현실을 실현해왔다는 점을 기억해보자. 이것이 자연보다 더 자연스럽다는 그 의미다. 폭우가 자주 쏟아지는 섬에서 커다란 나뭇잎들을 엮어 그 아래 몸을 뉘인 인간의 모습은 예술가다. 그가 해낸 그 일은 분명 예술적 결과물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몸에서 나와 몸을 향한다고. 그렇게 몸에 가장 좋은 상태를 실현하려 한다고.


또 우리는 화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왜 화가 나는가, 또는 어떤 때 화가 나는가?


우리의 몸이 억압되어 있을 때다. 심히 구겨져 있고 눌려 있어서 그 몸이 도무지 편하지 않을 때다.


고통받고 있는 몸, 그것이 화가 일어나는 이유다.


몸이 기쁘고 편안한 현실을 창조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화는 일어난다. 즉, 예술의 필요가 있기 때문에 동원되는 것이 이 화라는 에너지다.


나는 여기에서 '예술'이라는 표현을 슬슬 '마법'이라는 표현으로 치환하고자 한다.


마법은 우리 몸에 좋은 것을 창조하는 일이다.


우리는 마법을 부정하고 증오하던 저 마녀재판관들에게서 대단히 잘못 배워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몸을 더 괴롭히고 혹사시켜야만 아주 먼 미래에 행복을 얻게 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몸이 기쁘고 편한 일은 죄악이라고, 자신의 몸에 더욱 가혹한 고통을 가하는 자만이 인생승리자의 자격을 얻을 것이라고, 인류 최악의 가스라이팅은 긴 시간 동안 지속되어왔다.


자연의 파괴.


자연스러운 본성의 파괴가 자행되었던 것이다.


신념에 의해 눌리고, 이념으로 인해 뒤틀리며, 임의적 언어로 만들어진 도덕과 윤리 때문에 일그러진 우리의 몸은 분명 커다란 비명을 지르고 싶었을 것이다. 우주 전체가 순간 멈칫할 정도의 그 크기로.


그러나 비명이 터져나오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꾹꾹 눌러 참아왔고, 바로 그 버티며 사는 인내의 일이 화를 잘 다루는 방법이라고 마녀재판관들에게 또한 교육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화의 주인이 될 기회를 아득히 상실하게 된 것이다.


몸을 억압해놓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화도 억압해버린 이 이중의 구속은, 도무지 우리가 화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어야 할지 심각한 난제로만 경험하게끔 만들었다.


예술도 막혀버렸다. 문화도 끝이 났다. 촌스럽고 투박하며 얕기만 하다. 몸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줄 도파민의 촉진제로서만 모든 것이 소비될 뿐, 우리 몸을 기쁘고 편한 현실로 이동하게 해줄 근본적인 마법의 힘은 우리로부터 잊혀지고야 만 것이다.


이렇게 화와 관련된 모든 것이 망각 속에 위치하게 되니, 우리는 화에 대한 전적인 무력감을 경험할 수밖에는 없다. 다만 꾹꾹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에는 불가피하게 폭발하게 되는 화산의 분화를 경험하듯이, 우리는 다만 화에 '씌여' 야기되는 폭력의 주동자이자 동시에 희생자로만 남게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만 아주 긴 시간을 반복해왔다.


자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 처한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실로 답이 없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마법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 경험되는 마법[마음] 그 자체야말로 막힌 모든 상황의 답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대상에게 향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 몸과만 관계된 것이라고 이해하는 일은 필수다.


자 마음[마법]을 시동해보자.


이것은 서서히 우리 몸 안에 가득한 비명을 해방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르르,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점차 우리 몸은 변형되어간다.


아무도 없는 공원의 들판 위에서, 강둑 위에서, 또는 오래된 동네의 골목길이라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더는 화를 억압하지 않는다. 그것을 내 몸을 위해 가장 좋은 일로 쓸 것이다.


그러면 달빛이 스며들듯이 이제 풀려난 화의 에너지가 우리의 세포에 충만해간다. 변형은 가속화된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세진다. 뇌는 화학물질들을 우리의 전신으로 뿌려대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구속의 족쇄를 더는 견디지 않을 것이다. 부숴버릴 것이다. 뛰쳐나가버릴 것이다.


우리의 몸은 달리기 시작한다. 움직이는 관절관절마다 힘이 약동한다. 주체할 수 없이 상승하는 기운을 타고 발을 구르며 하늘을 향해 도약한다. 팔을 크게 들어 호랑이처럼 내지른다. 늑대처럼 찢는다. 코끼리처럼 찍는다.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마루야마 겐지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라이칸스로프의 시간을.


이것은 아주 오랜 마법.


인간이 태초의 자유로 숨쉬던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자연을 열망하며 꿈꾸던 그 마법.


늑대인간의 전설이다.


라이칸스로프는 변형의 마법이다. 늑대인간, 호랑이인간, 코끼리인간, 그 모든 자연체로의 회귀를 이루는 마법이다. 그렇게 동물로서의 변형을 이룸에 따라, 그 형상이 분명하게 표현됨에 따라, 억눌려져 있던 우리의 몸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경직에서 벗어나 다시금 유연성을 찾아 활공한다.


쓸데없는 언어의 족쇄에 갇혀 그동안 우리 자신의 몸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게 고통받았는가, 늑대인간의 형상으로 실현된 이는 이를 뼈저리게 실감한다. 전율 속에서 그는 울부짖는다. 달이 환히 비추던 여름이었다.


자연으로 회귀하면서도, 이는 자연의 초월이다. 자연에 늑대인간 같은 것은 없다. 이것은 자연을 초월해, 지금의 고통으로부터 몸이 기쁘고 편한 자연스러움의 현실을 향하기 위해 창조된 마법생물의 한 모습. 하나의 예술의 형태다. 마음의 예술이다.


불은 소재를 변형시킨다.


화는 인간을 변형시킨다.


이 마음의 예술은 그래서 불과 변형의 예술이다. 불과 변형의 마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가 이 마법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화는 결코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우리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형상으로 우리를 변화시켜준다.


이 라이칸스로프의 마법에 씌이지 않고 그것의 주인이 되는 일은 간단하다.


화는 다른 대상을 향한 폭력의 의도로 쓰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우리 자신을 향한 회복의 의도로 쓰이기 위해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화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마음작용도 그러할 것이다. 대상의 문제가 아니다. 오직 나를 향한 것이다. 내 몸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몸이 기쁘고 편한 현실을 창조하기 위해 작동하는 마법, 그것이 마음이다.


그러니 마음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행복의 마법이다. 어떤 작용으로도 우리가 행복할 현실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그동안 곤란해왔던 화를 통해서도 그 일은 가능하다. 이러할 때 우리는 이제 마음의 주인이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변형이 이루어진 것이다.


마법의 주인인 마법사로서.


마법사는 마법을 쓰는 이로서 드러나기보다 먼저 마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로서 드러난다. 마음이라는 마법이 우리 자신에게 좋은 것임을 알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마법세계로의 문을 연 것이다.


답없이 막혀있던 고통과 억압의 현실에서 빠져나갈 그 문을.


라이칸스로프는 더 빠르게 질주해 그 문에 도달하는 방식일 것이다. 고통과 억압의 현실을 누구보다 답답하게 경험하던 섬세한 이들이 예술가가 되는 일은 원래 자연스럽다.


예술가들은 불을 머금어 스스로를 변형시키는 이들이다. 이러한 예술적 삶은 화로 가득한 오늘날의 시대에 분명한 가능성이며, 우리의 희망일 것이다. 사방이 꽉 막혀있다면 바로 지금이 기회다. 이제 그 몸이 자유롭고 신비한 예술적 존재로 우리가 각성할 마법의 시간이다. 마음의 달이 환히 비추던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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