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아이"
마법감수성이라고 말해보자. 마법을 금방 익히고 더 잘 쓰게 되는 이들은 이 마법감수성이 높은 것이다.
마법감수성이 높은 이들은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이미 알고 있다.
마법은 놀이라는 것을.
우파니샤드에 기원한 인도사상들에서 흔히 이 삶을 창조적 유희라고 말할 때의 그 의미와 유사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즐기기 위해 이 세상에 왔으며, 스스로를 즐길 수 있는 바로 그것이 놀이의 원형이다. 모든 놀이는 우리가 스스로를 다양한 방식으로 즐기려는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마법은 그중에서도 가장 오롯하게 우리 자신을 즐기는 놀이다. 온전함의 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재를 100%로 기뻐하며 즐길 수 있는 놀이, 그럼으로써 놀이를 하면 할수록 우리 자신이 더욱 사랑스럽게 경험되는 놀이, 그것이 바로 마법[마음]이다.
그러나 이 놀이라는 것 또한 대상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앞에 계속 새로운 미디어콘텐츠가 공급되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법감수성은 그 반대로 작동한다. 마법감수성이 높을 때 우리는 우리가 위치한 어느 곳에서도 스스로 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의미의 대마법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심지어 나치의 강제수용소 속에서도 노는 일이 가능했다고 보고한다(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았는가). 나아가 그렇게 놀 수 있었던 그 힘이 자신을 강제수용소에서 생환하게 해준 원동력이라고까지 고백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노는 일은 곧 잘 사는 일과 직결되는 셈이다. 마법감수성은 유희의 차원과 생존의 차원이 분리되지 않은 것으로 이 삷을 느낄 수 있는 일인데, 이는 실존이라는 삶의 방식으로 불리곤 한다.
실존은 복잡한 여러 요소들을 통합한다든가, 멀쩡한 것을 둘로 쪼갠 후 다시 그것을 붙이며 대극의 합일이라고 부르는 식의 일들과는 정반대편에 있다. 실존은 차라리 둘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처음부터 하나였다. 알아주는 이와 알아지는 이, 담아주는 이와 담기는 이,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가 따로 있지 않다.
실존은 본래적 종교성을 회복하기 위한 기획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종교(religion)라는 단어는 어원적으로 '다시 연결짓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분리된 것을 다시 하나로 돌린다는 뜻이며, 원래 하나인 현실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놀아주는 자와 놀아지는 자도 둘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정확하게 이 둘을 분리해서 사는 양식 속에 놓여 있다. 미디어가 이 일을 조장한다. 미디어는 자신을 제일 잘 놀아주는 자로 위치시키며, 놀이의 소비자에게 최고의 놀이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말한다.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으니, 취향껏 원하는 장난감을 선택해서 놀기만 하면 된다고 미소짓는다. 유튜브든, OTT든, 게임패스든, 지금의 미디어는 이처럼 '최고로 잘 놀아주는 부모'의 모습을 자임한다.
이 시대의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미디어에게 양육되고 있는 중이다.
꼬마펭귄 핑구와 뽀로로를 통해 놀아지며 양육되던 시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는 이제 평생양육사다. 평생을 '우쭈쭈 까르륵' 속에 인간을 붙들어맨다.
그래서 이것은 주술이다. 민속학자인 프레이저는 유사한 것으로 유사한 것을 끌어들인다는 주술의 의미를 밝힌 바 있다. 주술의 핵심은 묶고, 머물게 하며, 속박하는 것이다. 미디어는 시작부터 이 주술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오늘날에는 지배적이다.
주술의 본질이 '언어로 삶을 통제한다'는 것임을 이해하면, 미디어가 왜 주술일 수밖에 없으며, 정보언어가 과잉된 현대사회가 왜 주술사회일 수밖에 없는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리고 주술사회에서 거의 반드시 펼쳐지게 되는 일은 양육독재다. 양육만이 삶에서 가장 중대하고 유일하게 진정한 일인 것처럼 평가되는 것이다.
언어의 중요성이 과장될수록, 주술의 세력도 강해지며, 양육의 의도도 지배적으로 변한다. 주술 자체가 자기 주변에 사람과 사물을 묶어둠으로써 번영과 안정을 꾀하려는 양육의 핵심적인 욕구를 담고 있는 까닭이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두렵다면 아이를 자기 옆에 계속 묶어두면 되는 일일 것이다. 주술은 이런 양육적 욕구의 표현이다.
그러니 요즘 생산되는 미디어의 콘텐츠들을 보면 다 자신이 가장 쉽고 친절하게 좋은 것을 떠먹여주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유식이 필요한 유아처럼 이미 콘텐츠의 소비자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엄마가 없으면 혼자서는 먹고, 자고, 싸며, 놀지도 못하는 아동들에게, 자신이 가장 잘 놀아주는 자로서 '우쭈쭈 까르륵'의 양육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가 유치한 것은 이러한 미디어주술의 양육적 행태와 깊은 관련이 있다. 게임, 영화, 개인방송 등의 미디어를 소비하지 않으면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는 그 입장은, 양육자 없이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아동의 입장과 정말로 같다. 그렇게 인간은 미디어의 양육에 묶여감으로써 점점 더 자신을 아동처럼 작고 무력한 존재로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미디어는 마치 학예회에 참석한 학부모라도 된 양, 자신의 주술로 양육하는 아이들에게 당당하게 네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강렬히 권한다. 그렇게 미디어의 문법을 따라 살아야 사회에서 뒤쳐지지 않고 똑바로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듯이, 현대판 한석봉 어미의 도마소리를 울려댄다. "얘 석봉아, 에미는 떡을 썰테니 너는 릴스를 찍도록 하거라." 이러한 방식으로, 아직 여물지도 않았는데 '쫓겨서' 나오게 된 그 무수한 자기표현들이 시대에 만연한 유치함에 한몫을 더해가는 것이다.
주술이라는 것이 이처럼 유치한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주술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주술과 마법이 아주 다른 것이라는 사실 또한 나는 이 지점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주술에는 대상이 있고, 마법에는 대상이 없다. 주술은 대상을 이리저리 갖고 놀려는 의도 속에 있는 반면, 마법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노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술은 점점 더 대상을 속박하는 방식으로 자신 또한 대상에게 속박되며, 마법은 점점 더 자기 자신으로서 자유롭게 되어간다.
관계가 가장 집요한 형태의 주술이라는 사실 역시도 우리는 이쯤에서 쉬이 눈치챌 수 있다. 양육적 관계, 오늘날 여러 미디어의 콘텐츠에서 예찬되는 바로 그것은 주술의 정점이다. 궁극주술이다. 이러한 관계의 치명적 주술성을 명쾌하게 밝힌 또 하나의 마음의 대마법사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에릭 번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아주 중요한 이해를 구할 수 있다.
에릭 번은 인간의 정신구조를 임의적인 자아들의 형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조금 더 뒤에 설명하겠지만, 이것은 소인격적인 내용물들이 전혀 아니다. 에릭 번의 묘사는 크게 부모자아, 성인자아, 아동자아의 세 형상으로 이루어지며, 더 세분화된 형태로는 양육적 부모, 비판적 부모, 성인, 자유로운 아이, 순응하는 아이의 다섯 형상으로 구성된다.
여기에서 오늘날 미디어에 양육되는 이들이 보이는 모습은 특징적으로 '순응하는 아이(adapted child)'에 가깝다. 소위 말하는 착한아이 콤플렉스는 이 자아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겉으로는 규범을 준수하고 신념어린 모습으로 주변에 예의바르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열등감과 반항심이 가득 차있다. 반사회적 행위들을 일으키는 것은 그래서 '자유로운 아이'가 아니라 이 '순응하는 아이'다. 자기가 대단히 자유로운 존재인 것처럼 과잉된 허세와 기만의 위악을 행하는 것 또한 이 자아다. "늑대가 나타났어요."의 관심종자도 물론 이 자아의 모습이다.
이 순응하는 아이는 양육의 결여나 부족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양육과잉과 부모과잉으로 인해 생겨난다. 흔히들 비판적 부모자아가 순응하는 아이자아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지만, 실은 양육적 부모자아의 몫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 양육의 가치가 절대화되어 있는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아이가 건강하고 자유롭게 자라기 위해서는 부모가 큰 역할을 해야 한다."라는 전제를 신앙처럼 갖고 있다면, 순응하는 아이자아가 비대해지는 일은 필연이다. 진실로 부모과잉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순응하는 아이'를 '주술에 걸린 아이'라고 칭해볼 수 있다. '저주받은 아이'라고 조금 더 세게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저주의 내용은 분명하다. "너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 저주가 우리를 약화시킨다. 여기에는 이미 우리가 모자라고, 한심하며, 무능력한 존재라는 평가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결여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주술을 동원하는 일이 우리에게 종용된다. 오늘날의 우리가 언어로 우리를 과대포장하며 꾸미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본질적인 차원에서 못난 존재라고 믿고 있는 우리 자신을 언어적 주술효과로 대신 보상해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믿게 만든 것이 바로 주술이며,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제안되는 것도 주술이다. 즉, 이것은 주술의 병주고 약주기,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주술의 가스라이팅에 당한 이들은 이제 주술만을 바라본다. 가장 중요한 그것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다. 게임화면에만 몰두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를 영락하게 만든 원인인 주술을 오히려 구원자처럼 믿으며 더욱더 우리 자신의 힘을 잃어가게 되는 것이다. 미디어부모만 그 힘을 모아 신처럼 군림하기를 지속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순응하는 아이로 몰락하기 전에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것이 바로 '자유로운 아이(free child)'다.
순응하는 아이는 자유로운 아이가 억눌려서 비틀어진 모습이다. 멀쩡하던 사지가 주술에 걸려 기괴한 형상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우리는 떠올려볼 수 있다.
자유로운 아이는 본성 그대로의 창조력과 영감으로 자신의 존재를 활짝 펼쳐서 스스로를 자유로이 즐기는 아이의 모습이다. 바로 '마법의 아이'의 모습이다.
에릭 번은 이 '자유로운 아이'야말로 인간의 원형이라고 말한다. 다른 자아는 실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래서 에릭 번의 자아모델이 소인격론이 아닌 것이다. 자유로운 아이가 억압받아 순응하는 아이가 되고, 순응하는 아이가 커서 양육하거나 비판하는 부모가 되어 다시금 순응하는 아이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에릭 번은 이 끝없이 반복되는 독한 '관계의 주술'에서 자유로운 아이를 회복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 관계란 단지 연극이다. 부차적인 자아들이 펼치는 시나리오 게임 같은 것이다. 이 관계의 게임은 서로를 착취하며 서로의 에너지를 갉아먹는다. 단지 그게 목적이다. 자신이 이런 게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으면 평생을 이 소모적인 게임만 하다가 죽게 된다고 에릭 번은 말한다.
이 위대한 대마법사의 통찰은 눈부시다. 게임을 끝내는 열쇠는 자유로운 아이가 갖고 있다. 아니, 자유로운 아이 자체가 열쇠다. 그는 지겹고 졸린 게임을 그만두고, 모니터 밖으로 바로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 아래 스스로의 거대한 자유를 즐기러.
에릭 번은 분명하게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말한 것이며, 원래 우리의 본성은 누구나 마법감수성으로 충만한 자유로운 아이인 것이라고 그는 자신있게 선언한 것이다. 그는 마치 선불교의 선사처럼 말했다. 그렇게 이것이 존귀한 본성인 까닭에, 이는 학습이나 양육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동양의 마법론인 선불교라면 이러한 본성을 단지 깨달을 뿐이라고만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도 분명해진다. 좋은 부모가 있어야 자유로운 아이는 생겨날 수 있는가? 이미 그렇지 않다는 점을 우리는 확인했다. 나쁜 부모여도 자유로운 아이로서의 우리의 본성은, 그것이 갖고 태어난 본성인 까닭에 잃어질 수가 없다. 부모 및 양육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우리는 원래 모두가 자유로운 아이로 태어나며, 죽을 때도 자유로운 아이로 죽는다.
차라리 예수의 "어린아이와 같은 이가 천국에 들어갈지니."라는 말을 이 자유로운 아이에 관한 말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에릭 번은 분명 그러한 의미를 담아내고자 했다.
자유로운 아이는 근본적으로 부모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혼자서도 잘 놀며, 혼자 노는 일을 좋아한다. 자신을 즐기고 그렇게 자신을 더욱 좋아하게 되는 일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러니 자유로운 아이는 사람들과도 잘 논다. 사람들을 자기가 놀 대상적 도구로 이용할 필요가 없기에 그는 더 순수하게 친밀한 만남을 가진다.
자유로운 아이는 명백하게도 놀아주는 자도 아니고 놀아지는 자도 아니다. 그는 단지 스스로 노는 자일 뿐이다. 놀려고 이 세상에 왔다. 우리가 여기에서 장자의 향기를 맡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장자도 여느 마법사 못지 않은 자유로운 아이였기에.
마법사는 이 자유로운 아이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인간은 다 마법사로 태어난다. 그러나 주술에 걸려 마법의 힘을 잃고 영락하게 된 것이다. 미디어라는 주술은 우리를 행복한 스타로 만들어줄 수 있다며 자신이 마법인 척하는 가짜 권위를 우리에게 행사해왔다. 우리는 스스로를 즐기고 놀 수 있는 마법의 힘을 이렇게 미디어의 가짜 권위에 헌납함으로써 주술에 복종하고 순응하는 아이로만 남겨졌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반항이 필요한가? 주술은 복종만큼이나 반항의 에너지를 먹고 그 세력을 강화할 뿐이다. 반항 자체가 애초 순응하는 아이로서의 반응양식이다.
자유로운 아이는 복종하지도 반항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연스럽게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즐긴다. 자신의 몸을 즐긴다. 졸리면 유튜브를 끄고 나른한 기쁨이 충만해오는 온몸을 이리저리 굴리며 뿌듯하게 즐긴다. 더욱 기쁨이 느껴지는 자세를 창조해가며 지금 이순간이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다. 자신을 위해 지금 가장 좋은 일을 해낸 스스로가 멋지고 대견하게 경험될 것이다. 또 다시 그런 기회들을 얻을 수 있을 내일이 기대된다.
주술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법처럼 빛날 우리의 내일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마법의 아이는 그런 꿈같은 매일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