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예술가
상담자 모델은 실천가(practitioner)와 연구자(scientist) 사이의 교집합에서 구성된다. 여기에 윤리주체(ethical subject)라는 범주를 조금 더 표면으로 노출시켜 묘사하면 조화로운 모델이 된다.
실존상담자 모델은 이 실천가의 범주를 단지 전문적 역량이 요해지는 특수한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삶의 영역으로 확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실존상담자는 상담장면에서 실존상담자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에서 실존상담자로 사는 것이다. 애초에 실존이라고 하는 개념은 존재적 차원에 대한 것이지, 기능적 차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처럼 총체적인 삶에서 드러나는 실천가의 모습을 우리는 삶의 예술가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실존상담자가 전문적 역량에 있어 소홀한 것은 아니다. 본래적으로 art라는 단어가 예술과 기술이 분화되지 않은 전모를 의미하듯이, 실존상담자는 예술가의 면모 속에 이미 유능한 기술성 또한 담보한다.
그러나 실존상담자가 활용하는 기술은 어디까지나 삶의 예술을 향한 바로 그 목적에만 봉사한다. 곧, 실존상담자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기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존상담의 핵심적인 특성을 시사한다.
실존상담은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술이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오히려 예술은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창발된 것이다.
사실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술자리에서 들리는 대화들만 들어보아도, 모두가 다 유능한 해결의 전문가들이다. 분명 그들은 해결의 전문가들이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똑같은 이야기들과 함께 술병을 쌓아감으로써, 술집의 경영 문제를 유능하게 해결해주는 전문가들이다.
그러나 실존상담의 진짜 전문성은,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정직하게 조우하고, 또 섬세하게 탐구하려고 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러한 실존상담자의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지도를 포기하는 것이다.
부모관계라든가, 꿈이라든가, 언어패턴이라든가, 인지도식이라든가, 학습으로 조건화된 반응기제라든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인간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적당한 지도를 하나 손에 들면, 우리는 마치 해결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어떤 지도로도 인간은 결코 다 설명될 수 없다. 곧, 해결될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이 해결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실존상담의 출발점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애초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때문에 실존상담은 인간을 문제로 보며,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기획을 포기한다.
그러나 이 해결을 포기한다는 말이, 마치 문제로 여겨지는 증상보다는 근본적인 체질개선을 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실존상담은 두루뭉술한 "좋은 게 좋은 거지."와 같은 식의 말장난이 아니며, "인간답게 살면 돼."와 같은 식의 공허한 근본론도 아니다.
오히려 실존상담은 인간을 물음표로 놓는다. 실존상담자가 된다는 것은 언제나 인간에게 이 물음표를 띄운다는 것이다.
물음표가 붙은 것은 우리에게 결코 도구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임의적으로 손에 놓고 주무를 대상이 될 수 없다.
인간의 도구화 및 대상화가 바로 실존상담이 가장 빠르게 기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이가 자신을 인간에 대한 전문가로 놓고 있을 때, 이는 인간에 대한 대상화와 도구화의 위험을 늘 경계하게끔 한다. 그럼으로써 그 전문가가 실제로 위협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인간 전체의 위상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인간의 마음을 프로그램처럼 묘사하며, 그 프로그램을 다룰 수 있는 유능한 기술자로서 자기의 전문성을 자신하는 이는, 실제로는 인간 전체를 프로그램과 같은 위상으로 몰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몰락의 대상에는 전문가 그 자신도 포함된다. 그도 인간인 까닭이다.
이처럼, 인간에 대한 임의적인 지도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 지도만 잘 활용하면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믿는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도구화이자 대상화이며, 곧 인간의 위상을 스스로 추락시키는 일이다.
실존상담은 바로 이러한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실존철학자인 베르자예프는 이것을 인간의 객체화라고 부르며, 그에 무엇보다도 저항했다. 그가 인간의 핵심적인 속성으로 제시한 자유는 곧 결코 도구로 전락할 수 없는 인간의 거대한 위상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이에 따라, 다시 한 번, 인간은 해결되어야 할 저렴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거대한 미지다. 곧, 거대한 신비다.
실존상담자는 이 신비로서의 인간을 먼저 그 자신의 삶으로 시작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실존상담자는 적당히 들어주며 공감해주는 이용자 친화적 인공지능이 아니다. 또한 꿈의 정보들을 모아 가상세계의 보물찾기 게임을 펼치는 레크리에이션 활동가도 아니다. 또는 인지도식에 따라 메뉴얼처럼 교정된 대안적 답을 제공하는 프로그래머도 아니며, 언어패턴을 분석해 그 언어에 기초한 모델을 바꿈으로써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판타지작가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샤머니즘의 주술론에 가깝다. 거대한 인간 자신을 신비로 놓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외의 다른 작은 것을 신비로 놓으며, 그것에 의해 인간이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곧 작은 A를 바꾸면 거대한 B가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잘못된 인과론의 변종들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착각을 단번에 잘라버렸다.
"사자가 인간의 말을 한다 해도, 우리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곧, 사자가 인간의 말을 할 수 없어서 소통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면, 다양한 기술을 활용해 사자가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발상을 전적으로 기각하는 진술이다. 이에 따라, 언어, 꿈, 인지도식 등의 것을 변화시킴으로써, 그 존재가 변화될 것이라는 기획은 전적으로 무용해진다.
왜 이것이 불가능한가?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자가 인간의 말을 유창하게 하는 모습으로 변화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사자처럼, 또 사자가 우리처럼 살지 않는 까닭에, 사자와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바로 삶이다.
그리고 삶은 더 좋은 것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 자체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변화라는 개념은 분명하게 해결이라는 개념의 또 다른 형식이다. 때문에 실존상담은 해결에의 의도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화에의 의도 또한 포기한다. 특히나 자신의 능력으로 다른 이를 변화시키겠다는 망상은 가장 먼저 포기된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른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그 모든 행위와, 다른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곧 유능한 상담자의 자격이라고 평가하는 그 모든 주술적 의도는 무화된다.
실존상담의 대가인 스피넬리는 심리상담 및 심리상담자들이 얼마나 많은 주술적 논리들에 의해 오염되어 있는지를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다. 이 심리상담의 주술화는, 심리상담자들 자신이 다른 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의도, 곧 심리상담자들의 권력에 대한 추구의 의도 때문에 야기되는 현상이다.
심리상담의 현장에서 드러나게 되는 착취와 남용의 현실은, 전부 다 이 심리상담자들의 권력욕과 관계된다. 그러나 이 권력욕은, 내담자를 좋게 변화시키고자 하는 선한 의도로 인식되는 까닭에, 상담자는 자신이 바로 착취와 남용의 주체라는 사실을 좀처럼 자각하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선한 의도와 악한 의도의 문제가 아니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일이, 선하거나 악한 의도와 아무 관계도 없는 것과 같다.
삶에 대한 해결과 변화를 꿈꾸는 까닭에, 필연적으로 삶에 대한 착취와 남용의 현실이 만들어진다는, 다만 명확한 사실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해결하거나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사실이다. 사실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정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이 사실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한 태도는 바로 수용이라고 명명된다. 그리고 이 수용으로 말미암아, 정말로 우리에게 이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수용은 그것을 그 자체로 둔다는 것이다. 때문에 수용을 통해서는 그것 자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변화는 그것을 그 자체로 두지 못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 자체에 대한 이해는 굴절될 수밖에 없다.
실존상담자에게 있어 삶이란 그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삶은 자신과 동떨어진 외부에 있는 추상이 아니다. 삶은 이미 그 자신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삶은 곧 자신이다. 때문에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에 의한 삶의 굴절은, 그대로 자신의 굴절이 된다.
그래서 실존상담자가 그 자신으로 산다는 의미는, 이 굴절을 회복함으로써 온전한 자신의 면모를 다시 찾고자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이해의 역할이다. 이해라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지식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이 고유하게 살아온 자신만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이해를 통해 결국 우리가 얻게 되는 가장 큰 이득은 바로 고유한 주체성이다.
내 삶의 오리지널리티라는 것은 이렇게 출현한다.
변화와 해결의 주술적 논리를 따라, 항시 좋아보이는 것을 모방하고, 그 모방한 것으로 자신의 삶 또한 더 좋아진 것처럼 행세해보아도, 우리는 그저 죽을 때까지 모방자로서만 남게 될 뿐이다. 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더 좋아보이는 것에 대한 갈증만을 끝없이 느끼게 될 뿐이다.
이 말은, 아무리 주술적 논리에 근거해 좋은 것을 얻는 것처럼 생각되어도, 실제 그 자신의 삶은 단 1mm도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단지 변한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진한 화장과 화려한 액세서리로 자신을 무장함으로써.
그러나 껍데기만 살짝 벗겨도 그 원판은 쉽게 노출된다.
자신이 하찮게 느껴지는 까닭에, 좋은 것들을 모방해 자기도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살고 싶었던 그 작은 모습은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개미가 코끼리 풍선을 업고 다녀도, 그대로 개미인 것과 같다. 코끼리의 음성을 흉내내 확성기로 크게 발화한다고 그것이 코끼리의 삶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코끼리를 흉내내는 개미'의 삶이다.
그리고 실존은 바로 이 개미에 대한 것이다.
이 작은 개미가 어떻게 가장 거대한 신비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삶이 이미 그것을 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각자에게 담지된 고유한 형태로, 바로 이 신비를 향해서만 흐른다. 그러한 삶의 표현이 곧 예술이다. 자기 자신인 것, 그렇게 자기 자신임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이미 예술이라는 의미다.
주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떠한 것을 체험하든 간에, 그 체험의 주인공을 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 모든 체험 속에서도 자신의 뿌리를 그 자리에 내리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자기 자신을 그 장면 속에 드러내는 것이다. 때문에 주체성은 예술을 성립시키는 근간이다.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은, 곧 삶을 예술로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주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세계와 분리되어 홀로 구름 위 신선처럼 행세하고자 하는 특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와 연결되고자 하는 특성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곧, 주체성은 세계와 분리된 세계 밖의 내가 아니라, 세계와 연결된 세계 속의 나다. 하이데거의 표현처럼 세계-내-존재다.
이것은 결코 개념을 위한 개념으로서의 공허한 표현이 아니다. 이 세계-내-존재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의 모습처럼, 우리가 세계를 벗어난 놀라운 힘으로 세계를 바꿀 수 있는 대단한 권능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작은 개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그 작은 개미가 커다란 세계와 연결됨으로써, 그 세계와 대등하게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인간이 거대한 신비라는 의미는, 바로 이처럼 인간이 아무리 작은 그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사랑할 수 있는 위상의 존재라는 의미다. 우리는 작아도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이 하찮아도 사랑할 수 있고, 심지어는 우리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도무지 어떻게든 가능하다. 어떠한 한계 속에서도 가능하다. 그 어떤 말도 안되는 조건 속에서도 가능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이것이 바로 신비다.
이처럼 사랑이 그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가장 거대한 신비며, 그 사랑의 신비로 말미암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위상이 또한 거대하게 개방되는 것이다.
입장은 사실적인 것이며, 위상은 존재론적인 것이다. 이 둘의 경계를 흐리는 것이 바로 변화와 해결을 꿈꾸는 주술적 원리들이다. 그러나 실존상담자가 가는 길은, 사실적 입장을 수용함으로써, 그러한 자신의 입장과, 동시에 그 입장을 만들어낸 세계를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을 드러내는 길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것이 예술이다.
예술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불가능성 속의 가능성 때문이다.
이렇게 작은 것이 이토록 거대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묘사하는 것이 예술이다. 일례로, 한때 유행하던 소확행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것은 단지 소소하게 작은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소소하게 작은 것이 실은 가장 거대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을 담고 있다는 그 의미다. 그래서 그 표현은 감동을 자아낸다.
결국, 예술이 예술인 것은, 이 모든 유한성 속에서도 그 유한성을 통해 예술 자체가 담지해내고자 하는 초월성 때문이다. 예술은 원래 자기초월적이다.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냄으로써, 그러한 자신의 위상을 도약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표현으로는, 바로 사랑의 자기초월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예술은 곧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해결하려 하지 않고,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이것은 실증적인 이야기다. 우리를 임의적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고, 그저 우리 자신일 수 있도록 하는 이에게서, 우리는 사랑받는다고 느낀다. 그렇지 않은가?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마르셀의 표현에 따르면, 다만 이렇게만 말할 뿐이다.
"지금 그러한 모습의 그대여, 그대로 영원하여라."
실존상담자는 분명하게, 이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살고자 하는 이다. 그래서 그는 삶의 예술가다. 곧, 삶을 사랑하는 이다. 남의 삶이 아니다. 그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사랑하는 이다.
이처럼,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이가 바로 삶의 예술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자유를 정확하게 행사하는 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란, 곧 사랑할 자유인 까닭이다. 자유는 그 어떤 한계에도 갇힐 수 없는 자신의 주체성을 더 거대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곧, 자유는 사랑의 궤적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더 거대하게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의 면모에 대한 자기표현이 바로 자유다.
이렇게 보자면, 예술가가 자신의 사랑을 더 거대하게 개방해가는 그 자유의 표현이 곧 예술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는, 실존상담자가 대체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정확한 묘사다.
실존상담자는 상담이라는 활동을 통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한다. 한계란 곧 경계다. 그리고 도전이라는 것은 곧 도약이다. 실존상담자가 만나게 되는 내담자와의 사이에서 생겨난 경계에 대해, 실존상담자는 그 경계에 도전함으로써, 곧 그 경계 너머로 도약한다. 그것은 마치 연인의 방을 둘러싸고 있는 높은 담장을 뛰어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실존상담자는 연인을 향하는 동시에, 그 담장 너머의 것 또한 사랑할 수 있는 자신의 위상을 향해 도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담장에 도전하려면 먼저 담장이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고 또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담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담장을 이해한 이만이 담장을 넘어갈 수 있다. 그래서 실존상담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사랑은, 자신과 연인을 향한 것만이 아니라, 또한 담장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실존상담자는 경계를 사랑하는 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오히려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한계라고만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실존상담자는 사랑한다. 곧, 실존상담자는 인간의 유한성을 사랑한다. 유한성은 모든 인간이 각각의 고유한 인간일 수 있도록 지켜주는 울타리다.
연인의 노래는, 곧 그만의 고유한 삶은 이 울타리를 통해 흘러나온다. 때문에 우리는 단지 유한한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방식으로 유한한 것이다. 각자의 유한성이야말로 곧 각자의 개성이다. 이 말은, 다시 한 번, 예술은 유한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경계에 대한 실존상담자의 도전으로 결국 드러나게 되는 것은, 내담자의 개성이, 곧 내담자 그 자신이 실은 얼마나 예술적이었는가에 대한 그 기정의 사실이다. 예술을 하는 이가, 그 예술의 행위로 말미암아 이미 예술인 것을 발견한다. 이것은 고전적인 주제며, 동시에 늘 새롭게 변주되는 영원한 주제다.
삶의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이와 같이, 자신이 예쁜 그림을 그려놓고 누군가의 칭찬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또는 누군가에게 예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것을 칭찬하는 일이 아니라, 그 누군가의 삶이 이미 예술이었음을 알리는 일이다.
이는 곧, 그 누군가가 이미 그 자신의 삶을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그렇게 그가, 그 자신이 비루하게 느끼는 그 어느 조건과도 관계없이, 이미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알려지는가?
실존상담자가 내담자의 바로 눈 앞에서 보이게 되는, 담장에 대한 존중과 도전을 통해, 그렇게 드러난 담장이라는 사실에 대한 수용을 통해, 그리고 그 담장이 만들어준 고유한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것은 가능해진다.
바로 그러한 실존상담자의 모습이, 곧 내담자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그 모습이었던 까닭이다.
실존상담자는 그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서, 결국 내담자에게 내담자 자신의 삶에 대한 증인이 되어준 것과도 같다. 이것은 역설적이다. 실존상담자가 가장 그 자신이고자 할 때, 오히려 내담자를 가장 생생하게 대변하게 된다는 이 사실은, 분명 신비한 역설이다. 이것은 또한 예술의 역설이다. 예술가가 가장 고유하게 그 자신을 예술로 표현해낼 때, 그 예술이 더욱 많은 이의 가슴에 접촉되게 되는 그 역설이다.
곧, 실존상담자는 담장을 넘어, 연인의 품에 닿은 것이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메시지를.
"정말로 잘 사셨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최후의 증언이다. 시간을 완성하고 영원으로 향하게 하는 그 궁극의 증언이다. 이처럼, 가장 정직한 증언으로 말미암아, 예술은 이제 영원으로 도약한다. 불멸이 된다. 하늘에 새겨진다. 천궁의 별자리가 된다.
개미는.
그래서 모든 별자리의 이름은 사실 다 개미자리다.
삶은 각각의 모든 개미가 이 별자리로서 하늘에 새겨질 수 있도록 인도한다. 삶은 유한한 것이 감히 영원을 담지해내는 이 신비를 향해 흐른다. 그렇게 삶은 사랑 속에서 흐른다.
때문에 "잘 살았다."라는 표현은 "잘 사랑받았다."라는 의미인 셈이다.
이에 따라, 실존상담자는 내담자의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또는 내담자의 삶을 변화시켜주는 이도 아닐 뿐더러, 내담자에게 사랑을 제공해주는 이도 아닌 것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존상담자는 다만 그 자신이 사랑 속에 있는 것처럼, 내담자 역시도 사랑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이일 뿐이다. 똑같이 물 속에 있을 뿐인 이가, 다른 이에게 물을 제공해주는 주체처럼 행세한다는 것은 애초에 성립도 안되는 일이다.
따라서 실존상담자는 상담장면에서 사랑의 시혜자처럼 봉사하는 이가 아니라, 그의 삶 자체에서 다만 잘 살아가는 이다. 잘 살아간다는 것이, 곧 잘 사랑받는다는 것인 까닭이다. 그리고 또한 잘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드러내주는 개미로서의 면모를 잘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유한성을, 곧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이가, 이미 그것들 속에서 사랑받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의미다. 곧,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자신이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대상으로서의 다른 이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삶과만 관계된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예술가와 예술의 관계와도 같다.
예술가가 예술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그가 예술로부터 사랑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연결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 둘은 서로에게 점점 더 근접해가며, 결국에는 예술가 자신이 예술로서 드러나게 된다.
인간이 곧 예술이라는 사실이 개방된다.
울고, 웃고, 화내고, 놀라워하는 인간의 모든 면모가 예술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울고, 웃고, 화내고, 놀라워하던 인간은, 그 생동감 넘치는 예술적 표현을 통해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고, 또 이미 사랑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잿빛 무기물의 우주에서 차마 불가능할 것만 같던 사랑을 시작한, 그럼으로써 이처럼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수 있는 현실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온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말로 예술이다.
실존상담자는 바로 이 예술로서의 인간을 먼저 그 자신의 삶으로 시작하는 자다.
울 때 울고, 웃을 때 웃고, 화낼 때 화내고, 놀라워할 때 놀라워하며, 바로 그렇게 삶이 안내해준 지금 그곳에서의 자신을 표현해가며, 바로 그 자신으로서 인간 그 자체의 예술성을 증언해내는 자다. 그럼으로써 내담자 또한 이와 같이 이미 온전한 예술로서 감동어린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다.
그래서 이러한 실존상담의 입장에서는, 가장 그 자신이 된다는 것이 가장 인간이 된다는 것이며, 또한 가장 예술적으로 된다는 것이 가장 상담자로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그 자신으로, 또한 가장 예술적으로 되는 방법은, 지엽적인 장면이 아니라 총체적인 삶에서 바로 그렇게 사는 것이다.
이름하여 삶의 예술가, 이것이 실존상담자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