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과 약"
깨달음이라고 불리는 종교적 현상이 있다. 종교심리학의 대가인 윌리엄 제임스는 이를 회심(conversion) 체험이라고 말한다. 종교적인 색채를 거세하고 묘사하자면, 이는 실존 체험, 또는 경외(awe) 체험이라고도 명명된다.
혹자는 다시 이러한 체험을 분류하여, 깨어남의 체험이 있은 뒤 다시 깨달음의 체험이 따른다고도 말하고, 또는 한번 체험한 깨달음의 상태가 수행을 통해 항구적인 구조로 바뀌어 유지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고도 말하며, 또는 깨달음은 진화와 같이 더 높은 수준으로 끝없이 실현되어가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처럼 깨달음에 대해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그 모든 주장들이 시작되는 공통적인 근저에는 반드시 고통의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제임스는 정확한 견해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다른 무엇도 아닌 '고통으로 깨닫는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체험에서 보고되는 대표적인 증언들은, 한 개인이 지금껏 체험해온 가장 큰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곧,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소위 깨달음은 고통이 사라진 상태다. 이를 보다 심리학적인 언어로 묘사하자면, 이러한 상태는 고통이라고 생각되는 강렬한 정동이 해소된 상태다. 곧, 정동이 야기하는 강도 높은 긴장의 상태에서 완벽한 이완의 상태로 전환된 것과 같은 상태다.
그래서 이 상태에 있는 개인은, 모든 걱정거리가 사라진 것처럼 느끼며, 더는 세상을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고,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것과 같은 축복감과 자신이 살아 있다는 온전한 충만감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오랫동안 앓던 병에서 회복된 상태와도 같다. 도저히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고만 생각했는데 기적적으로 회복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표현 그대로, 이러한 상태를 체험하는 개인에게는 기적처럼 느껴진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기적의 약이다.
분명, 깨달음은 약이다.
이 표현은 중요하다.
병이 있기에 약은 비로소 존재한다. 곧, 병으로 말미암아 약은 생겨난다. 이와 같이, 고통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은 생겨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약이 있어서 병이 생겨난다. 실제로 하나의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약이 생겨남에 따라, 해당의 바이러스는 더 강력해진 형태로 다시 출현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추구하고 또 유지하려는 의도가 만들어내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한 암시는 충분히 이루어진 셈이다.
그것은 고통이다. 약을 추구하고 약의 효과를 유지하려 하기에 더 큰 병이 생기는 것처럼, 깨달음을 추구하고 유지하려 하기에 더 큰 고통이 생겨난다.
분명하게, 약의 기적적인 효과를 다시 체험하기 위해, 일부러 병에 걸리려고 하는 일은 코미디다. 그러한 코미디를 마치 인간이 살아야 할 진정한 길인 것처럼 진지하고 엄숙한 태도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욱 코미디다.
그것은 군대 전역날, 위병소 앞을 나서는 그 해방의 감동을 잊지 못해, 다시 군대에 재입대하는 현실과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사실 그보다 더 비극적이다. 왜냐하면, 유기체에게는 역치(threshold)라는 것이 작동하는 까닭이다. 감동도 자극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고 모든 자극은 일정수준에 이르면 더는 반응의 활성화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것이 역치다. 때문에 반응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더 큰 자극이 요해진다.
대한민국의 육군생활 2년으로는 더는 만족하지 못하게 된 개인은, 이제 프랑스 외인부대에 입대하거나, 영국 특수부대에 지원하거나, 또는 아프리카의 용병이 되는 식으로, 더 큰 자극을 스스로에게 부여함으로써 그 긴장되는 자극의 끝에 찾아올 짜릿한 해방의 이완감을 얻기 위해, 바로 그렇게 스스로를 더 큰 고통 속으로 몰아넣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분명하게 고통이라고 하는 자극과, 그 자극의 해소가 야기하는 이완의 쾌락에 대한 중독현상이다. 포르노그라피적인 현실이다. 표면적인 언어로는 대단히 고귀하고 정숙한 현실을 묘사하는 것만 같은, 대다수의 종교적 추구 내지 영적 추구의 실제가, 이처럼 선정적인 말초신경의 원리에 근거한 현실이라는 사실은 무척이나 반어적이다.
쾌와 불쾌, 곧 쾌락과 고통은 사실 같은 것이다. 그것은 그저 자극일 뿐이다. 실제로 우리의 뇌는 쾌와 불쾌를 단지 자극으로만 동일하게 받아들인다. 그 전까지는 병을 앓으며 자극을 단지 불쾌한 것으로만 체험하던 개인이, 그 병이 해소됨에 따라 이제 자극을 쾌한 것으로 체험하게 되면서 그 쾌한 자극만을 더욱더 소비하고자 하는 현실이, 바로 깨달음을 추구하고 또 유지하려고 하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 현실은 단지 자극을 소비하고자 하는 현실인 까닭에, 불쾌한 자극은 언제라도 다시 또 그 개인의 삶으로 기꺼이 유입되며, 이를 다시 쾌한 자극으로 바꾸려는 마스터베이션의 방법론 또한 끊임없이 시도된다. 쾌와 불쾌의 끝없는 자극의 연쇄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 자극의 연쇄는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이다. 삶은 우리에게 자극을 제공하는 사건들의 연쇄인 까닭이다. 여기에서는 오로지 그 과도함만이 문제가 된다. 과잉은 결핍을 낳는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더 과도한 자극을 추구하다 보면 이제 불감증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과도한 종교적 추구 내지 영적 추구 속에 있는 개인은, 그 추구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행위 속에서만 자극을 체험하게 될 뿐, 일상의 소소한 자극들에는 더욱더 둔감해지게 된다. 때문에 일상의 삶에서는 늘 무감동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는 성적 불감증이 생겨나는 기제와 완벽하게 동일하다. 마약의 짜릿함에 중독된 상태와도 같다.
이러한 상태 속에서는, 점점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며, 일상이 아닌 저 먼 곳의 현실, 하늘에 붕붕 뜨는 것만 같은 저 먼 상태의 현실을, 오히려 진정한 현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소위, 뇌가 만들어내는 자극-반응의 현실을 진정한 현실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뇌 속에 갇힌 자폐적 현실은 출현한다.
이 뇌 속의 현실은 언제나 동일한 기제로 반복된다. 그것은 바로 '병주고 약주고'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은 언제나 잠정적으로 병을 달고 다녀야 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로 좋은 현실은 무엇인가?
어르신들이 우리에게 늘 하시던 지혜로운 말씀이 있다.
"그저 안 아프고 건강하게만 살면 된다."
병이 없는 현실, 그것이 가장 좋은 현실이다.
역설적인 표현으로서, 병이 없으려면 약이 없으면 된다. 그렇다면, 병에 대한 약으로서의 그러한 깨달음은 없는 것이 가장 좋다. 병에 대한 약으로서의 깨달음은 결코 예찬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병은 고통이다. 그 고통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 여기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개념을 갖고 오는 것은 유익하다. 마음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흔히 상술되는 까닭이다. 이처럼 마음이 고통의 원인이라면, 마음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 이 표현은 중립적인 차원에서 대단히 정확한 표현이다.
깨달음의 주체는 바로 마음인 까닭이다. 우리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깨닫는 것이다. 때문에 그 깨달음의 주체인 마음이 없으면 당연히 깨달음도 없다. 이와는 반대로, 마치 마음이 없어져야 깨달음이 생겨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삶이다. 마음이 없다는 것은 삶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마음이 없어져야 깨달음이 생겨난다고 하는 이들은, 삶이 없어지고 죽어야 깨닫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깨달음은 분명 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다. 그러나 실제 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이들은, 죽기보다는 살기를 바란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도는, 죽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고통없이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이처럼, 죽어야 깨닫는다고 말은 하면서, 실제로는 결코 죽지 않고 살고 싶어하니, 그 의도와 체험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고 어긋나게 된다.
나아가 또 다른 불일치는, 깨달음처럼 묘사되는 특정한 상태를 체험한 이들에게서 일어난다. 그 불일치는, 죽음의 감수성을 통해 특정한 상태를 체험한 이들이, 이제는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자극-반응의 쾌락 원리를 따라 행위하면서, 자신은 여전히 깨달음의 현실 속에 있다고 말하는 바로 그것이다. 곧, 이미 자극-반응의 삶을 살고 있으면서, 또 열렬하게 그 삶을 추구하면서, 자신은 여전히 죽어 있는 상태 속에 있다고 말하는 불일치다.
이 모든 불일치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은, 마음을 병으로 보고 있는 이들이 언제나 불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병이 있어야만 약이 있는데, 그리고 자신은 그 약을 추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은 얻고 싶지 않아 한다. 그러나 병을 얻지 않고는 약을 얻을 방법이 없다. 또한 약을 얻으면 반드시 병이 수반된다. 이 한쌍의 상호적 구조를 무시하는 것이 곧 불일치를 낳는 모든 이유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은 병이다."라는 말을 진리의 언어로 받아들인 까닭에 생겨난 현실이다. 이 언어로 인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언어들을 동원해 그 모순을 해결하려고 하며, 그렇게 깨달음이라고 하는 현상은 더욱더 복잡한 언어게임 속으로 유입된다.
아주 단순하게, 병이 없는 것이, 그럼으로써 약도 없는 것이, 가장 좋은 현실이라고 한다면, 결국 마음이 없는 것이 가장 좋은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삶인 까닭에 우리가 살아 있는 한 도저히 없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불가해한 역설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 또한 단순하게, 마음이 병이라고 하는 잘못된 진리의 언술만 파기하면 된다. 곧, 병으로서의 마음이라고 하는 개념만 없게 하면 된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없다고 하는 의미다. 병으로서의 그러한 마음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마음은 병이 아니다. 곧, 마음은 문제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며, 때문에 해결되어야 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이처럼 마음이 병이 아닐 때, 더는 깨달음이라는 약도 필요하지 않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곧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에 대한 과도한 중독현상으로 몰두해야 할 것이 아니라, 경쾌하게 누려야 할 것이다.
과잉이 결핍을 낳듯, 결핍 또한 과잉을 낳는다. 그동안 마음을 병이라고 생각하며, 그 병을 앓는 현실처럼 체험해온 이들은, 자신들이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곧, 삶에 대한 결핍감을 갖는다. 때문에 그들이 특정한 상태를 체험함으로써 그 병이 해소된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을 때, 그동안 못누린 삶에 대한 추구가 그 결핍감의 크기만큼이나 열렬하게 과도해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는,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는 일이 금지되었을 때, 그에 대한 결핍이 더욱 과장되게 극화된 형태로 마치 채찍질하듯 불타는 삶에 투신하게 만드는 현실을 낳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 인해 가장 분명해지는 것은, 우리는 이처럼 모두가 다 삶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더욱더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삶을 자연스럽게 누리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한다. 이 또한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마음을, 곧 삶 그 자체를 병이라고 간주하고 있으면, 이는 정말로 답이 안나오는 이야기가 된다. 늘 끝없는 자기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너무나 살고 싶어하면서도, 그 삶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것은 많은 수행자들이 겪는 자기모순의 형식이다.
그러나 다만 마음을 우리가 기쁘게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사는 현실에는 이러한 모순이 없다. 하고 싶은 것을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만큼 하는 데는 그 어떤 모순이 없다. 모순으로 인해 생기는 결핍과 과잉의 역기능적 순환도 없다.
그러한 현실은 이미 깨달아 있는 현실과 같다. 병이 있어서 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약이 주는 결과처럼 이미 건강한 상태로 사는 현실이다.
깨달음을 니체가 말한 정신위생학적인 건강함의 은유로 보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 우리는 병과 같이 제거되어야 할 잘못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우주의 병이 아니다. 때문에 약도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이미 허락되어 이 세계에 존재한다. 곧, 우리는 이미 건강하다.
여기에서 실존이라고 하는 것의 중요성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실존은 이미 우리가 이 세계에 던져져 있음을 말한다. 우리가 그러한 우리 자신을 아무리 잘났다고 평가하든, 못났다고 평가하든 간에, 그 모든 논리와 아무 상관없이, 곧 그 모든 논리에 앞서서 우리는 이미 이 세계에 사실적으로 놓여 있다. 즉, 우리는 이미 그렇게 이 세계에 받아들여져 있다. 만약, 세계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우리는 이처럼 실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미 받아들여진 우리는, 이미 온전한 우리다.
이와 같다.
마음도 우리에게 던져진 것이다. 즉, 우리가 마음을 병처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그 마음이 먼저 우리에게 받아들여졌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마음은 애초 지금처럼 드러난 그 형상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이미 받아들여진 마음은, 이미 온전한 마음이다.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실존은 우리에게, 마음이 병이 아니라고 하는 대단히 중요한 감수성을 제공한다. 이것이 현대의 주요한 종교적 담론들이 늘 실존적 관점에서 출발하고, 또 실존적 이해를 그 근간으로 하는 이유다.
실존은 깨달음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안내한다. 곧, 마음으로 사는 우리가 이미 깨달아 있다는, 이미 온전하다는, 이미 건강하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안내한다.
이러한 실존적 감수성이 취약하거나 부재할 경우, 종교적 현상은 곧잘 구루화 내지 우상화, 또는 중독의 현상, 또는 판타지소설의 창작 현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기나긴 병의 고통에서 해방된 이는, 이제 더는 아프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병을 예찬하는 것은 정말로 어불성설이다. 병으로부터 해방된 뜨거운 감동을 맛보려면, 한번쯤은 다들 병에 걸려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 또한 성립도 안될 이야기다. 그러한 태도가 바로 고행에 대한 추구다.
인간은 아프지 말아야 한다. 건강하게, 이 세상에 소풍온 것처럼 삶의 기쁨을 누리다가, 떠날 때 또한 그가 처음 왔을 때처럼 아름다운 감동을 안고 돌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단 한 가지 사실에만 정직하면 된다.
우리가 병을 앓게 된 그 이유는, 바로 그것을 병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라는 단지 이 사실에만 정직하면 된다.
곧, 우리가 마음으로 사는 우리 자신을 잘못된 존재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잘못된 존재라는 그 존재론적 질병의 고통을 호소해온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잘못된 병이 아니다. 때문에 마음으로 사는 우리 또한 잘못된 병자가 아니다. 역으로도 성립된다. 이미 세계가 허용하고 있는 우리 자신은 잘못된 병자가 아니다. 때문에 우리가 세계 속에서 체험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것 또한 병이 아니다.
그렇게 병이 없으니, 약도 없다. 병으로서의 고통도, 약으로서의 깨달음도,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병주고 약주고'가 아니다. '병없고 약없고'다.
이미 건강하다. 이미 깨달아 있다.
이것이 가장 좋은 실존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