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증과 노출증 너머로"
실존적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곧 개방적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다. 이처럼 개방성(openness)은 실존하는 인간의 핵심적인 속성이다.
그동안 자기라고 믿어져온 하나의 경계를 거듭해서 깨고, 끝없이 그 밖을 향하려는 실존의 궤적이 의도하는 것은 결국 만남(encounter)이다. 그렇다면 개방성은 결국 이 만남에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만남이 만남으로 성립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바로 상호성이다. 상호적이어야만 우리는 그것을 만남이라고 부를 수 있다. 만남이 아닌 일방적인 것, 그것을 우리는 소외라고 부른다. 상호적인 만남 속에서만 인간은 함께 인간으로서 드러날 수 있으며, 일방적인 소외 속에서 인간은 반드시 도구가 된다. 마르틴 부버는, 전자를 '나-너' 관계로, 후자를 '나-그것' 관계로 잘 묘사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상호성이 곧 개방성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개방성은 혼자 개방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개방하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함께 개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니체가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여,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기억하라."라고 한 말에는, 바로 이 상호적 개방성의 의미가 정확하게 담겨 있다.
보려는 자는, 반드시 보이게 된다.
이것은 만남의 황금률이다.
그러나 이 상호적인 황금률을 무시하려는, 일방적인 마이더스의 손의 의지가 곧 만남을 소외시키는 두 양상을 낳게 된다. 그것은 바로 관음증과 노출증이다.
먼저 관음증이란, 자신은 보이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자신만이 세계를 보려고 하는 것이다. 안전에 경도된 인식론적 주체가 갖는 의지다.
이는 아주 쉽게 말해서, 우리가 포커 게임을 한다고 할 때, 자신의 패는 결코 보여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패만 보려고 하는 모습과 같다. 실제로 그러한 의지를 실행에 옮겨 보면, 우리의 자세는 요상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러한 관음증의 의지는 요상한 것들을 불러오게 된다. 사이비심리학, 점성술, 마법, 초능력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것들은 모두 자신의 것은 유지한 채, 남의 것만 얻으려고 하는 일방통행의 논리를 대변한다.
곧, 관음증은, 자신을 세계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자신은 세계로부터 영향받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자신만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상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의지가 만드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관음증은 세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 까닭에, 늘 흐르는 세계의 순환으로부터도 물러서 있다. 때문에 그 순환에 일조하지 못하며, 필연적으로 그 순환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스스로가 만든 소외가, 스스로를 소외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의 순환과 연결되지 못하고 막힌 까닭에, 삶도 막히게 된다. 고인 늪과도 같다.
늪이 깊게 고이면 썩어서 가스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 가스의 분출이 이루어진다.
이 분출이 바로 노출증이다.
순환하지 않는 것은, 개방되지 않은 것이다. 개방은 언제나 상호적이기에 반드시 자기개방을 포함한다. 그리고 순환은 이 자기개방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관음증은 이 자기개방의 가능성을 애초 거세하고, 또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구조를 스스로 간절히 작동시키고 있기에, 관음증의 의지 속에서 언제나 이 자기개방의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억압되게 된다.
억압은 죽음의 징조다. 이처럼 억압됨으로써 죽음을 향하게 된 모든 것은 살기 위해 분출을 꿈꾼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무작정 자신을 노출하게 되는 것이다. 살기 위한 필사다.
이와 같이, 자기개방을 억압하는 관음증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위험하게 분출하는 노출증이 생겨나는 셈이다. 곧, 자신의 안전을 과도하게 추구한 결과 자신을 죽이게 되는 모순적 상태가 만들어지며, 때문에 그 반대편에서 그러한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안전을 과도하게 포기하는 또 다른 모순적 상태가 생겨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관음증과 노출증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곧, 함께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관음증이 상대의 패를 일방적으로 보고자 하는 의지라면, 노출증은 자신의 패를 일방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둘은 똑같이 폭력적이다. 타자를 보거나, 보여주는 도구적 대상으로만 삼는 행위들이다.
때문에 관음증과 노출증은 공통적인 태도를 갖는다. 그것은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다. 우리는 원래 도구와는 대화하지 않는다. 도구는 다만 그 도구로 인한 유익을 우리에게 제공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상정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타자의 도구적 대상화가 이루어짐으로써 대화의 가능성이 단절될 때, 그에 대해 가장 큰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우리 자신이 알려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말로 알기를 바라는 것이다. 곧, 우리는 온전한 자기개방을 소망한다. 그리고 이 자기개방의 장이 바로 만남이며, 그 방법이 바로 대화다. 이처럼 우리는 만남의 대화 속에서만 자기개방을 정당하게 이룰 수 있다.
때문에 애초 자기개방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관음증이나, 자기개방을 폭력적으로 남용하는 노출증 속에서는 결핍감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를 정당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그리고 표현된 자기가 온전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바로 자기에의 결핍감이다.
우리 자신이 알려지기를 바라고, 또 알기를 바란다는 것은, 아주 쉽게는 바로 '나'를 발견하고 싶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나'라고 하는 것은, 키르케고르가 묘사한 주체성의 다른 이름이다.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실감하며 살아가는 그 모습이다.
그래서 관음증과 노출증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자기가 상실되는 문제에 봉착한다. 타자를 도구화하면 할수록, 자기는 더욱 빠르게 상실된다. 아주 단순한 예로, 계속 상대의 패만 일방적으로 보려 한다든가, 또는 자신의 패를 일방적으로 보여주려 하는 이와는, 누구도 같은 테이블에 앉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며, 그로 인해 그는 자기라고 하는 것을 비추어줄 상대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해될 수 있는, 관음증과 노출등에 대한 놀라운 역설은, 이러한 상태 속에 있는 이들은 사실 타자에 대해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물애호증과도 같다. 이를테면, 자신이 소유한 도자기가 유일하게 자신의 인생을 가치있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며, 그 도자기에 대해 광적으로 집착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이들에게 있어, 타자는 상대가 아닌 대상이다. 이 두 개념의 차이는 거울과 자판기의 차이다. 이들은 타자를, 자기를 비추어주는 놀라운 거울로서 간주하기보다는, 버튼만 누르면 자기라고 하는 것을 사용자에게 제공해야 하는 의무를 가진 자판기로서 간주한다. 그리고는 자기라고 하는 것을 이 세상에게 유일하게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은 이 자판기의 가치에 스스로 사로잡힌다.
이러한 일이 생겨나는 이유는, 관음증과 노출증의 주체들에게 주체성이 결여된 까닭이다. 곧, 자기가 부재하거나 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타자에게 과도한 중요성을 갖고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의 도구적 대상화, 곧 타자에 대한 가장 큰 폭력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상실의 절박함으로 인해 생겨난다.
그렇다면, 이 관음증과 노출증의 주체들에게 왜 자기개방이 불가능한 것이 되었는지에 대한 그 이유도 선명해진다.
그들은 애초에 자기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개방할 수 있는 자기 또한 없는 것이다.
바로 이처럼 자기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근본적인 수치심의 이유다.
이 수치심이,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 만큼 비루한 자신의 패를 결코 보여주지 않은 채 상대의 패만 획득하려는 관음증을 낳는 것이며, 동시에, 그래도 있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인정을 억지로 받아내기 위해 상대에게 자신의 패를 강압적으로 들이미는 노출증을 낳는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이 관음증과 노출증은, 부재하는 자기 존재의 수치심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수치스러워질 수 있는 상황을 최대한 회피함으로써 자신을 비정상적인 것처럼 만드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려는 표현이며, 다른 하나는 수치스러워질 수 있는 상황을 더 많이 경험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정상적인 것처럼 만들어 수치심을 극복하려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 두 표현은 하나의 귀결만을 향하는데, 그것은 단지 수치심의 강화다. 수치심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의지도, 수치심으로부터 승리하고자 하는 의지도, 다만 이전보다 더욱더 커진 수치심만을 낳을 뿐이다.
이것은 단순하다. 이것은 수치심과의 전쟁인 까닭이다.
전쟁에서 도망치고자 하든, 전쟁에서 이기고자 하든 간에, 전쟁은 계속된다. 전쟁을 멈추려는 의도가 전면으로 마주해서 응답되지 않는 이상, 도피와 승리의 논리는 단지 전쟁을 지속시키는 기제로만 작동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전쟁을 멈추는 일이다. 그리고 서로 대립하던 것이 만나질 때 전쟁은 멎는다. 곧, 만남은 전쟁을 종식한다. 우리가 상호적인 개방성 속에 있을 때, 그럼으로써 서로가 주체성으로 마주서서 대화할 때, 비로소 정전의 가능성은 발견된다.
그래서 자기개방은 언제나 이 모든 지난한 전쟁의 비극을 끝내고자 내미는 첫 손길이다.
이처럼 우리가 내미는 첫 손길은, 언제나 빈 손이다.
어떠한 도구도 쥐고 있지 않은 빈 손이다. 또한 어떠한 자기도 쥐고 있지 않은 빈 손이다.
관음증과 노출증의 주체들뿐만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라고 하는 것을 그 자신의 손에 쥐고 있지 않다. 자기라고 하는 삶의 의미는 오직 상호적인 만남 속에서만 발견된다.
이처럼 애초에 자기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만남으로 사는 것이 곧 주체성이다. 이것은 주체성의 가장 심오한 역설이다.
때문에 자기개방은 언제나, 없는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곧, 자기의 없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개방할 수 있는 자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을 개방하는 것이다.
우리의 착각은, 곧 관음증과 노출증을 낳은 그 근본적인 착각은, 그럴듯한 자기가 있어야만 우리가 수치스럽지 않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다. 수치심의 이유라고 믿어져온, 바로 그렇게 없는 그 자기를 개방하여 내미는 것이, 자기의 그 없음을 개방하여 내미는 것이, 정말로 수치심의 전쟁을 끝내는 길이다.
그것은 다시 한 번, 바로 빈 손을 내미는 것이다.
거기에는 없지만 있다.
바로 손 그 자체가 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가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 그 손이 있다.
그렇게 전쟁의 국경 너머로, 삶의 살아 있는 증거로서 내밀어진 그 손을 마주하여 내밀어진 또 하나의 손이 있다. 타자의 손이 있다. 상대의 손이 있다. 거울처럼 서로를 향해 함께 내밀어진 빈 손이 있다.
우리가 각자 다르면서도 함께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가, 그 삶의 정직하고 아련한 의미들이, 두 빈 손이 서로를 맞잡는 속에서 찬연하게 개방된다. 서로의 손에 새겨져, 이제 서로의 손에 안긴 삶의 주름들이, 그처럼 서로의 손에 의해 다정하게 음미될 때, 그것은 신성한 증언이 된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서로가 서로에게 알려지는, 그럼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하게 받아들여지는 성소가 된다.
그렇게 전장은 동산이 된다.
그렇게 서로는 자기가 된다.
이처럼 개방성의 가장 정확한 의미는, 삶의 개방이다. 우리가 어떤 누구인가를 개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개방하는 것이다. 자기의 없음으로서, 삶의 있음을 개방하는 것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기를 개방한다는 것은, 곧 자기의 없음을 개방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개방한다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우리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따라온 그 궤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삶은, 우리가 사랑해온 흔적들이다.
우리의 빈 손에 새겨진 것은, 바로 우리의 사랑이다.
곧, 빈 손은 그 자체로 사랑의 증명이다.
때문에 개방성이란, 우리가 아무 것도 없지만, 이처럼 사랑할 수 있었고, 또 사랑해온 이들이라는 사실에 개방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럴듯한 자기를 갖고 있지 않은 채, 다만 살았을 뿐이었다. 곧, 다만 사랑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자기의 없음은, 삶의 있음이었고, 그래서 사랑의 있음이었다.
그리고 사랑은 이제, 그 자신 안에서 있게 한다.
"자기야."라고 부르며 자기를 있게 한다.
이처럼 자기의 없음에 대한 개방이, 만남의 사랑을 개방하며, 그 사랑을 통해 비로소 자기의 있음을 개방한다. 없는데 있는 것이고, 없어서 있는 것이다. 개방된 삶은 신묘하다.
때문에 우리가 최후에 신뢰해야 할 것은 바로 삶이다. 한 개인의 삶은 언제나 그 자신을 개방시키는 쪽으로 반드시 흐르게 되는 까닭이다. 전술한 것처럼, 이것은 실존의 핵심적인 속성이다.
이 말은, 실존은, 우리가 이미 사랑해왔고, 그리고 더욱 사랑해갈 것이며, 결국에는 그 사랑이 우리 자신을 구원하리라는 바로 그 의미라는 것이다.
곧, 실존은 사랑에의 개방성이다.
이것은 개방성의 가장 아름다운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