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주인
미혼모였던 여성과, 아내가 자식을 놓아두고 도망간 남성이 만나, 다시 자식 하나를 낳고 가족을 이룬다. 그러한 순간이 있었다.
그렇게, 죽지 못해 사는 아내와, 죽고 싶어 사는 남편과, 죽음이 섬세하게 만든 아이와, 죽음에 반항하는 아이와, 죽음을 모른 척 하는 아이가 만나 가족을 이루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죽고 싶어 사는 이가 끝내 죽게 된 뒤, 모두는 죽음을 빠르게 소외시켜갔다. 그럼으로써 죽음으로부터 비로소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도 돌아볼 여유가 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만 갔고,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던 모습은 남들만큼도 못한 모습으로, 병신으로 보지 말라던 모습은 정확하게 병신같은 모습으로 드러날 뿐이었다.
죽음을 가장 모른 척 하던 이 또한, 그렇게 필연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죽음이 찾아 왔다.
사람이 정말로 죽게 될 때는 그 기억이 잊혀질 때다. 망각이 곧 죽음이다. 수술로 인해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을 잃게 될 상황에 놓인 이는 그래서 비디오카메라로 촬영을 한다. 잊혀지지 않을 수 있도록, 곧 죽지 않을 수 있도록, 자기를 자기로 만들어준 주변의 것들을 모두 기록에 담아내고자 한다.
기록은 다시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기억한다는 것은, 다시 산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억은 망각 속에서 죽어 있던 모든 것을 다시 살려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생생하게 부활시킨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고운 그 얼굴과, 남들처럼이 아니라 남들과는 독보적으로 달랐던 그 섬세함과, 병신같지만 멋있던 그 몸짓을, 지금껏 완전히 매몰되어 있던 그 작지만 영롱한 광채들을 모조리 다 되살려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바로 그렇게 기억하고자 하는 그 시선의 주인 또한 되살려낸다.
"하얀 눈이 와서 세상이 아름답다. 그 눈을 바라보는 내 눈은 더 아름답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가장 모른 척 하고 있던 막내 아들은 아버지가 대체 누구였는지를, 그리고 그러한 아버지의 아들인 자신이 대체 누구인지를, 그 자신의 삶으로 발견해낸다.
가족들은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어여쁘게 담긴 옛 사진들을 바라보면서, 막내아들은 그 사진들을 찍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지금 비디오카메라로 가족들의 모습을 찍고 있는 자신의 마음과 같다는 사실을 이내 조우한다.
어여쁜 사진은 동시에 그 사진을 찍은 이의 어여쁜 마음이다.
마음은 사랑하는 것들을 향함으로써 시선이 되고, 시선은 사랑하는 것들을 다시 마음에 담는다. 그렇게 시선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기 위해 그것을 마음의 앨범에 기록한다. 우리는 이를 기억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기억이라도,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는 한, 거기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다.
왜냐하면, 지금 그것을 기억하고자 하는 바로 그 시선이 사랑인 까닭이다. 그 시선이 사랑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다시 기억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지금 이순간에만 있다. 시선은 언제나 지금 바라보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의 시선이 다른 모든 소외된 순간을 향해, 그 순간들을 사랑으로 구원해내고, 그로 말미암아 다시 지금 이순간의 소외를 구원해내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 이순간 사랑하고 있는 이가, 지금 이순간 사랑받는 이가 된다. 이것이 사랑의 궤적이다.
순간은 불가피하게 망각되는 것이다. 순식간에 흘러가버리고 마는 것이다. 삶의 성질이 그러하다. 그렇게 삶은 망각이라고 하는 죽음과 늘 함께 있다. 사실 그 둘은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한순간 기억할 때는 삶이라고, 영 기억하지 못할 때는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이 말은, 삶과 죽음이, 기억과 망각이, 그리고 사랑과 소외가, 함께 서로를 촉발시키는 한 쌍이라는 의미다. 죽음이 의식될 때 삶은 생생해지고, 망각 속에서 기억은 빛나며, 소외를 향해 사랑은 움직인다.
삶은 우리가 기억하지 않을 때도 이미 흐르고 있다. 곧, 죽음으로서 이미 흐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을 통해, 곧 사랑을 통해, 그것을 죽음으로부터 건져내 다시금 삶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언제나, 다시 산다는 것이다.
이 말에 따라, 사랑한다는 것 또한 언제나, 다시 사랑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사랑에는 늘 다음과 같은 관용구가 동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모든 조건과 아무 관계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다시 살려낸다. 다 살아나게 한다.
죽고 싶어 사는 이가 꿈꾸던 소망은 다시 사는 것이었다. 다시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랑을 다시 찾고 싶어서 그는 망각 속으로 잠겨든다. 그리고 그 깊은 망각 속으로, 시공을 넘어와 사랑이 그를 깨운다. 되살린다. 그에게 사랑을 회복시켜준다. 이처럼 사랑에 무능력한 존재에서 사랑할 수 있었던 존재로 그의 위상이 회복됨에 따라, 그의 가족들 또한 사랑받을 수 있었던 존재로 그 위상이 함께 회복된다.
이것이 다시 기억하고자 하는 이가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자 하는 이가 하는 일이다. 곧, 시선의 주인이 하는 일이다.
아무리 깜깜한 곳이라도, 아무리 깜깜한 순간이라도, 그것이 깜깜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이에 의해 빛은 밝혀진다. 그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그의 작은 눈동자가 바로 그 빛의 정체다. 사랑을 시작한 이의 시선이, 그 작은 빛이, 그래서 언제나 가장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