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인간 #1

"가장 새로운 인간, 가장 오랜 인간"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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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지성을 중심으로 삼아 '똑똑한 인간(Homo Sapiens)'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채택해왔던 시절이 있었다. 한때는 빛났지만 이제는 퇴색해버린 그 계절들. 잿빛이다. 먹구름이 가득 낀 저 하늘의 무게처럼 우울하기만 하다.


그렇게 앞길이 보이지 않기에 계속 가상의 적을 찾아 헤매며, 분열과 혐오의 음모론에 빠져, 더 많은 것들을 증오하고 적대하기만 한다. 영양수준이 높아져 남아돌게 된 에너지를 자신의 미래를 향해 쓸 수 없기에 섀도우복싱에만 전념하고 있는 상태와도 같을 것이다.


아주 일상적인 예로, 자신의 삶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많은 이들은 자식을 낳으려 하곤 한다. 막혀서 정체된 에너지를 이제 양육에 투여할 수 있는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삶의 정체가 해소될 것이라 기대하며.


오늘날 우리가 인공지능을 가열차게 키우려 하는 일은 이와 같이 우리가 절대적으로 의존해온 지성이 정말로 한계에 부딪혔음을 시사한다. 또 한편으로 인공지능의 발전은 지성에게 분명한 한계의 자각을 제공한다. 어지간한 개인의 지성보다 이제 인공지능이 더 똑똑하다.


그렇게 지성이라는 것이 인간보다 인공지능에게 더 우월한 영토가 되었다면, 인간이 자신의 존재근거를 지성에서 찾아야 할 이유가 더는 있을까? 오히려 인간만의 고유성이 확보되는 진짜 '인간의 자리'를 탐색하는 일이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는 더욱 필요한 일이 아닐까?


다행히도 인지과학자들은 일찌감치 그 탐구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인지과학의 성과로 인해 근대의 철학들이 말해온 인간의 정신구조에 대한 여러 환상들을 해체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그것들에 의존해 자신의 자리를 잘못 설정해온 그 착각과 오해들을 해지하며, 새로운 인간의 자리를 발견하는 일에 눈뜨게 된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잘 알려진 책 제목처럼, 그렇게 인간은 이제 지성이라는 낡고 지루한 영토에서 벗어나 새롭고 자유로운 인간의 영토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영토의 이름은 바로 '느낌'이다.


호모 센티엔스(Homo sentience), 인간은 '느끼는 인간'으로서 인간존재다.


우리는 이를 '느낌인간'이라고 명명해볼 것이다.


이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지성과 이원적으로 대조되는 모종의 감정이나 정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육체와 이원적인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의 정신이라는 것의 한 구성물도 아니다.


우리가 이제 느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삶의 총체적 감각을 가리킨다. 분열되지 않았고, 분열될 수도 없는, 그렇게 통합이라는 건방진 말 따위가 애초 필요치 않은, 가장 온전한 인간의 존재방식이 곧 느낌이다.


이 느낌은 내 안에 있는 모종의 소아적 마음을 느끼는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를테면 "아, 내 안에 우울이 있었구나. 신체적으로 우울이 이렇게 경험되는구나. 이 우울을 내가 잘 품고 만나서 느껴야겠다."라고 하는 것은 그저 생각이며, 또 그 생각에 의해 창출된 정서에 불과하다.


생각, 감정, 정서와 같은 것들은 느낌이 온전성을 잃고 분열된 형태다. 지성이 그 분열의 일을 총괄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행한 최고의 분열은 삶으로부터 그 자신을 분리시킨 분열이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마치 삶의 외부적 관찰자라도 되는 듯이, 삶의 바깥에서 삶을 통제하려는 일을 시도하려 했다.


실존주의는 두말할 것 없이 이러한 삶의 분열을 치유하고자 한 대표적 전통이다. 지성이 아닌, 그렇다고 지성이 편집해낸 정서도 아닌, 다만 순수하고 본원적인 어떤 느낌의 실재에 대해 실존주의는 일찌감치 포착하고 있었으며, 바로 그 느낌으로 사는 인간의 섬세하고 자유로운 모습을 노래했다.


오늘날에는 실존주의, 그리고 그 실천론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학은 전술한 인지과학에 의해 전폭적으로 지지받는다. 실존주의의 아버지인 키르케고르가 "진리는 주관성 속에만 존재한다."라고 말한 그 표현은 인지과학에서 동일한 의미로 다시 발화된다.


근대적 통속성에 빠진 이들이 실존주의를 오해한 방식처럼, 실존주의와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주관성은 주관성 대 객관성이라는 구도 위에서의 한 축이 아니다. 애초에 그러한 이분법적 구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우리의 삶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삶은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인 어떤 상대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고유한 절대성의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절대주관이라고 불리곤 한다.


흔히 주관성 대 객관성의 구도에서, 주관적인 것은 덜 지성적인 수준을 뜻하고, 객관적인 것이 더 우월한 지적 가치를 담보하는 것처럼 생각되게 만든 것은 바로 지성을 우상처럼 숭배하던 인간의 옛습관이다. 나아가 주관적인 것은 이기적인 것이며, 객관적인 것이 공동체를 위해 바람직한 것인 양 평가되었던 일 또한 지성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자 했던 저열한 정치적 의도다.


삶이 절대주관이라는 것을 이해한 이는 더는 외부의 상대적인 것들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권력증진의 장치로서 마치 그것들이 위대한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양 꾸며내어 사람들을 그 아래 복속시켰던 무수한 정치적 이념들이 무너져내린다. 모든 것을 정치화시키고자 하는 권력욕의 주체들은 이러한 상황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지성이라고 하는 환상을 붙잡고, 객관적 지성에 근거한 윤리라고 하는 기제로 자기 자신들을 더욱 자발적으로 자기세뇌시키기를 원한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지성중심주의의 세력들, 정치화의 세력들, 또 권력욕의 세력들에게 늘 공격을 받아왔다. 콜린 윌슨과 같은 이는 아예 이렇게도 말한다. 참된 실존주의는 정치의 가장 반대편을 향한다고. 이 말은, 실존주의의 방향성은 상대성이 아닌 절대성을 향해 있다는 뜻이다.


느낌인간이 바로 그러한 실존주의적 인간존재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대체불가능하다는 것.


고로 여타의 가치들에 의해 환원되거나, 소외되거나, 억압될 수 없다는 것.


살아있는 인간이 그 자신을 가장 귀한 것으로 바로 이해하고자 했던 시선이 지금 이곳에 출현한 것이다.


상대적인 관계의 최종판인 정치는 자기가 이러한 인간의 위상을 회복시켜줄 수 있다고 너무나 긴 시간 동안 사람들을 속여왔다. 애초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해온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상대적인 것으로는 결코 절대적인 것을 얻을 수 없다.


스스로 귀한 인간의 그 절대적 위상은 오직 절대적인 것으로만 얻을 수 있다.


바로 느낌으로만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삶 그 자체인 이 느낌이야말로 우리가 실증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기에.


내 자신은 느낌을 느끼는가? 그렇지 않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불필요한 말이다. 성립조차 어색한 말이다. '내 자신'과 '느낌'과 '느낀다'는 애초 다 동일한 것이다. 느껴야 할 어떤 상대적 대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느낄 수 있는 어떤 상대적 주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그 자체로 통째의 것이다. 상대적으로 분열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아주 거대하게 비유하자면, 우리가 어떤 것을 느낀다고 하는 것은 지금 우주가 우주 자신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니, 지금 이것이 이 우주 전체의 느낌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비유가 아니라 직설이라면 어떻겠는가?


느낌인간은 이처럼 기적같이 엄청난 현실을 살아간다.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그 자신을 아주 거대한 존재로 거듭 발견해가며, 스스로에게 깊이 감동받는다. 삶이 이 감동들의 연쇄라는 사실은 아주 빠르게 그의 현실의 중추를 형성하게 되며, 그는 자신이 느낀 그 감동이 바로 그 자신이라는 사실 또한 이해하게 된다. 태어나서 감동인 존재,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렇게 알아보게 될 나날들은 얼마나 멋진 시간들일까?


과거 예수나 붓다와 같은 종교적 선각자들이 말했던 현실은 바로 이 느낌인간의 현실일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새로운 인간의 자화상에 대한 묘사인 동시에, 실은 가장 유구하며 본원적인 오랜 인간성에 대한 묘사다. 우리는 우리의 시원을 다시 찾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상대적 소재들에 의해 고통받지 않았던, 다만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인 채로 아무 부족함없이 온전했던 그 시절을. 그 빛나던 계절을. 생생한 빛으로 가득차 있던.


그런 느낌이 이제 우리, 느낌인간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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