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아니다"
아니고, 아니고, 아닌 것이 있다면 그것이 관계다. 관계는 가장 아닌 것이다. 가장 아니면서 가장 맞는 척하는 것이다.
관계를 활용해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관계를 잘해감으로써 인기와 명예, 권력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능력자가 되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관계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노련히 연기해 시대의 큰어른처럼 보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상대적인 일을 아무리 성공적으로 해나간다 해도, 절대적인 삶에 속한 자기 자신은 단 1mm도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관계가 만드는 것은 이야기다. 우리는 삶을 이야기로 착각하도록 교육받아왔다. 우리로 하여금 삶의 절대성을 망각하고 관계가 만드는 이야기에 몰두하게 하려는 권력적 의도들이 작용한 결과다.
상대적인 관계가 만드는 것은 상대적인 이야기. 그러니 이야기에 빠져사는 동안 우리는 상대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인 존재의 특징은 무엇인가? 무엇을 하든, 또 그것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하든 간에, 언제나 부족함과 공허함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해도 상대적인 영토 위에서는 분열된 상대적인 것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영영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생겨난다. 충만한 온전함 같은 것은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적 철학개념인 것처럼만 오해되기에 딱 좋다.
인간은 왜 그동안 자기 자신을 못나고 부족한 존재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는가?
여기에 그 정확한 답이 있다. 상대적인 관계에, 그리고 그 관계가 만드는 상대적인 이야기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더 좋은 이야기로 바꾸면 자기 자신이 괜찮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류의 내용을 다루는 자기계발서들은 지금도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 이야기를 아무리 더 좋은 상대적 이야기로 바꾸어봤자 결핍은 사라지지 않는다.
근대적 사유에 물든 혹자들은, 대립하고 있는 상대적인 것과의 대화를 통해 그것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해나가며 인간은 발전하고 또 진보한다고도 말한다. 즉, 통합의 의미다. 통합은 관계의 가장 큰 속임수다. 그 실제적인 내용은 상대적인 협상을 통한 상호환원일 뿐이며, 그렇게 하향평준화로 이루어진 통합체는 곧이어 또 다른 상대적인 것을 그 반대편에 두게 되는 결과를 맞을 뿐이다. 점점 더 아래로만 파들어가며 영영 끝나지 않을 삽질처럼.
이러한 관계의 방식으로 우리가 우리 존재의 온전함을 획득하려는 시도는 인류의 역사상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미 힌트가 주어졌다.
"관계는 거울이다."
이것은 현대의 심리상담론들이 제공하는 아주 중요한 통찰이다.
관계는 실은 거울일 뿐이다. 그런데 그 거울상을 실체로 믿으며 우리는 상대적인 현실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나아가 그 거울에 비친 상과 씨름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그 상대적 현실은 마치 실재인 것처럼 공고화된다. 착각의 매트릭스가 구현된 것이다.
우리가 관계에서 하는 그 모든 일을 돌이켜보자. 이것은 실증적이다.
우리는 관계의 대상을 변화시키려 한다. 선한 영향력이라는 미명하에 어떻게든 자신의 능력과 자원을 통해 관계의 대상에게 영향력을 끼치려 하는 일이 우리가 관계에서 하는 전부다.
그렇게 자기의 생각대로 관계의 대상이 변화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상대를 변화시키는 일에 성공하면 자신도 행복한 존재의 상태로 변화될 것이라고 열렬히 신앙한다. 그렇지 않은가? 이 믿음은 지구상에 출현했던 그 어느 종교에 대한 신앙보다도 굳건하다. '관계교'의 위세는 흔들림이 없다.
그러나 관계가 거울이라고 할 때, 이 일은 정말로 가능한 일이었는가?
거울에 비치는 것은 결국 거울을 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그런데 거울을 아무리 변화시킨다 한들 거울을 보는 이의 모습이 변화하겠는가? 거울 위에 색칠을 해서 거울에 비친 상을 예쁘게 꾸며준다 해도, 거울을 보고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이 그 모습대로 변화할 수 있는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한 일을 계속 시도하려고 하면 우울증이 온다.
자기의 얼굴이 비치는 거울 위에 정교하게 위치를 잘 맞추어서 화장품을 칠한 뒤 "와, 예쁘게 변화되었다."라고 하는 이가 있다. 그런 이는 이제 움직일 수가 없게 된다. 움직이면 화장이 색칠된 위치와 얼굴이 어긋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석고상처럼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늘 고정되어 경직된 모습을 지속해야 한다. 이런 것이 바로 우울증이다. 삶이 정지되어 그 활력을 잃고 늪처럼 침체된 상태다.
우리는 관계의 논법으로 언제나 관계의 상대에게 이와 같은 일을 요구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상대가 영원히 석고상처럼 굳어 있기를 주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동일한 모습으로 함께 굳어진다. 관계 속에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이러한 잠정적 우울증의 상태에 노출되어 있다.
더 비극적인 것은, 관계로 인해 필연적으로 우울해진 이들이 그 이유를 관계의 상대에게 돌리며 재차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 요구가 마치 상대로 인해 상처받고 피해입은 자기의 정당한 권리라도 된다는 것처럼 더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거울 앞에 선 어떤 이가 거울에게 제발 바뀌라며, 거울에 매달려 집착하고, 거울을 어떻게든 조작하려고 울부짖으며, 거울에게 성내고 원망하는 모습을 떠올려본다면, 이것이 정확하게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 일이다. 비극적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거울에게 투여하고 있는 그 막대한 에너지를 아주 일부분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투여한다면, 거울 위에 덕지덕지 온갖 화장품을 칠할 시간에 자신의 입술이라도 잠깐 칠해본다면, 거울에 비치는 상은 바로 바뀔 것이다.
압도적으로 쉬우면서도, 극적으로 분명하고도 만족스러운 변화의 현실.
느낌인간은 바로 그 현실을 살아간다.
거울을 볼 때 우리에게 어떤 느낌이 찾아든다. 그 느낌은 거울의 것인가, 우리 자신의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느낌인간은 바로 이 방식으로 관계의 세상을 관통해간다. 모든 관계가 거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느낌만을 자신의 것으로 챙긴다. 아니, 그 느낌이 바로 관계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얻는다. 그러니 어떤 거울로도 느낌인간은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 우뚝 세울 수 있다.
또 그가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바꾸고 싶어한다면, 그는 관계의 대상을 붙잡고 씨름하는 대신에, 단순하게 그 자신을 바꿀 것이다. 그러면 거울에는 다른 모습이 비친다. 이러한 방식으로 느낌인간은 거울의 주박에서 벗어난다. 거울에 종속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비추어주는 거울을 즐거움으로 누리며 살게 된다.
이런 것을 관계에서 벗어나 사는 모습이라고 말한다. 관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어디 산 속에 들어가 홀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실체 아닌 허상임을 알고 거기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와 실존주의는 일찌감치 이 관계의 허상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해온 바 있다. 이는 또한 관계가 만든 이야기라고 하는 것의 허상성과 그것으로부터의 자유의 문제를 함께 시사한다.
관계가 인간을 지배한 방식처럼 관계의 자식인 이야기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인간을 지배해왔다. 자신들이 인간을 못나고 부족한 상대적 존재인 것처럼 만들었으면서, 역으로 자신들을 의지하면 인간은 못나고 부족한 존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기만해온 것이 바로 관계와 이야기가 인간을 종속시키려 했던 그 방식이다.
그러나 관계가 거울이라면, 이야기도 거울이다. 거울은 다만 한 순간의 장면을 비출 뿐이다. 그 안에는 과거도 미래도 실은 담겨 있지 않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자기가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마법거울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자신이 비추는 대로만 살아가면 인간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며 가상의 이미지로 인간을 이끌려고 했다.
자신이 채택하고 있던 못나고 부족한 이야기를 선한 영향력을 가진 똑똑한 이야기로 바꾸면 이제 자기 자신이 바뀌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믿던 이것이 이른바 '이야기주술'이다. 거울을 바꾸면 자신이 바뀌리라고 믿는 허망한 소리다.
우리에게는 관계를 잘하는 법, 또 자기의 이야기를 좋은 이야기로 쓰는 법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관계와 이야기라고 하는 상대적인 소재를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착각에서 벗어나, 삶이라고 하는 정말로 절대적인 것으로 돌아오는 일이 필요할 뿐이다. 거듭 말하지만 삶은 관계가 아니고 이야기가 아니다. 삶을 관계이자 이야기라고 우리에게 말해오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다분히 의심해봐야 한다. 그러한 주체가 우리의 힘을 약탈해 자기의 권력으로 삼으려 하는 그 저의를.
느낌, 느낌 얘기를 다시 해보자.
삶 그 자체의 표현인 느낌은 어떤 식으로든 상대화될 수 없다. 느낌은 절대주관성을 갖는다.
우리가 느낌으로 자주 오해하곤 하는 것은 정서다. 정서는 상대적 관계와 상대적 이야기가 유발한다. 특정한 정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관계는 작동하며 이야기는 집필된다. 이러한 차원에서, 정서는 지성을 통한 느낌의 모방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일한 기제로, 우리가 지성을 통해 절대적인 것을 모방해 마치 상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처럼 만들어내는 일을 우상화라고 부른다. 우리 자신의 재미를 위해 만든 것을 진리처럼 숭배하면서, 이제 그것이 우리 삶을 옭아맬 수 있는 힘을 부여하고 있는 이 모습은 인간의 고통사의 대부분의 이유다.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억압하고 괴롭히지 못해 안달난 이처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 자신의 고통은 내 자신이 만든 것." 어느 현인의 통찰은 이 경우 정확하다. 자신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 일을 멈추기만 해도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변화한다.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정말로 이러한 의미다.
느낌이 이 일을 절대적으로 돕는다.
우리 자신이 만든 감옥에 우리가 괴롭게 수감되어 있을 때, 느낌은 반드시 그 탈출구를 향한다. 인간이 만든 어떠한 한계의 벽이라도 그것을 뚫어내는 것이 느낌이다. 진화의 역사는 자유의 역사이며, 생명은 언제나 장벽을 넘어 자유를 향한 길을 기어이 찾아낸다고 하는 '쥬라기 공원'의 명대사를 떠올려보자. 살아있는 생명현상인 느낌의 운동에 대한 정확한 묘사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이 낡은 '호모사피엔스 공원'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맞고, 맞고, 정말로 맞는 것, 허구의 상이 아닌 가장 진짜의 존재로서 느낌인간은 관계의 감옥 바깥으로의 장대한 진격을 시작한다. 인간이 그 자신을 가장 맞는 것으로서 바로 알게 되는 변화, 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변화가 막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