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후의 당신에게"
니체는 100년 후를 위한 철학을 했다. 엄마 같은 관계의 시선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칭찬과 인기를 얻는 모습에, 즉 관계에 기생해서 권력과 명예를 누리는 모습에 초극인(위버멘쉬)이라는 용어를 갖다 붙이라고 그가 철학을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가 또 100년 후를 꿈꾸는 이유는, 모든 언어는 결국 남용되고 화석화될 운명을 필연적으로 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창발되었던 당시 어떻게든 담아내고자 했던 느낌의 생생함을 잃고 그저 문자주의로만 남는다.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포장하기 위해 언어적으로 유사해보이면 여기 걸고 저기 걸곤 하는 조악한 액세서리의 신세로만.
100년 후를 위한 심리학도 그래서 꿈꾸어진다. 심리학이라는 언어 자체가 시작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너무나 늙어버렸기에.
대중주의는 대중이 주체적으로 똑똑해져서 이제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대중이 중심이 되어 향유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개인은 집단이 되면 왜 어리석어지는가? 이것은 사회심리학적 진실이자, 신경생리학적 사실이다. 집단의식, 또는 집단지성, 또는 집단무의식의 힘? 인지과학에서는 우리 뇌가 결코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린다.
재난이 닥쳤을 때 현대인들은 왜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하는가? 대중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대중의식이라는 것은 스스로 생각한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외부에서 주입된 '보편적으로 가치있는 정보'를 그저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는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보편화의 함정은 개인이 집단의 대다수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스스로 제어하게 만드는 자기억압의 기제가 되며, 결국 개인은 생존을 향한 자신의 느낌을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기민성과 유연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조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가 얼마나 스스로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똑똑한 존재인지를 칭찬하는 것이다. 모든 마케터들, 그리고 사기꾼들은 다 이 지점을 자극한다. 정치인들은 단연 이 방식의 전문가들이다. 자기의 생각대로 대중을 조종하고자 할 때, 그들은 얼마나 이 나라의 국민들이 민도가 높은지, 그래서 어찌나 지혜로운지를 열렬히 칭찬하는 데 여념이 없다. 엄마가 아이를 치과로 데려가고자 획책하는 그 방식으로.
실은 가장 통제되고 있으면서, 대중은 오히려 자기들이 사회의 모든 것에 대한 통제권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은 자기들에게 있으며, 자신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이가 있으면 함께 힘을 모아 적절한 권선징악의 행위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대중이 선이라는 이 발상이 바로 대중독재주의의 출발점이다. 각자 놀라운 개성과 능력을 가진 우리 대중이 어벤져스처럼 힘만 합치면, 태양도 서쪽에서 뜨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 발상은 일진이나 조폭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억울함이 출현한다.
정말 잘난 것은 대중주의의 사회에서는 폄하되고 무시되기 십상이다. 오히려 대중은 매우 자주 못난 것에게 의도적으로 힘을 모아줌으로써 못난 것이 잘난 것처럼 행세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에 힘쓴다. 그래야 자기가 잘난 왕을 만들어내는 킹메이커로서, 즉 '가장 잘난 것'으로서 군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콜린 윌슨의 명저 『아웃사이더』에서는 일종의 종교적 또 심리학적 천재들이 어떻게 대중적 의지로부터 소외되어 고통받게 되는가의 과정을 잘 묘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100년 후의 심리학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바로 당신을 위해.
개인으로서의 의식이 이미 온전히 드러나, 반드시 심리학적 천재일 수밖에 없는 바로 그런 당신이 자유롭게 숨쉬고 살 수 있는 그 현실을 위해.
우리는 지금 인간이라는 존재방식이 크게 변화하는 시대의 변곡점 위에 놓여 있다.
관계의 거미줄 위에서 더 많은 대상을 통한 힘과 이득을 취해야만 자기가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던 열등감의 착각에서 깨어나, 스스로 부족하지 않고 완전한 존재라는 명징한 자각 속에서 살아가는 시대가 눈앞이다.
대중독재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그 낡은 방식이 이미 끝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저항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진리화하며 영생을 바라보지만, 실은 이미 사멸이 가까워졌기에 악다구니를 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점점 하위계급으로 권력이 이양되어 하위계급이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역사변증법은 열등감으로 쓴 소설일 뿐이다. 마르크스 그 자신이 그러했듯이. 그것은 자신이 왕이 되기를 꿈꾸기에 생겨난 열등감. 그러한 열등감에서 비롯한 욕망은 결코 이루어질 일이 없다. 모두가 왕이 된 세상을 한번 생각해보라. 거기에서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무슨 변별적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누구도 왕이 아니다.
대중주의는 모두가 왕이 될 수 있다는 이 공허한 착각을 양분으로 삼아 아메바처럼 증식한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다시 분산될 것이다. 그 산개는 신성한 산개. 우리가 다시 개인성을 찾는 일이다. 심리학적 천재로서의 우리 자신의 멋진 모습을.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다. 심리학적 천재. 마음의 달인. 삶의 대가. 또한 이렇게 불러보는 것은 어떠한가?
느낌의 왕.
니체는 스스로 고귀한 귀족적 마음을 말했다. 상대적인 열등감에서 기인한 원한감정에 매달려 평생을 살아가는 노예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귀하게 대하며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을 디오니소스처럼 노래했다. 그 노래의 주요가락은 붓다의 노래와도 겹친다.
100년 후의 우리라면 왜 왕을 말하지 못할 것인가?
그러나 상대적 세계에서의 상대적 지배력을 가진 그런 정치게임의 왕이 아니다.
절대적 느낌의 왕이다.
이 왕은 절대성을 살아가기에 상대적인 대상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 자기통제 및 억압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느낌의 왕은 지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지배되지도 않는다. 노예를 부리고자 하는 왕은 역으로 노예에게 매인 또 다른 노예가 된다고 하는, 저 유명한 헤겔의 '노예의 변증법'은 그에게 적용되는 기제가 결코 아니다. 아니, 변증법이라고 하는 대립되는 대상을 상정한 관계의 구조 자체가 이 느낌의 왕에게는 성립되지 않는다.
언제까지 근대적 사유를 진리처럼 숭배하며 변증법 얘기나 하고 있을 것인가. 반대되는 적을 통해 우리 자신이 성장할 수 있다는 가상의 언어규칙을 실재처럼 믿으며 우리 자신의 삶을 그 추상의 거푸집 속에 끼워맞추고만 있을 것인가.
우리 존재의 근본사실인 신체성으로 돌아가보자.
좌뇌와 우뇌는 대립하고 있는가? 그것들은 서로를 변증하고 있는가? 그럼으로써 수려한 정치이론과 같은 연금술적 통합을 기획하고 있는가?
좌뇌와 우뇌는 원래부터 하나다.
그 둘이 아닌 하나로 살아가는 이를 우리는 느낌인간이라고 부른다.
느낌은 대상에서 대상을 향하는 상대적인 기물이 아니다. 그것은 오롯이 존재 그 자체의 존재사건. 생명 그 자체의 감각. 곧 우리 자신 그 자체인 것이다.
때문에 느낌은 반드시 자신을 향해 일어나며, 자신을 위해 일어나는 것. 바로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누리라고 일어나는 것이다. 정말로 살아있는 것으로서 살아있는 우리 존재의 거룩함을 누리라고.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100년 후에는 어떤 개인이라도 당연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나서 경험하게 된 이 모든 좋은 것을, 정말로 좋은 것으로서 순수하게 경험하기 위해, 바로 느끼기 위해 내 자신은 태어났노라고.
세상 모든 좋은 것이 다 나를 향해 있다고, 그 좋은 것들의 느낌을 내가 다 가지려고 태어났다고, 이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그는 왕이다.
느낌의 왕.
호모 센티엔스. 느낌인간이다.
인간은 다 이 느낌인간으로 태어난다. 인간은 대립하고 있는 스스로의 구성요소들을 학습과 수련을 통해 점차 변증적으로 통합해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완전한 하나로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을 기억하면 된다.
완전하기에 독보적이다. 모든 개인은 원래 종교적 또는 심리학적 천재로 이 세상에 온다. 그러나 자신이 부족하고 못난 존재인 것처럼 열등감을 주입당했다. 자신이 느낌의 왕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도록 상대적 관계의 세상으로부터 세뇌된 것이다. 개인이 상대적 지지 없이도 스스로 왕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양적 상대성의 힘을 모아 성립된 권력은 붕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권력의 추종자들이 악다구니를 친다. 어떻게든 자신들이 상대적인 갈등구조로 얻어낸 힘과 인기를 잃지 않으려고, 개인을 더욱더 대중이라는 관계적 추상체 속에 매몰시키려 한다.
그러나 정직하게 떠올려보자. 누구도 대중 따위는 되고 싶지 않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아주 특별한 그 의미로 서있는 구체적이고 오롯한 개인이기를 바란다. 그처럼 태동하는 개인의 씨앗을 겁박해서 자기 밭의 자산으로 종속시키려는 그 탐욕의 의지에는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 자기의 열등감에서만 비롯한 탐욕의 자취를, 타자를 위한 선함의 가치로 위장하는 일에는 불일치의 요동이 만들어낸 멀미마저 인다.
그래서 100년 후를 꿈꾼다.
100년 후의 당신은 당신이 태어난 바 그대로 행복하기를. 다 누리기를.
100년 전에도 당신이 반드시 옳았던 사실을, 100년 후에도 기쁘게 누리고 있을 당신을 꿈꾼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를 꿈꾸듯이, 가장 완전한 조화의 사실로서 당신이라는 존재를 꿈꾸었다. 100억 년 전에도, 아마.
이 우주는 시작부터, 당신이 당신 자신을 가장 완전한 존재로 옳게 발견할 그 순간만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 우주는 그 자체로 당신을 향해 울려 퍼지고 있는 세레나데, 오롯하게 당신에게 바치는 느낌의 찬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