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인간 #4

"서사의 병"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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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강점기의 암흑시대는 언제 끝날 것인가? 락의 시대를 우리가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개인적 서사의 편견으로 가득한 이 물음들 속에서도 우리는 진실의 편린을 건져내어 출발하고자 한다.


출생과 신분, 경제수준 등의 사회적 조건에 의해 생긴 시련과 고난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 자신의 열등감은 그렇게 우리 자신은 원치않았던 불가피한 조건들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상황을 원망하면 무엇하겠는가? 우리는 다만 열심히 노력하고 획득한 우리 자신의 힘으로, 마침내 우리가 가진 열등감을 극복하는 일에 성공했다. 인간승리다. 비극을 승화시켜 완성해낸 영웅신화다. 그 무용담이 그루브한 리듬에 실려 서사시로 울려퍼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분명하다. 우리는 열등감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애초 열등감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상대적 비극을 극복한 영웅이 아니라, 절대적 완전함을 자각한 개인을 말하고 있다.


열등감은 왜 만들어지는가? 상대적 비교가 만든다. 그 태생부터 상대적 비교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 언어가 만든다. 또 그러한 언어를 통해 구성한 자기서사가 만든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자아는 이러한 서사의 결과물. 그러니 자아는 늘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자아는 언제나 자신이 영웅이 되기를 꿈꾼다. 이것은 닭과 달걀의 문제다. 그 핵심은 어떻든 영웅과 열등감은 필연적인 한쌍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성공한 영웅이 되는 서사를 채택하고 있는 자아가 있기에 열등감은 그 자아에게 필연적으로 내재된다. 사실적으로는 우리에게 존재하지도 않았던 열등감이, 영웅서사를 원하는 자아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에 침습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자아는 자기가 만들어낸 열등감을 이제 자기의 노력으로 극복한 척하며,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 영웅인지를 만인에게 인정받고자 자기신화를 선포하려고 한다. 열등감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라면 늘 우리는 자아의 이러한 자기도취적 1인극을 관람하고 있는 것과 같다.


미국의 실존주의 심리학의 대가인 롤로 메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자신에게 돈이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돈을 많이 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런 것을 변화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구속하는 동일한 상대적 조건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시소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변화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그 시소로부터 자신을 해방하는 것만이 참된 변화입니다."


서사가 작동하는 방식은 정확하게 이와 동일하다. 자신이 모종의 열등감을 극복해낸 영웅치럼 행세하고 있는 이가 있을 때, 그는 정말로 열등감을 극복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이전보다도 더 그 열등감을 유발한 조건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를테면, 지적 열등감이 있는 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그 열등감이 극복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높은 수준의 학벌을 갖게 된 자신이 지적으로 하찮게 보이는 일은 더욱 경계된다. 신체의 긴장도는 몹시 높아지며, 한 번이라도 지적으로 패배해서는 안된다는 강박이 신경증을 형성한다.


인류가 지금껏 벌여온 무수한, 또 무수한 만큼이나 한없이 공허한 그 모든 싸움의 이유들을 떠올려보자. 가장 주된 이유는 무엇이었나? 바로 자존심이다. 자존심은 자기가 자기라고 생각하는 자아정체성을 수호하려는 것이다. 자아정체성은 서사가 만들어낸 것이며, 결국 인류는 자기가 동일시되어 있는 이야기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피를 흘려온 것이다.


"너 내가 쓴 소설을 진리로 믿지 않는다고? 그래, 전쟁이다."


이 일이 얼마나 폭력적인 일이었는지 우리는 돌이켜볼 수 있겠는가.


폭력이라는 자각조차 없기에, 심지어 자신의 입장에서는 가장 정당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그 일을 하고 있기에, 그 폭력성은 심대하다.


오늘날 만연해있는 모습들을 떠올려보자. 어느 장에서든 다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자기서사만을 말하려 한다. 인류의 90%가 다 놀라운 자기만의 스토리와 재능을 갖고 있는 어벤져스의 일원들이라고 한다. 놀랍도록 지루하기 짝이 없다.


혹여 그러한 자기의 서사를 타인이 버티면서 잘 들어주지 않으면, 자기가 무시받았다고 생각하는 일도 빈번하다. 공감과 경청의 강요는 이렇게 일어난다. 심리상담의 핵심적 기제는 타인을 착취하는 도구로 전락한지 오래다.


착취가 폭력이다.


서사가 인간을 착취한다. 서사를 추종하는 이는 실은 서사에 착취되고 있는 이. 그러한 이가 이제 다른 이에게도 서사의 폭력을 가한다. 그렇게 상대를 악마화함으로써, 또 한 번 자기의 선한 영웅서사를 실현하려는 것이다.


자신에게 놀라운 자신의 이야기가 있으면, 자신이 놀라운 존재가 될 것이라는 이 '스토리텔링 주술'이 끝없는 폭력의 연쇄를 낳는 핵심적인 이유다. 곧, 언어가 존재를 만든다고 하는 망상에서 비롯한 사태다.


실존주의는 이 망상을 시작부터 해체하고 시작한다. 실존주의 선언을 돌아보자. "존재(실존)가 언어(본질)에 앞선다." 이 말은 주장이 아니라, 사실의 진술이다. 어떠한 언어로도 누군가를 더 존재하게 할 수도 없고, 덜 존재하게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은 실증적이다. 만약 언어가 존재에 앞선다면 우리는 언어의 힘을 통해 죽지 않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쓴 소설을 사실로 믿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정신병이라고 부른다. 자아의 영웅서사에 심취해있는 오늘날 다양한 정신병이 출현해있는 이유다.


병은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 그러니 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낫게 하기보다는 반대로 자신의 병으로 오히려 타인도 아프게 만들려고 힘쓸 때, 병도 폭력이 된다.


그러니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도약을 시도해보자.


병을 낫게 한다는 현실에 관해, 우리는 병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애초 병든 자가 아니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 말은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곧 실존하는 우리 자신은 자아와의 동의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병든 것은 자아다. 자아는 영웅이 되는 일에 미쳤다.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그 각본에 따른 연기를 한다. 삶을 점점 더 가상으로 만들어간다. 삶이 가상현실처럼 경험되니 인간에게 폭력을 일삼으면서도 그 모든 것이 게임 속 상황인 마냥 실감이 나지 않는다. 전형적인 자아도취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가 아니고, 고로 태생부터 건강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가 건강함을 당연한 우리의 것으로 되찾을 수 있는 그 지평은 무엇인가?


바로 느낌이다.


우리는 느낌 그 자체다. 크리스토프 코흐나 안토니오 다마지오 같은 오늘날의 인지과학자들은 우리의 존재를 느낌으로 근거화한다.


느낌은 서사가 아니며, 서사가 될 수도 없다. 왜인가? 느낌에는 애초 자타가 없기 때문이다. 그 완전성이 느낌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그러니 부분적인 입장으로 환원해서야 겨우 만들어낼 수 있는 서사는 애초 느낌 속에서 성립될 수가 없다.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하게 건강한 자신을 일부러 찌그러트리고 병들게 해서 만들어낸 것이 서사라고.


서사를 통해 병이 낫는 것이 아니라, 서사를 위해 인간은 병이 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일부러 불완전한 척하며, 또 불완전한 자신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한 영웅인 척하며,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병들게만 하는 몹쓸 일을 해왔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러나 느낌은 알고 있었다.


느낌은 스스로를 안다. 스스로가 어떻게 펼쳐질지를 알고, 어떻게 건강해질지를 알며, 바로 그 자유와 해방의 길로 스스로를 이끈다.


느낌이 향하는 방향은 언제나 서사 밖이다.


느낌은 생명현상. 생명은 언제나 이야기의 감옥을 벗어나 스스로의 날개를 장대하게 펼치기를 바란다.


그것이 진짜 영웅인가? 그런 하찮은 것 이상이다.


영웅이 아니다. 바로 당신이다.


느낌은 당신이라는 존재에서 발해져 언제나 당신 자신을 다시 향하는 것. 실존의 재귀운동이라고도 불린다.


당신 자신을 바로 찾기 위해, 당신은 그 모든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말해지는 그 어떤 것도 아니라, 진짜는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그 울림을.


당신 자신을 지금 이 자리로 모셔오기 위해 그 장대한 날개는 펼쳐졌던 것이다.


자신이 하찮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해서 영웅을 꿈꾸었는가? 또는 연예인을, 또는 작가를, 또는 심리상담자를, 또는 갑부를, 또는 대통령을, 또는 신성한 그 무엇을 꿈꾸었는가?


그런 당신은 이미 완전했다고, 영원히 완전하다고, 느낌이 사실을 전한다. 당신에게 무엇보다 기쁜 소식을.


우리는 지금 조건을 바꾼 것이다.


나쁜 당신에서 좋은 당신으로 옮겨가는 상대적 조건화의 서사가 아니라, 당신이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 무엇에도 앞서서 다만 절대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절대적 조건을 얻은 것이다.


이런 것을 변화라고 부른다.


당신의 자아가 이야기를 통해 병적으로 얻으려고 했던 그 모든 것은, 당신이 있는 지금 여기, 이야기 밖에 다 있었다. 그렇게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당신의 모든 것이 다 변화되었다. 당신만 있으면 모든 것은 다 완전하게 변화된다.


그러한 당신이 진실로 당신 삶의 주인공이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신이 바로 그 정도의 존재임을 알라고, 느낌은 언제나 날갯짓한다.


그 느낌으로 사는 당신, 바로 느낌인간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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