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인간 #5

"잘 살고 싶다"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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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이 나지 않고 무기력해서 실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누워서 스마트폰이나 들고 알고리즘에 따라 제공되는 공허한 영상들이나 눈앞에 흘러가게 둔 채 다만 시간의 공백만을 메우고 싶다. 마치 뭐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또 어떤 경우에는 그런 것을 쉼이라고도 말할 것이다. 늘 과도한 정보의 선택지 앞에서 현명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막중한 무게를 짊어지고 생존의 현실을 버텨가는 속에서는, 자신이 선택할 필요없이 그저 다른 누가 떠먹여주는 그 일만으로도 그것이 쉼인 것처럼 생각된다.


정말로 가능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다 그만 두고 싶다. 격하게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다. 행복하고 싶지도 않다. 행복이라는 말에 쫓겨서 또 치여서, 기약도 보상도 없는 무의미한 노력을 지속하는 일 자체를 다 멈추고 싶다.


어떤 불면의 밤에는 머리를 좀 굴려봐서 자신의 욕망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돌아볼 것이다. 그러다가 실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이었는데 그게 자신의 욕망인 줄 알고 그 허깨비에 쫓기고 있었구나, 뭔가 대단한 인문학적 통찰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눈물도 좀 흘릴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렇게 남의 가치관에 휘둘려 성공해야 한다고, 잘나야 한다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아둥바둥 살았었는지, 내가 사는 마을의 밤거리는 이토록 고요하고 온전했을 뿐인데, 라며 초월적 현자라도 된 듯한 감상에 젖기도 할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그조차도 다 무의미해질 생각들, 또 감정들.


내일 떠오를 태양의 기운을 버티지 못해 유령처럼 사라질 그저 공허한 생각들, 또 감정들.


결국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우울이 인간으로 형상된 것이다. 우울 그 자체의 생태다.


우리는 지금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죽으려는 것도 아니다.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는 상태. 그렇기에 가장 살아있지 않은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다만 버티고만 있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받아쓰기를 시키는 엄마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악문 채 그저 속절없이 시간만 버리고 있는 그 모습이다.


왜 자신의 삶과 싸우고 있는가?


그러면 "넵넵, 고객님, 많이 속상하셨죠? 저희가 전적으로 잘못했습니다. 고객님이 원하는 건 다 들어드려얍지요."라면서 삶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우리 자신을 위해 어떤 마법을 부려주기라도 할 줄 아는 것일까?


우리가 살고 싶지 않아진 건 투쟁으로 무엇인가를 쟁취해야 할만큼의 그렇게 대단한 이유가 아니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삶이 재미가 없어서 살기 싫어진다.


그렇다면 왜 삶이 재미가 없어졌을까?


잘 못살기 때문이다. 축구를 잘 못하는 이는 축구가 재미없고, 공부를 잘 못하는 이는 공부가 재미없다. 잘 못해서 재미가 없으면 당연히 하기 싫어진다. 삶이라고 다를 것인가. 삶을 잘 못살고 있을 때 우리가 살기 싫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다른 지점이다.


우리는 대체 어떤 이유로 잘 못살게 된 것인가?


자기가 지금 그래도 아주 잘 못하지는 않게 어느 정도는 잘 살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내준 숙제를 그럭저럭은 해내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적당하게는 해내며, 또 관계의 서사가 진리와 선이라고 규정하는 가치들을 가능한 만큼은 최선을 다해 해내려 했던 우리였다. 바로 그렇게 사는 일이 우리가 잘 사는 일이라고 배웠던 까닭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잘 따라 살기만 하면 우리가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보증수표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건 부도수표였다.


근대적 지성이 자아도취에 빠져 남발해댄 공수표의 버블이 터지고, 그동안 지성의 도덕적 명령을 절대적 진리처럼 섬기며 살던 우리는 저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흡사 지옥으로 떨어진 타락천사처럼.


그렇게 우리는 밑바닥에 눌어붙은 것이다. 자신을 추락시킨 것이 자신에게 용서를 빌고 보상을 제공할 때까지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울은 일종의 시위활동이다. 온몸으로 하는 시위. 자신은 아무 것도 잘 못한 것이 없고 주어진 명령대로 다 잘 했는데 이 모양이 되었으니, 어서 빨리 막대한 배상료를 지불하라는.


이 배신의 감각은 그리 틀린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 대상이 잘못되었다.


왜 삶에게 그런 시위를 하고 있는가?


삶이 우리를 추락시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부모와 사회와 관계가 발행한 공수표를 수상하게 느끼며 우리에게 그 거래를 받지 말라고 부단하게 알렸던 것이야말로 삶이었다. 거품이 낀 우리의 지성이 그렇게 우리를 말리려 하던 삶의 느낌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집행한 결과에 대해 삶이 그 원망을 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화낼 대상을 잘못 찾았고, 싸울 상대를 잘못 짚은 것이다.


잘 못했을 뿐인 일이 그로써 잘못한 일로까지 되어버렸다.


축구를 잘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잘 못하는 그런 자신에 대해서도 한결같은 지지와 응원을 보내고 있던 유일한 팬을 능욕하고 가해하는 일은 죄인의 심정을 만든다.


그러니 우리가 정말로 살기 싫어지게 된 것도 당연하다. 죄인으로 사는 일이 정녕 재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미 죄인인데 뭘 더 해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진실된 입장에서, 우리에게는 아직 더 해 볼 수 있는 것이 남아있다. 아니, 지금까지는 해보지 않았던 어떤 일을 이제 처음으로 우리는 시도해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도 분명한 팬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다.


우리만 있으면 된다고 하던, 그 유일하고도 영원한 우리 자신의 소중한 팬.


삶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왜 삶을 재미없는 것으로 소홀히 대했는가?


삶 대신에 다른 것을 중요시하는 일이 삶을 잘 사는 일이라고 까마득하게 속았기 때문이다.


지성, 언어, 관계, 시스템, 역할, 윤리, 서사, 이 모든 동일한 내용을 가진 상대적인 것들에게 우리의 삶을 대신 내어주는 방식으로 우리는 삶을 배신했다. 그리고 필연적인 결과로 끝내 그것들에게 배신당하게 된 우리는 오히려 삶이 우리를 배신한 것처럼 원망하는 방식으로, 또 한 번 삶을 배신했다.


그러한 우리가 숨을 쉬며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은, 삶은 그래도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삶을 배신하지만, 삶은 그런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서 절대적으로 우리를 살리겠다고 한다. 저 미래로 이 귀중한 숨결이 반드시 이어지게 하겠다고 한다.


삶의 그 약속이 바로 느낌이라는 것이다.


느낌은 이 우주에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오랜 언약의 보증수표다.


잘 산다는 것은 곧 이 느낌으로 산다는 것.


축구를 잘 한다는 것은 공을 잘 찬다는 것이다. 삶을 잘 산다는 것은 느낌으로 잘 산다는 것이다. 동일한 이해다.


그렇게 느낌으로 잘 살게 되면 삶이 재미있어진다. 잘 하는 일은 재미있다. 당연하다. 실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언어로 꾸며낸 힘이 아니다. 표현 그대로 실제의 힘, 실력(實力)이다.


느낌은 우리가 생존의 지속활동에 가용할 수 있는 실력을 놀랍도록 크고 빠르게 키워준다. 느낌으로 사는 이에게는 재미라는 것이 작동하고 있기에 그 일이 가능하다. 삶의 재미야말로 우리의 성장에 있어 가장 강력한 동기와 동력을 제공하는 기제인 까닭이다.


삶의 실력이 생기면 더 해보고 싶고, 더 재미있어지며, 더 잘 하게 된다. 즉, 더 실력이 향상된다. 이것은 선순환의 피드백이다. 이 나선운동이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눌어붙어 있던 저 어두운 우물의 바깥, 바로 햇살속이다.


태양 아래 우리는 부끄럼없이 섰다.


무엇도 우리를 허깨비처럼 사라지게 하지 못한다. 태양은 우리가 정말로 살아있는 것으로서 살아있다는 사실을 환히 증거할 뿐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원래 가장 진실된 우리의 편이자, 우리가 태어나서 얻을 수 있던 가장 좋은 것이라는 그 사실 위로.


그 사실 위에 우리가 서있을 때, 우리는 무적이다. 적이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과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과 싸우지 않는다면 싸울 대상도 없다. 투쟁의 역사는 이로써 끝이 난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게 된 이 느낌이다.


태어나길 정말로 잘 했다.


바로 그 감각.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뿌듯함, 충만감, 그 자신감. 그리고 햇살속에서 한없이 피어오르는 이 감사함.


이제 우리는 아주 많이 살고 싶어진 것이다. 진짜 잘 살고 싶어진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바로 이 '잘 살고 싶다'라는 느낌의 순간들. 그렇게 느낄 때 우리는 잘 살아 있는 것이다. 느낌이라는 인간의 자리 위에 아주 잘, 살고 있는 느낌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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