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인간 #6

"느낌을 어떻게 잘 경험하는가"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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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얼마나 최고의 것인지를 계속 말할수록 자주 받게 되는 질문이 있다. 그렇게 좋은 것을 어떻게 하면 경험할 수 있는지, 소위 어떻게 느낌을 잘 느끼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조금 어렵다. 이것은 마치 어떻게 하면 숨을 잘 쉬고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대답하는 방식이 나을지 모른다.


우리 자신을 느낌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그 고급언어의 숭고한 이유들을 이제 그만 하면, 느낌은 스스로 알아서 잘 작동한다고.


그러니 우리에게는 역으로 느낌이라는 것을 자꾸만 우리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고 멀어지게 만드는 이유들이 대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이해해보는 일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느낌으로 살지 못하게 되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자꾸만 우리 자신을 선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해서다. 그러면 삶이 잘 느껴지지 않게 된다. 자기를 어떻게든 선한 존재처럼 구성될 수 있는 편집적 스토리를 만드는 일에 모든 생각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복잡한 생각만이 계속 겹겹이 쌓여가는 안개 속에서는 느낌이 가려질 수밖에 없다.


자기를 선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 일은 오늘날 더 교묘한 형태로 일어나곤 한다. 그것은 보통 다양성이라는 표현으로 형상화된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자기가 도저히 순수하게 선한 것으로서만은 되지 못할 것 같을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는 틀린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것이야."


선함이라는 것에도 무수한 종류가 있으며, 자기도 엄연히 그러한 선함의 범주에 속한다고 정당화하려는 은밀한 의도를 담고서 다양성이라는 개념은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 작동방식 자체도 기만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소위 다양성을 강박적으로 주장하는 이들은 자기들이 보다 차원높은 식견을 보유한 것처럼 행세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상은 선한 것과 악한 것 또는 바른 것과 그른 것으로만 구분되는 이원론이 아니라면서, 다만 서로 다른 특유의 개성과 가치를 지닌 소중한 다양성들만이 있을 뿐이라고 자기가 초월한 도사인 척 굴곤 한다. 또는 다양성에 대한 그 태도가 흡사 주체적 의식이 높아 제대로 깨어있는 시민의 자세라도 되는 것처럼.


마치 이것은 유치한 이원론에서 벗어나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보는 관점을 가진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그저 이원론적 의도를 은밀하게 숨기고 있는 은폐된 이원론에 지나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정말로 원하고 있는 것은 자기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그 근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양성이라는 말이 그 목적을 위한 담론적 근거가 되어주길래 그 말에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즉, 이들은 여전히 도덕의 이원론적 프레임 위에 놓여 있다.


나아가 이러한 자기기만은 사실적으로 더 깊이있는 온전성의 관점에 대해서까지도 그것은 전근대적인 옳고 그름의 관점이 아니냐며 일종의 교조주의적 평가의 태도를 보이곤 하는데,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원래 다양성은 독재의 다른 이름이다. 독재에 저항하는 것이 다양성이 아니라, 자기가 다양성을 다 알아주겠다고 하는 바로 그 중심의 원리가 독재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산은 산이다."의 논의를 한번 예로 들어보자.


"산은 산이다."라는 말은 "산은 산이 아니다."를 거쳐 다시 한 번 "산은 산이다."라고 발화된다. 여기에서 처음과 마지막의 "산은 산이다."라는 그 의미는 동일하지 않다. 마지막의 발화는 범주가 완전히 초월해버린 온전성의 실재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다양성의 가치를 주장하는 주체들은, 산은 꼭 산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물도 될 수 있고, 새도 될 수 있고, 바람도 될 수 있는 다양성이 있다며, "산은 산이다."라고 말하는 마지막 발화의 사실적 내용을 처음의 발화의 수준으로 폄하시킨다. 그러면서 그것을 일원론적인 독재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독재의 세력은 원래 이처럼 자기가 하는 일을 남에게 투사해서 악마화한 뒤 자기만은 정의와 진실의 수호자인 양 선한 척하려고 하는 법이다.


이러한 진리담론의 용도로 쓰이고 있는 다양성이라는 표현은 그것이 흡사 탈근대적(포스트모던적) 사유에서 근거를 얻고 있는 척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개념이야말로 가장 근대적인 것이다. 근대에 찬미되었던 보편적 이성이라는 것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세계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파악하며 포섭하는 일이다. 탈근대는 커녕, 이것은 가장 근대적인 사유다. 그러니 이와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늘 전근대성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곤 하는 것이다. 그 비판의 표현이야말로 자기들이 근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다.


이처럼 이미 한참 철이 지났고 그래서 유독한 부패의 독성까지도 내뿜고 있는 구태의 가치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자기들이 가장 최신이고 깨어있는 젊은 정신을 가진 척하는 이 모습은 한국의 특정세대 내지 특정정치집단의 모습을 닮아 있다. 공교롭게도 한국사회에서 다양성과 통합의 가치를 누구보다 열렬히 주장하고 있는 이들 또한 동일한 세력들이다.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 근대적 태도에 동조해서 살다보면 느낌으로 사는 길은 분명 더욱 어렵고 요원해진다.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었는데도 무조건 자기가 선하고 좋은 존재라고 고집하고자 하는 이 병적 강박은, 명백하게도 지성과 언어가 낳은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반한 것이며, 언제나 하나의 온전성을 향해 작동하는 느낌이라는 것과 실제의 차원에서나 개념의 차원에서나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근대적 정신이 느낌이라는 것을 고작해야 하위의 동물적 본능 내지 불완전하고 미숙한 감정 및 정서 등의 것으로 얼마나 굴절시키려 했는지를 떠올려보자. 느낌을 따라 살면 위험하면서도 이기적인 일이고, 언제나 만인의 행복을 꿈꿀 수 있는 객관적이고도 보편적인 이성으로 살아야 한다며, 근대적 정신은 지속적으로 느낌이라는 것의 저급화, 또 나아가서는 악마화를 시도해왔다.


이렇듯 느낌은 가장 봉쇄된 것이었으나, 근대성을 해체하고자 한 실존주의의 출현과 함께 이제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근원적 핵심으로서 그 위격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인지과학은 느낌의 복권을 우리에게 전면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AI의 발달과 함께, 그와 대조하여 인간이 정말로 살아있는 생생한 인간일 수 있는 그 고유한 위상에 대한 탐구가 동반되면서, 바로 이 삶 자체가 스스로를 알리는 현상인 느낌이라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그 존재론적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 사유를 벗어나도 이미 한참 벗어난 것이며,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그릴 수 있는 가장 온전한 인간의 지평에 대한 묘사다. 가장 최신의 것이며, 동시에 가장 실용적인 것이기까지 하다.


느낌이 실용적인 것은 느낌에는 이념이 없기 때문이다.


느낌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성이 작업한 스토리로 만들어지는 장르문법의 정서가 아니다. 삶 그 자체의 것이 느낌이다.


그렇기에 느낌은 모든 이원론을 거부한다. 느낌에는 선악이 없다. 다만 우리의 존재론적 건강성을 향한 지향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건강성이라는 표현을 윤리와 결부시키는 것이 근대적 습성이다. 도덕적이어야만 오래 살 수 있다는 주술적 신념에서 비롯한 착각이다. 이러한 착각은 우리가 근대주의적 사회의 권력으로부터 추방의 협박을 받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지, 이 우주가 실제로 그렇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건강성은 순수한 생리학적 표현이다. 그러니 순수하게 존재론적이다. 실존주의자들은 다 이 건강성에 대해 말한다. 인간이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그 고귀한 방식에는 원래 선악이 없다. 느낌에 선악이 없듯이, 존재에 선악이 없으며, 우리 삶 자체에도 선악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언제나 선한 존재인 것처럼 꾸며내야 하는, 두려움에서 비롯한 그 강박이 더는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든 '선한 것'이 되고자 '다른 것'이 되어야 할 신경증적 이유가 소멸된 것이다.


그 대산에 느낌은 인간이 이 지구를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로 필요한 사실의 지평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다른 것이 아니다. 틀린 것이다. 바로 그 지평이다.


이 사실의 지평은 상대적인 차원에서 타인들에게 틀렸다는 평가의 발화를 남발하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단지 절대적으로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무슨 소설이나 게임캐릭터를 설정하듯이 자기를 위선의 의지로 꾸며내고자 한 그 모든 상대적인 '다양성의 증세'에서 발로한 자신의 모습들이 절대적인 차원에서 다 틀렸다는 사실에 대한 것일 뿐이다.


다 틀렸다. 상대적인 것은 다 틀렸다. 절대적인 것에 대해, 특히나 우리에게 반드시 절대적으로 조우되는 삶이라는 것에 대해 상대적인 것은 다 틀릴 수밖에 없다.


종교적 전통에서는 아예 "아니다, 아니다(Neti, Neti)."라고 한다. 상대적인 것들에 대해 다 틀렸다고 확인해가면서, 절대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방편이다.


이미 언어의 특성에 따라 온전성을 잃고 부분으로 환원된 상대적인 차원에서는 애초 온전하게 옳을 수가 없다. 정답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니 다들 부족한 답만을 쥔 채, 상대와 싸워 이김으로써 자신의 답이 정답인 것처럼 억지로 정당화해보거나, 또는 모두가 다 그렇게 부족한 자기만의 답으로 살아가는 것이 또 인생사는 묘미라며, 기만적인 문학적 자아도취를 시도해보곤 한다.


붓다가 어리석음을 말했을 때, 그는 인간이 정답을 몰라 어리석다고 한 것이 아니다. 정답이 있는데도 그 정답을 일부러 보지 않는 깜깜한 장님처럼 살아가는 일을 어리석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정답이 있다.


느낌이 정답이다.


느낌을 따라 살면 옳고, 느낌을 무시하고 살면 뭘 하든 틀리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틀렸을지라도 돌이키는 일은 가능하다. 정답은 늘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 있다.


삶에 대해 자신이 지금껏 해온 것이 다 틀렸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제 느낌이 다시 흐르게 된다. 우리는 느낄 수 있게 된다.


자신은 상대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틀린 것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깨어난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언제나 옳으며, 영원히 옳고, 절대적으로 옳다. 그렇게 우리의 존재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 정답이다.


느낌은 언제라도 반드시 이 존재의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 모든 상대적인 것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허깨비로서가 아니라, 느낌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가장 든든하고도 분명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그 정답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우리가 느낌을 알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다. 느낌이 알려주는대로 우리는 정직하게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느낌은 우리가 돌봐야 할 무슨 외롭고 불쌍한 내면의 아이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느낌은 우리의 스승이다. 느낌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감으로써만 우리는 진실로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주관의 현상으로서만 경험되는 이 느낌을 따르지 않고서는 결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만날 수 없다. 그렇기에 윤리, 언어, 정치, 서사, 관계 등의 그 모든 상대적인 소재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들, 또 시도들은 절대적으로 다 틀린 것이다. 죽을 때까지 얻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다. 죽어도 얻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깨달음이라는 표현으로 곧잘 은유되곤 한다. 깨달음은 상대적인 것을 통한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상대적인 것으로는 수천만 년 전생하며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 것이며, 그러한 자신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이해하고 절대적인 것에 스스로를 개방하려 하면 단 1분만에도 얻는 것이다.


우리가 느낌으로 산다는 것은 깨달음의 현실을 산다는 것과 실은 동일한 말이다. 그 새로운 현실은 과거에는 조금 더 소수만 누릴 수 있던 고급현실이었지만 이제는 훨씬 더 우리가 누리기에 용이하게 개방되어 있다. 물론 처음부터도 그러했지만, 우리가 아무 조건없이 존재해도 된다는 사실을 더 많은 이가 정말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서 신뢰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착한 아이'여만 존재할 수 있다는 착각의 저주가 지독했다고도 할 수 있다.


오늘날 바로 그 저주를 분명하게 자각한 이, 그런 즉 상대적인 논리회로의 미로 안에서는 자신이 어디로 가든 실은 빠져나갈 수 없는 못된 주박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그렇기에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해서 어느 길로 가든 근본적으로 다 틀린 길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 이는 이제 어떻게 할까?


그 자리에서 가만히 멈추게 될 것이다.


어차피 가도 다 틀린 길인데 갈 필요가 없다. 무엇을 해도 근본적으로는 삽질일테니 더는 할 필요가 없다.


바로 이 이유로 2500년 전에 붓다는 자신이 있던 그 자리에 그냥 앉아버렸던 것이다. 나무에 등을 대고 편안하게.


다만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는 처음으로 마음이라는 것을 만나게 되었다. 마음이 흘러들어왔다. 곧,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느끼게 되었다. 절대주관의 시선이 펼쳐졌다. 존재 그 자체의 시선이 존재 그 자체를 드러내는 새로운 현실로 그는 진입했다. 그 현실에서는 느낌이 존재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들을 다 알려주어서 자연스레 붓다는 가장 위대한 지혜를 얻게 되었다. 깊으면서도 쉬운 그 지혜로 바라보게 된 삶은 아무 문제없이 재미있고도 온전한 경험들의 순간들. 인간에게 찾아온 가장 위대한 성취, 또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 그 자체.


붓다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무조건적으로 옳은 완전성의 사실임을 알았다.


그 모든 틀린 것을 그저 다 멈추고, 그냥 무조건적으로 먼저 존재해보았더니, 그 사실을 스스로 증거하는 느낌들이 흘러들어와 그것이 정말로 사실임을 붓다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먼저 존재하기.'


결국 이것이 핵심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느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잘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한번 조건없이 먼저 존재해버리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은 다 회복된다. 그냥 무조건적으로 존재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개방했으니, 존재의 낌새인 느낌은 개방된 그 공간으로 필연적으로 흘러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선함 등과 같이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소설처럼 또 저주처럼 부여한 그 어떤 가상의 본질보다도 존재가 앞선다고 하는 실존주의 선언을 떠올려보자. 그 선언은 그대로 붓다의 것과 같은 실용론이다. 존재가 무엇보다 앞서기만 하면 우리는 반드시 자유로워진다. 오랜 저주의 주박에서 풀려나, 스스로의 완전함을 다시 찾는다. 우리가 늘 꿈꾸어오던 그 정답 중의 정답을.


다름이 아니라 틀림을 알면, 우리는 이처럼 절대적인 옳음이 된다. 자신의 존재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존재를 늘 언어로 정당화해야 한다는 상시적 방어태세가 해지되며, 이에 따라 자연스레 여유가 생겨나고 힘이 돌아온다. 우리는 이제 재미있어질 준비가 된 것이다. 살아있는 일이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무엇이 펼쳐질지 기대된다. 멋진 일이 시작될 것 같다. 이것이 옳다. 이 감각이 옳다. 우리 자신이 언제나 소망해오던 딱 그 모습.


지금 이 상태가 바로 느낌을 잘 경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현실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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