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인간 #7

"마음의 미래"

by 깨닫는마음씨




오늘날 인간의 마음을 더 어렵고 힘들게 만드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는 것은 심리학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심리학은 현대판 사서삼경으로 변질되었다.


심리가 윤리로 몰락해버린 것이다.


어떻게 해야 올바른 사람이 되고, 진보적인 시민주체가 되며, 모든 관계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내면의 큰어른 같은 것이 되는지를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치고들 있다. 도덕선생이 되어 아이들을 자기가 바라는 모습으로 개조하겠다는 야심찬 꿈을 이루지 못한 이들이 심리학을 도구로 써서 소싯적의 망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인지 의심될 정도다.


그밖에도 심리학은 특정한 정당이나 이념을 지지하는 담론적 장치로 기능하거나, 아이들을 참된 시민으로 기르겠다는 사회적 양육의 장치로 기능함으로써, 소위 말해 정치화의 도구처럼 남용되고 있다. 정치화, 이념화, 윤리화, 다 같은 말이다. 조금 더 긍정적인 인상을 주기 위한 표현으로는 '계몽'이라고 하고, 그 원래의 노골적인 의미로서는 '세뇌'라고 쓰는 그 표현의 변주들이다.


우리는 니체의 말을 따라 실증적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한번 떠올려보라. 우리 주변에서 윤리를 강조하는 이의 모습을 섬세히 관찰해보면, 그가 얼마나 타인을 조종하고 지배하려는 성향을 갖고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다. 니체는 줄기차게 이 위선을 폭로하려고 한 사람이다. 윤리를 주장하는 이야말로 그 윤리라는 이름으로 은밀하게 자신의 상대적 권력을 증진시키려고 한다는 사실을.


'상대적 권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리 선한 언어로 포장해봤자 결국 빼앗는 일이다. 상대에게서 힘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삼기에 상대적 권력이다. 이런 의도와 행위에 윤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으니, 니체로서는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사실 정확하게는 니체는 분노했다. 그래서 그는 심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밝히고자 했다. 그가 심리철학자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쩌면 최초의 심리학자인지도 모른다.


니체는 심리를 철저하게 윤리로부터 분리시키려 했다. 윤리가 오염시킨 심리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 그 이름은 바로 '생리(生理)'다. 표현 그대로, 삶의 원리. 니체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전격적으로 복귀시키고자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찾은 삶이 우리의 절대주관으로 경험되는 것, 곧 심리임을 밝힌다.


심리는 곧 생리다. 니체는 자신의 심리철학에 생리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삶을 연구하는 태도와 방향성을 함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에서 출발한 실존주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많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삶이라는 것에 아주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왜일까? 우리 중 누구도 삶이라는 것의 전모를 모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에게 삶이란 가장 큰 미지다. 그러니 이는 또한, 살아있는 것에게는 살아있는 그 자신이 가장 미지라는 말과도 같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미지는 윤리에 의해 온전하게 포섭될 수 있는가?


곧, 삶 그 자체의 정수인 우리 자신은 윤리에 의해 정당한 우리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기존의 앎을 진리화해야만 스스로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는 윤리는 미지를 무시할 때만이 성립가능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리는 미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소외해야만 작동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논의를 훨씬 더 도약해가자면 우리는 진실로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윤리는 마음을 죽인다. 그로 인해 마음은 생생히 살아 숨쉴 미래를 잃는다.


마음의 본래적 특성은 관심이고, 관심은 미지를 향하며, 그렇게 미지를 향해서만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서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지를 무시하면 마음은 더는 흐를 수 없게 된다. 죽음의 늪이 된다.


우리는 오늘날 인지과학자들이 마음의 대체어로 느낌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표현이 더욱 정당하다. 훨씬 직관적으로 느낌이라는 단어는 생리라는 단어와 밀접하게 연루된다.


이 느낌이라는 현상이 삶 그 자체의 표현이라는 사실 또한 다시 떠올려보자. 그러니 마음[느낌]이 죽으면 삶도 죽는다. 결국 윤리는 삶을 죽인다. 그래서 니체가 그토록 윤리의 기만성을 고발하려 한 것이다. 윤리는 자기가 자비롭게 모든 것을 다 살리는 척하나, 실은 가장 삶을 파괴하려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우리에게 알리고자 시도했다.


물론 정신분석과 같은 전통에서는 '윤리적 주체'를 세우는 일에 초점을 두기도 한다. 이것은 유교적인 기획과 거의 일치한다. 히브리적 사유와 유교적 사유는 부권의 결핍이라는 동일한 열등감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추상적인 정신세계에 위대한 윤리적 아버지의 이상을 세운 뒤, 그 이념의 아버지를 본으로 삼아 현실의 자신을 그와 유사한 형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획을 품게 된 것이다.


그러니 정신분석적 사유에서는 미지라는 것이 부재하든가, 있더라도 그리 달갑지 않은 소재다. 진정한 정답, 또는 소위 '진정한 나'라고 하는 것이 '이념적 아버지를 닮은 윤리적 주체'라는 내용으로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의식화'라는 정신분석의 잘 알려진 목표는 그렇게 정신분석이 미지에 대해 갖는 염증반응을 잘 나타낸다. 어떻게든 미지의 자리를 윤리로 덮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비슷한 증례로, 유교적 사유 또한 미지의 여백을 견디지 못한다. 미지를 싫어하는 전통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바로 '통합'이다. 그것은 자기가 아는 수준으로 미지를 환원시켜 끌어내린 뒤 자기가 그것에 대해 익히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을 향유하는 기만의 방식이다.


더 일상적인 표현으로 접근해보자면, 미지에 대한 이 기만적 태도의 모습을 우리는 흔히 '꼰대'라고 일컫는다. 꼰대는 윤리적으로 아주 훌륭한 얘기들을 늘어놓지만, 그 얘기들을 다 듣고 난 후의 우리의 반응은 탈진이다. 우리의 생명력이 갉아먹힌 것이다.


이것은 아주 전형적인 착취의 구조다. 바로 지성주의가 자행한 착취. 생각으로 느낌을 억압해온 그 구조다. 다시 말해, 언어로 삶을 억압해온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언어로 삶을 억압하는 이들은 고급언어의 수사학을 통해 자기 자신을 먼저 속이려는 경향성을 갖는다. 자기가 쓴 소설에 자기가 취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언어의 거푸집 속에 자기의 삶을 억지로 끼워넣어야 하는 고통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은 그러한 고통이, 진보를 위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타자를 향한 진정한 배려심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진정한 나'라는 것은 더 좋은 세상과 그 세상에서 살아갈 다른 이들을 위해 더 참아내고 버텨내는 희생과 헌신을 통해 가능한 것이라며, 스스로 고결한 순교자처럼 행세하기를 자주 일삼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의 신경생리학이 밝히고 있는 사실에 정직하게 직면해야 한다.


우리의 뇌는 통째로 거울이다. 곧,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로 그것만을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다.


아무리 숭고한 언어로 포장하더라도 그 생리적 현실이 고통인 이라면, 그가 실제로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은 오직 고통뿐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윤리적 주체는 고통만을 전염병처럼 퍼트려간다. 스스로가 만든 선함의 언어에 도취되어 있기에 그 사실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오히려 그 자신은 세상에 더욱 널리 이롭게 선을 보급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도취와 착각이라는 것이 왜 만들어지는를 이해한다면 모든 것은 분명해진다. 그러한 윤리적 주체는 너무나 생리적으로 고통스러워서 도취와 착각이 필요했던 것이다. 도취와 착각에 빠지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지옥 같아서 언어뽕이라도 맞아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나?


윤리.


우리는 이제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윤리라는 지극히 상대적인 소재를 마치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섬기며, 그 자신의 존재 여부가 윤리에 좌우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착각했기에, 그러한 윤리강박에 빠졌기에 이 지옥은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가. 조금 위험하면서도 극단적으로까지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다.


우리가 심지어 아무리 비윤리적이라도, 그 일이 존재론적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이러한 말이 조금 불편할 수 있더라도 이것은 실증적 사실이다. 아주 단순하게 야생동물들의 생태계를 떠올려보자. 어떤 동물도 인간이 추구하는 그 방식으로 윤리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그들은 존재를 거부당하지 않는다. 그들이 죽게 되는 것은 자연의 섭리 때문이지, 그들이 비윤리적이어서가 아니다.


이 얘기들은 물론 비윤리적 행위를 권장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아니다. 단지 분명해지자는 것이다. 엄마가 바라는 착한 아이의 모습으로 우리가 되어가는 일과, 우리의 명징한 존재론적 위상 및 그 의미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루어진 세뇌의 내용은 그 반대다. 우리는 윤리적이어야만 우리의 존재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세뇌되었다. 무수한 종교적 선각자들은 이 윤리의 세뇌를 해체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인간 자신의 존재가 대체 어떤 정도의 것인지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활동해왔다. 그들은 우리의 존재가 윤리보다 크다는 사실을 회복하기를, 곧 윤리의 초월을 기획한 것이다.


우리가 윤리라는 발명품을 만들어낸 것은 모종의 필요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필요들은 오히려 윤리를 초월한 자리에서 더 수월히 채워진다. 붓다는 잘 알려진 '독화살의 비유'로 아주 효과적인 예시를 전한다. 누군가가 쏜 독화살에 우리가 맞았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일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화살을 쏜 이에게 윤리를 들이밀며 그의 행동을 교정시키는 일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을 신성하고 특별한 윤리적 피해자로 내세워 인기와 힘을 얻어내는 일인가? 그도 아니라면 우리 자신의 상처를 돌보는 일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상처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치유하고자 하는 일은 특별히 윤리적이라고 부를 만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생리적인 일이다. 몸에서 스스로 일어나 스스로의 필요를 채운다. 그렇게 생리는 윤리를 초월한 자리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존재가 지속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돌보고 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생리적 사실이야말로 가장 윤리적인 기제로 드러난다. 전혀 윤리를 지향하지 않았음에도.


그러면 다시 기억해보자.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우리 자신의 사실적인 상태뿐이다.


스스로를 돌보는 이가 있다. 그러한 거울을 보며 다른 누군가에게도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 어떤 제약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렇게 세상 모든 것이 스스로를 돌보는 일 속에 있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윤리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던 최대치의 현실이 아니던가?


그래서 니체는 이러한 말을 남겼던 것이다.


"영혼을 치유하는 의사들이여. 그대들 자신을 치유하라. 자기 자신을 치유하는 자를 목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대의 환자들에게는 최상의 도움이다."


다시 한 번, 이러한 생리의 현실에 대해 더 쉽게 직접적으로 말해보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느낌으로 살아갈 때, 그 느낌의 좋음이 샘물처럼 우리 주변으로 점차 퍼져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을 위해 좋은 현실이 더 많은 인간을 향해 펼쳐진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누구도 윤리적으로 살고 있지 않지만, 생리가 더 고층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윤리라는 이름으로 꿈꾸었던 일을 무리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이루고 있는 것이다.


윤리가 그런 미지수의 현실은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는 동안, 생리는 그것이 미지이기 때문에 끌려 한다. 그것과 가까워진다. 그래서 그것을 쉬이 이룬다.


우리가 느낌으로 살 때 모든 것이 더 쉬우면서도 완성도있게 이루어지는 이유다.


심리학을 주장할 때 우리는 분명 이러한 방식을 기획했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더 수월하면서도 효과적인 방식을. 심리학의 미래는 그래서 느낌에 있다. 너무나 단순한 일상어처럼만 보이는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실은 얼마나 인간의 삶에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더욱 섬세히 밝혀나가는 바로 그 일에 있다.


이로써, 인간은 느낌인간으로서 인간이라는 사실에 대한 정직한 증언자로서의 임무가 심리학에는 배당된다. 지금껏 정치화의 도구로서, 양육장치로서, 또 인품있는 도덕적 선비 연기를 하기 위한 소꿉놀이 장난감으로서만 봉사해옴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흐리는 데 동조해온 심리학이, 어떻게 그 자신을 다시 돌이킬 수 있는가의 문제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서 자유로이 살아 숨쉴 수 있는 마음의 미래는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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