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괴롭히는 심리적 문법"
심리적 문법이라는 것은 마음 자체가 문법으로 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마음은 언어가 아니다. 물론 라캉과 같은 이는 "무의식은 언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하이데거에게 "그는 자신이 심리치료를 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평을 받는다. 자기를 도와준 은인에게 그러한 말을 하기 쉽지 않았음에도, 하이데거는 라캉을 그렇게 평할 수밖에 없었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고집하는 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과거 교토학파를 위시한 불교연구자들은 하이데거와 불교를 함께 엮어보는 일을 즐거워한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존재'라고 말하는 표현을 불교에서의 '마음'으로 바꾸어 이해하면 아주 호환이 잘 된다. "마음이 언어다."라고 하면 선사들에게 죽비를 맞는다. 애초에 선불교의 4대 핵심 중 무려 2가지가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이라고 하는 언어 및 문법에 대한 거부다. 언어로는 깨달을 수 없다. 문법적 가르침으로는 마음의 정수에 도달할 수 없다. 선불교에서는 이 방향성이 분명하다.
라캉과 선불교를 엮는 이들도 있는데, 힌두교적 사유를 선으로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다. 과거에 영화 매트릭스와 선불교를 엮던 방식과도 유사하다. 가장 선불교와 거리가 먼 것을 억지로 엮으려 하는 것인지, 또는 일부러 엮으려 하는 것인지. 어떻든 선불교의 입장에서 마음은 언어가 아니고, 문법이 아니다. 차라리 자주 인용되곤 하는 스즈키 선사의 말을 다시 빌려와보자. "선은 느낌이다. 느끼는 일에 다름아니다." 끝.
하이데거로 복귀해보면, 시적 언어를 매우 중요시하는 하이데거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존재가 언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최대치로 잘 이룬 표현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언어에 의해 존재가 규정된다는 뜻이 아니다. 존재의 의미를 개방하는 언어의 역할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실존주의 선언을 만나게 된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곧 "존재는 언어에 선행한다." 이 멋진 말을 남긴 사르트르 자신은 실존주의를 버리고 구조적 문법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자가 되었지만, 망한 것은 그가 숭배한 마르크스주의이지 실존주의가 아니다. 그는 언어로 존재를 이끌려고 하면 필망한다는 그 자신의 선언의 본이 되었다. 어떠한 의미로는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의 삶으로 자신의 주장을 증거한 참된 철학자일 것이다.
자, 그리고 여기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언어로 존재를 이끌려고 하면 망한다는 바로 이 지점.
심리적 문법이라는 것이 바로 언어로 존재를 이끌려고 하는 그 목적으로 만들어진 장치다. 마음을 언어라고 착각할 때, 소위 심리적 문법이라는 것이 개인의 내면에 형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내사된 문법은 이제 개인에게 당위적 명령어로 작동한다. 문법을 따르지 않으면 그 문법이 작동하는 사회로부터 이상한 사람이나 불순분자로 몰려 추방당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개인은 더욱 자발적으로 문법에 복종한다.
바로 이 방식으로 심리적 문법은 개인에 대한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자신이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요즘 여기저기에서 가스라이팅이라는 표현들을 많이 쓰곤 하지만, 실제 가장 심대한 가스라이팅은 인간에 대한 심리적 문법의 가스라이팅이다. 최고의 가스라이터는 우리의 내면에 있다.
실제의 마음이 아니지만, 마치 자기가 마음인 것처럼 위장해서 우리의 삶을 특정한 의도의 방향성으로 이끌어가려고 하는 모종의 언어적 세뇌장치, 우리는 그것을 지금 심리적 문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근대의 정신을 함축하는 개념인 이념은 대표적인 심리적 문법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당위를 정해놓고, 그 당위에 인간의 삶을 종속시키려는 것이다. 이념은 "언어로 존재를 바꾼다."라는 표어를 갖고 있다. 결국 그 실체는 주술이라는 것이다.
주술은 우리의 입신양명의 복리를 위해 쓰곤 하는 것이지만, 주술을 쓰는 이들이 간과하는 것은 주술 자체가 '잡아 묶는다'는 속박의 기제라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것을 자신에게 묶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 자신이 죄수처럼 묶이게 된다.
그리고 이 존재의 구속상태가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 이유다.
심지어 이러한 종류의 고통은 전염된다.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이는 반드시 타인도 속박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최대치의 인간을 자기가 추구하는 이념대로 통제해야만 자기가 원하던 이상세계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문법의 문제로도 이러한 현상을 살펴볼 수 있다.
문법이 문제가 되는 것은 소통이 되지 않을 때다. 불통이 곧 고통이다. 문법에 고착되면 말이 통하지 않게 된다. 이런 것을 문자주의라고 부른다.
문자주의에 빠진 이들은 자기가 채택하고 있는 문법이 절대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타인에게 그 문법을 계몽하려 하거나, 문법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쉬이 악마화한다. 더 기괴한 방식은 자신이 신앙하는 문법에서 벗어난 이들을 아직 성장하지 않은 야만적 존재로 보거나, 돌봄받지 못한 불쌍한 존재로 보며 안쓰러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선의로 위장된 권력의 의도가 있다. 하나의 문법은 하나의 세계관을 전제한다. 그렇게 자기의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을 긍휼히 여길 수 있을 만큼 더 우월한 세계관이라는 은밀한 의지는 작동된다.
문법은 다소간에 반드시 이러한 권력화의 의도를 내포하며, 권력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에 필연적으로 출현하는 것은 감옥이다. 타자를 감옥에 가두어서만이 권력의 동일성은 지속될 수 있어서다.
그러나 앞서도 주술을 통해 말한 것처럼, 권력 또한 동일하다. 문법을 통해 헤게모니를 획득하려는 권력은 이미 하나의 주술이다. 따라서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타자를 구속하는 이는, 그 자신이 먼저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상태에 놓인다.
심리적 문법을 성실하게 따라 살면 자신에게 가장 이상적인 현실이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이처럼 정작 찾아오는 결과는 더 갑갑한 구속의 상태다. 심리적 문법을 추구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 고통스러워진다.
그렇다고 심리적 문법에서 벗어나기에는 커다란 두려움이 앞선다. 인간에게 심리적 문법이 필요함을 강조하던 이들은, 심리적 문법이 없으면 인간을 지켜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인간은 무엇에도 의지할 수 없으며, 세상은 야만이 지배하게 된다고 우리를 협박해왔다. 공자가 유학을 전개하고, 모세가 십계명을 만들며, 한석봉 엄마가 서슬퍼런 새벽에 떡을 썰고, 프로이트가 이념적 아버지를 내사해 살아가는 자아구조를 주장한 바로 그 방식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정말로 눈치챌 필요가 있다.
우리를 두렵게 만든 것은 실제의 세상이 아니라, 이 협박자들이 우리에게 들이댄 그 그림이었다. 우리는 그 그림 때문에 무서워진 것이지, 실제의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마치 집 밖에는 악마들이 도사리고 있으니, 힘도 능력도 없는 너는 평생 엄마 곁에서 보호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얘기를 사실로 믿으며 우리가 점점 무능력해지고 무기력해진 그 상황과도 같을 것이다.
나아가 이 상황이 더욱 어이없고도 슬픈 것은 이 구속력이 오로지 추상적인 언어에 의해서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누군가가 뻥을 쳤고 그 뻥을 믿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을 전형적인 표현으로 '창살없는 감옥'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보다는 차라리 '원고지 속에 갇힌 인간의 상황'이라고 말해보자. 한국사회에서는 이 표현이 정말로 적절하다. 고급언어를 쓰는 문인들을 시대의 큰어른이나 현자 및 위인처럼 예찬해오며, 그들이 머릿속 소설로 만들어낸 이념의 문법을 우리 자신들의 심리적 문법으로 진지하게 채택해 살아온 조선의 풍조를 중심으로 해서 형성된 현재의 한국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원고지를 자기의 권력을 증진할 도구로 삼고 있는 뻥쟁이들에게 언제까지 힘과 자원을 제공할 것인가? 또 그 뻥에 낚여 우리 자신을 빵 속에 밀어넣는 일을 얼마나 더 지속할 것인가? 우리의 이 대단한 사실적 존재는 대체 언제까지 언어라고 하는 허구를 자신보다 더 대단한 것으로 보며 그 앞에서 스스로 고통받는 일을 자행하려 하는가?
진짜는 가짜 때문에 괴롭다.
존재는 언어 때문에 괴롭다.
우리는 심리적 문법 때문에 괴롭다.
진짜로 존재하는 우리는, 가짜의 언어로 만들어진 심리적 문법 때문에 괴롭다.
우리의 소망은 통일, 이었던 적이 없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 고통받지 않는 것이다. 고통받지 않는 법은 소통하는 것이고, 이념의 구속력을 벗어나는 것이며, 언어의 주술을 파기하는 것이고, 곧 원고지 안에 감금되어 있던 우리 자신의 마음을 흐르게 하는 것이다.
소통은 실은 언어적 교류가 아니라, 마음의 흐름이다. 그러니 참된 소통은 원래 원고지를 벗어나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광경이, 좁은 새장의 창살을 뚫고 나와 무한히 자유로운 저 하늘을 향하는 매의 날갯짓과 무엇이 다르던가?
소통은 언어의 조율이나 통합이 아니라, 자유의 증진이 그 목적이다. 애초 무한히 자유로운 존재 자신의 위상을 바로 찾는 일, 그것이 우리 자신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다.
우리는 우리를 가두고 있는 원고지의 내용들을 살펴보고, 이제 그 위대한 탈출을 모색해본다. 선에서는 이것을 격외선이라고도 부른다. 깨달음은 원고지의 내용을 더욱 수려하게 잘 써가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고지 밖으로 나오는 일에 있다. 바로 지금 이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