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속에 갇힌 한국인 #2

"원고지형 뇌"

by 깨닫는마음씨
e820335b-4f7c-4e71-b57f-ddc477719229.jpg?type=w1600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우린 선 너흰 악" 386세대 DNA | 중앙일보



한국의 한 소식지에서 386이라는 특정세대의 특성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이 그림은 비단 386만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는 차라리 이를 '원고지형 뇌'의 지형도라고 명명해보자.


1960년대의 베이비붐 세대인 히피들을 떠올려보면, 그들의 뇌 또한 이러한 꽃밭의 향기(또는 환각물질의)로 절여져 있었다. 이들은 무슨 일을 했던가? 자기들이 인류의 역사상 가장 깨어난 세대라고 자칭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반전운동, 달착륙, 우드스탁 콘서트, 영성, 생태주의 등등, 인류는 이제 이러한 것들을 향유하는 이들로 말미암아 고통의 역사를 모두 종결짓고 마침내 사랑과 평화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리라는 예언 속에 있었다.


마르크스가 아니라 실은 이들이야말로 어쩌면 근대의 완성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근대적인 훌륭한 소설가들. 이들은 자기들의 소설을 자기들이 쟁취한 미디어의 힘을 빌어 널리 전파했고, 그럼으로써 세상이 자기들의 소설처럼 변하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 위대한 결과, 우리는 커트 코베인을 만났다. 더러운 소설에 기만당해 저 밑바닥까지 추락한 그 절망의 심정을 노래하던 그런지 밴드들을 만났다. 파이트클럽도 만들어졌고, 마릴린 맨슨도 자해의 광대짓을 시작했다. 그 모든 것은 다 저항이었다.


자기들이 세상을 만들어가는 신인 것처럼 모든 사회적 권력을 손에 쥐고 거짓의 소설만을 써제끼던 그 히피 세대를 향한. 자기들이 가장 석화된 수구세력이 되었으면서, 여전히 자신들을 젊게 깨어있는 인류의 개혁자인 것처럼 고귀하게 위치시키려 하던 그 기만을 향한. 차라리 영화 '조커'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묘사였으리라.


이 히피 세대의 특성은 일본의 단카이 세대에서도 드러난다. 베이비붐 세대로서 주어진 물질적 풍요 속에 자기들이 미디어가 비추는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이들 또한, 동일한 저항세력을 만난다. 소위 잃어버린 세대라고 불리는 히키코모리 현상의 주역들. 자기 부모 세대가 약속했던 장미빛 소설이 모조리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어 절망 속에 스스로를 유폐한 무기력의 세대. 또 그 다음으로는 사토리 세대가 출현한다. 희망이 없으니, 아예 희망 같은 것 없이 살아가고자 한 무의욕의 이들이다.


한국은 여기에서 한 20년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동일한 구조를 반복한다. 히피 세대, 그리고 단카이 세대의 그것은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인 그때의 386 그리고 지금의 586에게서도 목격된다. 그에 대한 저항세력의 특성도 동일하다. 지금의 청년세대들이 보이는 무기력이거나 또는 무의욕.


베이비붐 세대들에 대한 저항자들은 공통적으로 어떠한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젊음'의 상실이다. 뒤집어 말해 베이비붐 세대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젊음'이라는 것이 영원한 자기의 특권이라고 간주한다. 또 그로 인해 젊음이라는 것에 필연적으로 집중될 관심과 자원 또한 영원한 자신들의 소유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엄마에게 독점적으로 사랑받던 아이가 성인이 된 후에도 그 자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려는 모습과도 같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베이비붐 세대가 늘 쓰는 소설의 행간에 담긴 진짜 내용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계속 젊음의 특성을 보유하려면 결국 실제의 젊은이들에게 그 젊음의 특성을 빼앗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이런 것을 심리학적 기제로 투사라고 말한다. 실제의 청년들에게 꼰대적인 것을 투사한 뒤, 자기들이 대신 젊은 척하는 그 방식이다. 소위 청년들의 우경화라고 말하는 현상은 바로 이 투사에 의해 일어난다.


자기들이 기득권은 다 갖고 있으면서, 못 가진 이의 저항정신, 못 가진 이가 유일하게 가진 바로 그 젊음마저도 빼앗으려 드는 이 일은 최대치의 독점이다. 그렇게 이러한 이들은 자기가 실제적인 독재자이면서, 자기는 독재에 저항하는 젊은 영혼이라고 스스로에 대해 대단히 착각하곤 한다. 물론 의도적인 착각이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 임의적으로 쓴 소설을 믿고자 하는 신앙행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실체는 그저 모든 사탕은 자기가 다 가져야 한다고 하는 심리적으로 미발달된 유아의 행동양식일 뿐이다. 몸만 커지고, 쓰는 언어와 그 외연적 행동연기만 성숙한 척할 뿐, 실은 아동의 정신에 머무르고 있는 불일치의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숨겨야 한다. 실은 외적으로는 자기들이 빼앗고 있으며, 또 내적으로는 미발달되었다는 사실은 철저히 숨겨져야 하며, 반대로 선하고 아름답게 포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쓰이는 것이 소설이다. 미디어다. '원고지형 뇌'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구성된다. 남들을 속이기 위해 자기를 먼저 속이고자, 온갖 장미빛 고급언어들로 자신의 뇌를 절여가는 것이다. 그런 척하는 고급언어들을 반복적으로 소비하고 있으면, 자신의 존재가 정말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 주술행위로서.


이것이 우리에게서 심리적 문법이 소비되는 방식이다. 원고지형 뇌는 이 심리적 문법의 뽕으로 절여진 뇌다. 젊은 세대들의 뇌가 게임에 절여져 있다고 비판되지만, 실은 그 비판자들의 뇌가 먼저 심리적 문법으로 절여져 있다. 게임 속 세계나, 심리적 문법으로 꿈꾸는 이상적 세계나 동일한 가상현실에 불과하다.


가상현실을 사실에 앞세울 때, 즉 언어를 존재에 앞세울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고통이다. 자기가 이미 다 갖고 있는데 언어로 기만해 여전히 없는 척하거나, 이미 가장 화석화되었으면서 언어로 포장해 자신이 가장 깨어있는 젊음인 척하는 것은 가상현실에 대한 중독이다. 중독의 결과는 언제나 자기 존재를 상실하는 고통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은 부정적인 피드백을 반복적으로 이룬다. 그렇게 언어를 존재에 앞세워 자기를 상실하게 된 이는, 자신의 부재를 견딜 수 없어 다시금 언어에 의존하게 된다. 언어로 가짜 자신을 만들어 자기 존재의 부재를 메워보려 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자신의 존재는 더욱 상실되어가며, 이제 고통만을 양산하는 역기능의 수레바퀴가 끝없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실은 이처럼 다 고통뿐일 때 우리는 화석화된다. 딱딱하게 경직되어야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서다. 이 화석화가 바로 '심리학적 노화'다. 그런데 고통을 낳은 이유를 다시 기억해보자. 자기가 모든 것을 독점적으로 다 갖는 유아의 자리에 집착해서 그 자리를 결코 떠나려 하지 않는 가장 미숙한 정신이 그 이유였다. 그런 즉 '심리학적 노화'와 '심리학적 미성숙'은 동일한 것이다. 가장 늙은 것은 가장 유아적인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상태 속에 있는 이들은 더욱 젊음이라는 것을 희구한다. 늙은 정신에게나 유아적 정신에게나 젊음은 동일하게 소망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자신은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의 이름. 언어의 주술로 자기가 영원히 젊은 존재인 것처럼 계속 소설을 써야만 그 좋은 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에 뇌는 절여지고, 실제적인 차원에서는 그러한 언어의 주술로 남들을 기만해 남들의 젊음을 강탈하고자 하는 의지로 또한 뇌는 절여진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원고지형 뇌가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한국사회를 오늘날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히피가 아니고, 단카이가 아니고, 586이 아니어도, 이것이 우리의 풍토를 형성하고 있다면 우리의 뇌도 동일한 방식으로 영향받게 된다. 비가 오면 어떻든 몸은 젖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영혼까지 젖지 않을 수 있는가?


진짜가 가짜를 상대하다보면 가짜에게 점차 물들어간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여전히 진짜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 구조다. 이 구조가 심리적 문법으로 답습되고 있는 것이다.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괴물을 상대하는 자는 그 자신도 괴물이 된다는 사실을 경계해야 한다고. 자신이 이미 괴물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자기는 독재하는 괴물과 싸우는 정의의 영웅이라고 자기를 믿어 의심치 않는 바로 그 모습이야말로 그 깊은 영혼까지 괴물과 동화된 모습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무수하게 반복적인 괴물과 영웅의 이야기로 절여진 그 원고지를 나가는 것. 사탕 따위는 괴물과 영웅에게 먹고 배탈나라고 던져주고, 우리는 괴물도 없고 영웅도 없는 원고지 밖의 그 미지를 향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의 미지를 발견해가는 일. 해보지 않았던 것을 하고, 해보지 않았던 얘기를 하는 일. 영웅도 모르고 괴물도 모르는 아주 거대한 삶과 존재, 그리고 마음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는 일.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을 엄청 광활한 하늘처럼 꿈꿀 수 있는 일. 이런 것이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바로 그 젊음의 영혼이 아니던가? 미지를 향한 그 장대한 설렘이야말로 영원한 젊음의 실제가 아니던가?


그러면 절여진 회색 단무지에 불과했던 우리의 뇌가 깨어난다. 뇌는 거기에 갈등과 도취의 자극이 있어 원고지형 뇌가 되어 있었을 뿐이지, 실은 뇌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미지다. 우리 앞에 미지가 던져지면 뇌는 그 어떤 관습적 피상성에서도 깨어나 미지를 향해 맹진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뇌가 로미오처럼 전력으로 달려가고 있는 그 미지의 상대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자신.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이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미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얻지 못했을 때, 그 부재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한다. 또한 그러한 소유의 구조를 항구적으로 지속하기 위해 괴물과 영웅의 스토리만을 반복해간다. 결국에는 남에게서 빼앗으며, 빼앗긴 남 또한 또다른 약탈자로 만드는 그 일만을.


다 자기 자신이 없어서, 또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 감히 관심갖지 못해서 생겨나는 일이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향하지 못해서 뇌는 비루한 중독자처럼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무기력과 무의욕으로 점철된 채.


그러나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 관심가질 수 있다는 것을, 또 관심가져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뇌는 이제 신이 난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다니, 거짓된 영웅도 거짓된 괴물도 아닌 오직 진짜인 자기 자신만을 향해도 이제 된다니, 그렇게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영혼의 빛을 발견하는 재미와 감동을 마침내 누려도 된다니, 뇌는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다. 모든 것이 새롭게 회춘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만 진실로 관심갖는 일, 이것이 젊음의 비결이라고 누가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이것이야말로 젊음의 핵심적인 특성일 것이다. 자신을 향한 신비하고 멋진 물음들로 가득차, 그 물음들을 직접 살아내어 확인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향한 모험가로서의 바로 이 면모가.


원고지가 되어있던 뇌 자신도 이처럼 원고지를 떠나는 모험가의 모습을 꿈꾼다. 그 모험가에게 처음부터 반해 있어서 자기도 최고의 모험을 조력하기 위해 함께 떠나려 한다.


우리만 깔고 앉아있던 원고지에서 일어서면 된다.


원고지에 적힌 고급언어들을 우리 자신이라고 착각하며, 또 그 언어들을 지키는 일이 자기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고 오해하며, 속절없이 인생을 낭비한 시간들을 뒤로 한 채, 처음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그 위대한 미지를 향해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떠나는 것은 젊은 영혼.


영원히 잃을 수 없는 인간 자신의 증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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