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란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심리적 문법 안에 갇혀 있을 때, 한국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되어야만 한다고 요구되는 '누군가(somebody)'다.
어떻든 손흥민의 유로파리그 우승과 더불어 내 자신의 어깨도 같이 덩실거려야 하고, BTS가 전세계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마치 내 통장에 저축되기라도 하는 양 뿌듯한 자신감도 느껴야 하며, 어디 해외 신문에서 한국의 시민의식이 높다는 등의 사설이 실리면 그동안 고생했던 내 노력이 이제야 제대로 평가받는구나 감개무량도 해보아야 할 것 같다.
또 왠지 매운 것도 좋아해야 할 것 같고, 크림파스타를 먹은 후에는 에궁 어디 잘 익은 파김치 없어유 라며 구수한 토속적 너스레도 좀 떨어야 할 것 같고, 이유를 알 수 없이 일본은 뭔가 좀 생리적으로 불편해야 할 것도 같으며, 세종대왕과 이순신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셔츠 맨 위 단추를 채우고 경건해져야 할 것도 같다.
그뿐일까. 625, 419, 518, 416 등의 표현들은 이제 더는 단순한 숫자들의 나열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다. 내 자신의 현실이 그 위에서만 성립된다고 가정되는 어떠한 중대성을 계시하고 있는 듯한.
더불어 한국인은 원래 순수한 백의 민족이라느니,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기상의 민족이라느니, 또 저 청학처럼 고결하고 겸허한 도덕적 성품의 선비정신이 한국인의 참된 정신이라느니, 그러면서도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 눈높이를 맞추어 저잣거리에서 함께 울고 공감하는 정겨운 민중애가 또한 한국인스러운 멋을 형성하는 풍류라느니, 그렇게 한국인의 조건을 지시하고 있는 언어가 많기도 많다.
그 모든 역사의식, 지배적인 정치담론, 유행하는 대중문화, 통속의 규범, 깨어있는 시민으로서의 선한 영향력, 그리고 내야 할 세금까지, 한국인이라는 그 '누군가'가 되기 위한 길이 참 험난하기도 하다.
비단 한국인이라는 소재에 대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원래 우리가 '누군가'가 되려고 하는 일은 다 이처럼 힘겨운 과정이다.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우리가 언어로 명령된 그 '누군가'가 되려고 하는 그 일만이 우리의 핵심적인 고통의 이유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착안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누군가가 되는 일이 본래 그렇게도 고통스러운 성격의 일이라면, 그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본래 자연스러운 일 내지 자연스러운 상태란 무엇일까?
두 번째로, 한국인이라는 누군가가 되는 일이 그렇게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면, 굳이 왜 그런 것이 되어야 하는가?
실은 우리는 지금 장자처럼 묻고 있는 것이다.
원고지의 안팎을 자유로이 유영했던 이, 그럼으로써 결코 원고지에 속박되지 않았던 그 대자유의 존재.
그는 사실 장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이(nobody)'였을 뿐이다. 아무 것도 아닌 무용의 존재라서, 그는 누군가의 쓸모로서의 도구와 기능, 역할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었다. 타고난 자유의 본성 그 자체로서.
'누군가(somebody)'는 언제나 도구와 기능, 역할의 이름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언제나 존재를 상실한 그 이름이라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잃고 '누군가'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신의 존재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이(nobody)'와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연스레 눈치챌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장자에서부터 불교에 접근해간다(이것이 선불교다). 그렇게 우리는 원래 무아적 존재다. 열심히 노력해서 무아성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 존재의 속성은 무아성이다.
우리 자신의 존재는 당연하게 '아무 것도 아닌 이(nobody)'이며, 그렇기에 '누군가(somebody)'라는 도구와 기능 및 역할이 될 수 없고, 결국 우리는 '누군가가 아닌 이(nobody)'라는 사실을 확증짓는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누군가가 아니다.
나는, 누군가가 아니다. 다만 나일 뿐이다.
'나.'
무아라고 하는 것의 실제적인 이름이다.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역설이다. 이로써 우리는 선불교에 안착한다.
우리는 이 '나'라고 하는 것을 찾지 못해 그 얼마나 '누군가'가 되기를 열렬히 꿈꾸었고, 또 그 뜨거운 꿈의 열기로 스스로를 불태워 재가 되어갔나. 이 일들의 비극성은 단 하나다. 인류사에서의 어떤 인간도 바로 이 방식으로는 '나'라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는 사실. '누군가'로는 결코 '나'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
누군가가 아니어야 내가 된다, 표현 자체로도 명징하다.
우리가 도구와 기능, 역할이 아니어야,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존재를 다시 찾게 된다. 에리히 프롬과 롤로 메이 등의 존재의 심리학자들, 또 하이데거와 같은 존재의 철학자들도 이 표현을 명징하게 했다.
그렇다면 기억해보자.
우리가 정말로 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한국인이었나? 아니면 '나'였나?
훨씬 더 도약한 어떤 맥락에서도 다시 물어볼 수 있다.
우리는 깨달은 척하는 윤리적 언어를 소비하고 싶은 것이었나? 아니면 깨닫고 싶은 것이었나?
이리 하여, 이제 많은 것이 확실해졌다.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누군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우리 존재는 애초 한국인이라는 '누군가'가 될 수도 없다. 될 필요도 없으며, 되어야 할 당위가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미 한국인이 되라는 명령으로 작동하는 심리적 문법의 밖, 그 원고지 밖에 서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한국인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한번 새롭게 물어보자.
한국인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
그래서 많이 궁금한 것. 알고 싶은 것. 이해하고 싶은 것. 다가가고 싶은 것. 너와 하나여서 좋았다고 마침내는 말하고 싶은 것.
그게 될 필요도, 되어야 할 당위도 전혀 없는 것을 향해, 우리가 지금껏 나아가고 있던 그 이유다.
그것은 미지를 향한 끌림.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인을 살아가는 이들은 다 한국인이라는 미지를 여행하기 위해 온 모험가들이다. 그 가슴이 자신이 반한 것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이처럼 한국인이라는 것은 정해진 정답이 아니라, 가장 열려있는 물음이다. 그러니 특정한 심리적 문법을 따라야만 한국인인 것이 아니다. 한국인이라는 것을 모험하고 있는 그 모든 방식으로 한국인이다.
그렇게 한국인이라는 것은 더욱더 커져만 간다. 사랑이 미지를 키운다. 결국에는 자유의 이름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다.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것으로도 자유로운 그 완전함의 일에 성공했다고.
모험이 성취된 것이다. 원고지의 안팎을 자유로이 노니던 장자처럼. 아니 이것은 그 '누군가가 아닌 이(nobody)'의 모험. 바로 '나'의 모험이다.
한국인에게는 한국인이라는 것이 가장 미지다.
(한국인인) 나에게는 나라는 것이 가장 미지다.
이렇듯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일은, 우리 자신을 향한 가장 오롯한 관심의 일이었다.
결국 원고지의 안팎 어디에서건 우리가 할 일은 단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이 '누군가'인지에 대해 써진 그 모든 소설을 기각하고, 스스로 '누군가가 아닌 것'을 묻는 일.
곧, 자기 자신에 관해 진심으로 관심갖는 일.
그 일 속에 있는 한, 우리는 자유며, 영원한 자유다.
나는 자유롭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것이 한국인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