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속에 갇힌 한국인 #4

"원고지 밖에서 배우는 나"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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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글이 써질지 모르니 제목은 나중에 단다. 그러면 글쓰는 일이 재미있어진다. 제목에 맞추어 목차를 구성하고 그에 따른 각각의 요소들을 채워나가는 방식, 곧 일부러 분리시킨 후 다시 통합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면 언젠가는 졸려진다. 무슨 정치활동처럼 글이 엄숙하고도 신성한 의무가 되며, 이제 점점 쓰기 싫어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원고지에 써가던 방식의 최후일 것이다. 자기계발, 자기실현, 성장, 성공, 진정한 자신, 이런 것들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마치 신과 같은 전지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집필하려 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하기 싫다. 다 귀찮고 피곤하며, 염증이 난다.


놀이가 숙제가 되었을 때 이러한 결과가 생겨난다.


원고지는 실은 재미있게 놀기 위해 만든 발명품이다. 원고지의 창살은 우리 자신을 제약하기 위해 일부러 쳐놓은 것. 그래야 재미가 생기기 때문이다.


다른 여러 게임들의 구조를 떠올려보라. 축구에서는 멀쩡한 손을 쓰지 말라 하고, 농구에서는 공을 잡고 달리면 안된다고 한다. 그렇게 임의적인 제약을 가함으로써 오히려 재미가 창출된다. 레고블럭도 100000개가 주어지면 아무 것도 못만들지만 100개만 주어지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재미있게 만들어낼 수 있다.


재미라는 현상은 자유와 관계된다. 우리가 재미를 느끼는 순간에 우리는 분명 우리 자신의 자유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자유가 허락되었지만, 그건 너무 커다란 것 같아서 대부분의 우리는 실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방편이 바로 제약의 규칙이다. 쉽게 말하자면, 일부러 울타리를 쳐놓은 후에 그 울타리를 뛰어넘는 자유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제약이라는 상대성을 설정함으로써 역으로 자유를 느끼고자 하는 상대적 자유의 방식이다.


어떻든 여기에는 분명하게 자유를 향한 지향이 있다. 자유가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더욱 그 자유를 증진해가고자 하는 경쾌한 율동이 있는 것이다.


원고지도 처음에는 분명 이렇게 신나는 소재였을 것이다. 원고지에 적힌 언어들이 우리 자신을 만들어준다는 착각 속에서, 그러니 더욱 잘 써가야만 하는 심각하고 비장한 숙제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어떤 때 재미를 잃는가? 여러 방식으로 대답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소유라고 대답해보자. 처음에는 재미있던 것도 그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빠르게 재미를 잃어간다. 이제 그것은 우리가 지키고 다스려야 하는 과업이 된다. 그래서 실은 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된다. 그런 것이 없어져야 비로소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토록 좋아했던 것이 이제는 사라지기를 바라는 이 소망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하다. 우리 부모에게 그랬고, 우리 연인 및 배우자에게 그랬으며, 우리 자식에게도 그랬다. 사랑이 소유에 의해 가려져 일어난 좌절이다.


사랑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그렇기에 사랑하는 일은 재미있다.


우리가 원고지에 우리 자신을 써보았던 그 최초의 순간을 기억해보자. 거기에는 분명 자신을 향한 사랑이 있었다.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한번 사랑해보고자 했던 그 가슴의 울음이 있었다. 또 그러한 울음이 사람들에게도 큰 울림이 되던 순간들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느 순간 착각해버리고 말았다. 사랑이라는 것을 영구히 내 자신의 것으로 얻어내는 방법을 찾았다고 오해해버리고야 말았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원고지 위에 사람들이 좋아할 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써내려가는 일에 매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사람들에게 인기있을 소설주인공처럼 자기를 꾸며낸 그 모습을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고 실체적으로 믿게 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다 소유하려는 의지에서 벌어진 일이다.


문자언어. 우리는 이 지점에서 문자언어가 이 소유의 기제와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소유는 저장의 가능성으로 실현된다. 문자언어는 바로 그 저장의 목적으로 발명되었다. 인간문명의 발전은 전적으로 이 문자언어의 활용에 입각해 가능한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결국 우리는 정보화사회로까지 진입해왔다. 문자언어를 얼마나 잘 다루는지의 역량이 사회적 성취를 결정짓는 시대다.


이러한 풍조가 심리적 문법으로 작동하고 있는 속에서 결국 원고지에 적히게 되는 실제적인 내용은 단 하나다.


"나는 안다."


'아는 나'라는 것을 우리는 가장 소유하고 싶어하며, 또 그러한 앎의 자격을 갖춘 나를 소유함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라는 것은 그렇게 우리가 사랑했던 그 아름답던 실재로부터 한낱 소유의 이름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물론 소유가 나쁜 것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풍요로움이 우리에게 나쁠리가 없다.


문제는 오직 이것뿐이다.


사랑은 소유로는 이룰 수 없다는 사실.


곧, 우리가 정말로 사랑해보고 싶던 우리 자신은 소유의 의지 속에서는 상실되고 또 망각되고야 만다는 사실.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 소유의 기제 속에 편입된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사랑은 갈 곳을 잃었고, 그로 말미암아 자유는 사라졌으며, 결국 우리는 재미가 없어졌다. 우리 자신으로 산다는 일은 더는 재미있지 않다. 무겁고 힘들다. 끝없는 피로와 무기력감의 이유일 뿐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것은 원고지 속에 갇히게[소유되게] 된 것이다.


"나는 안다."라고 하며 자기가 앎의 주체라고 믿어 싶어하지만, 수감의 상황은 자신이 그저 앎의 노예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릴 뿐이다. 노예라서 우리는 화가 나고 우울해진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척 화가 나고 우울해질 때를 떠올려보자. 거기에는 반드시 그러한 정서를 유발하는 어떠한 앎이 있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그 앎이 삶에 만족스럽게 작동하지 않아 우리는 화를 내고 속상해하며 끝내 우울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앎에 의해 우리 자신의 가치를 결정짓고 있는 '아는 나'로 위치해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 자신이 아는 앎이 삶에 작동하지 않으면 흡사 자신의 존재가 무가치한 존재라고 부정당하는 것만 같다. 주인의 명령을 유능하게 수행하지 못해 자신의 존재가치에 위협을 느끼는 노예처럼. 이와 같이 "나는 안다."라고 하는 표현은 실은 우리를 겁박하고 있는 존재론적 감옥인 것이다.


근대를 시작한 데카르트의 선언을 다시 기억해보자.


"나는 안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에서부터 앎의 저주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정당하게 존재할 수 있는 현실이 앎에 달려있는 줄 착각하고 앎이라고 하는 것을 절대적인 소재처럼 믿게 되었다. 원래 근대는 신을 대신해 이성을 신앙한 시대다. 그렇게 인간은 신의 노예 대신에 이성[앎]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지점에서 이렇게도 착안해볼 수 있는가?


"안다."라고 하면 할수록 우리가 감옥 속 노예의 상태를 공고화할 뿐이라면, "모른다."라는 말은 어떠한 효과를 가질까?


아니 단순히 말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진짜로 모르는 존재가 된다면? 아주 적극적으로 몰라진다면 우리에게는 대체 어떠한 일이 생길까?


우리는 자유다.


과도한 숙제처럼 늘 제대로 알아야 하고, 좋은 것을 알아야 하고, 더 나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그 모든 앎의 강박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롭게 된다.


더 단순하게도 이해해볼 수 있다.


우리가 모르는 존재라면, 누가 유능하지 않은 우리를 노예로 쓰려 하겠는가?


우리는 흔히 우리가 무지한 존재가 되면 노예가 된다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적인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다. 어설프게 아는 이들만이 노예가 된다. 특히 자기가 좀 안다고 생각하는 이는 어김없이 노예의 상태로 포섭된다. 동일한 앎의 규칙을 신봉하고 있으니 조종하거나 통제하기도 쉬운 것이다.


우리의 삶이 막혀서 고통스러울 때도 떠올려보자. 어떤 분야에 대해 우리가 뭐라도 좀 알고 있는 주체인 척할 때 삶은 답답하게 막힌다. 왜 그런지의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가 모종의 앎을 소유하고 있을 때, 우리는 좀처럼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삶이라고 하는 것은 늘 변화하는 실시간적인 어떤 내용들을 우리에게 펼쳐낸다. 우리가 그 내용들을 따라 가지 않으면 우리는 도태된다. 이것은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적응과 조화의 사실적 문제다.


이처럼 삶을 따라간다는 것은 결국 삶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스승이라고 불릴 만한 참된 것은 사실 삶뿐이다. 그 자신의 삶이 그 자신을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뭘 알고 있는 척하고 있으면, 게다가 그 앎이 항구적인 것이기라도 한 양 소유의 기제 속에서 아는 척하고 있으면, 삶으로부터 우리는 배울 수 없게 된다. 늘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앎과, 실제 펼쳐지는 삶과의 갈등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결국 자기 자신의 삶과의 투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삶과 싸우고 있는데 그 삶이 행복할리가 만무하다.


삶으로부터 정말로 재미있게 잘 배우는 방법,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몰라지는 것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모르는 상태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삶은 가장 위대한 스승, 가장 유능한 과외선생님, 또 가장 친절한 안내자. 삶 앞에서 뭘 아는 척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모르는 존재로서 삶의 얘기들을 듣고 있으면 삶이 알아서 다 알려준다. 가장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어설프게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잘 알게 된다.


완전히 몰라진다는 것과 완전히 알게 된다는 것은 실은 동일한 현상이다.


이것을 소유와 자유의 문제로도 이해해볼 수 있다.


소유는 어설프게 붙잡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사라질 것을 마치 자기가 붙잡고 있으면 영구하게 지속될 것처럼 그러고 있으니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 어설픈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도 적응과 조화가 어려운 어설픈 존재가 된다.


반면 자유는 이제 그 유효기간이 끝나가는 것을 아예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날 수 있다. 날아서 다시 또 맛있는 열매를 생생한 상태로 따올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미래로 우리 자신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 무척이나 좋은 일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좋은 방향성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재미가 있다. 자유, 사랑, 재미, 이것은 언제나 함께 작동하는 한통속의 일이다.


앎의 소유와 삶의 자유, 우리는 이제 이렇게 쉽게 이해해볼 수 있다.


전자의 제약을 후자가 넘어서는 그 감각을 우리는 재미라고 말한다. 그러니 애초 원고지는 넘어서라고 만들어진 것이다.


원고지에 우리가 적는 그 모든 말은 근본적으로 다 거짓말. 또 그렇게 반드시 거짓말이 되라고 우리는 열심히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또는 우리가 언어로 우리 자신을 멋지게 창조하고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오직 하나, 우리가 지어낸 그 어떤 우리 자신의 모습보다도 실재의 우리 자신은 더욱 거대한 자유라는 사실을 만나기 위해 쓰는 것이다. 원고지 밖에서.


나는 알고 있지 않다. 나를 모를 뿐이다.


그러면 삶이 와서 그 자신을, 바로 '나'라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나를 배워간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그 일이 시작된 것이다. 이로써 이 글의 제목은 '원고지 밖에서 배우는 나'라고 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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