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속에 갇힌 한국인 #5

"존재의 아픔"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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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 보자. 원고지 안에 적힌 문장들을 살펴보자.


1) 철수는 착하다.


이 문장을 보며 우리는 철수라는 존재에 대해 핵심적인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착각이다. 이 문장은 철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 문장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단지 '착하다'는 속성뿐이다. 그러나 존재는 속성이 아니다.


만약 존재가 속성이라면, 철수는 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존재가 조건화의 감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곧, 존재의 자유가 봉쇄당했다. 이처럼 존재는 무조건적으로 존재한다는 그 자유의 사실을 드러낼 수 없다면, 우리는 존재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며, 핵심에서 가장 멀어진 것이다.


또 다음 문장을 보자.


2) 철수처럼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인간을 위한 예의, 그 작은 투쟁이었다.


속성은 이제 이념이 된다. 더 많은 이가 그러한 속성을 추구해야 정당하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은 가상현실을 펼쳐내고 있는 이 이념은, 표현 그대로 더 많은 이를 조건화의 아우슈비츠 속에 수감시키려는 목적을 갖는다. 그러나 문학적 수사학이 마치 이것이 이념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노골적인 지시가 아니라, 하나의 은근한 암시로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정치병에 걸린 소설가들도 이러한 방식을 자주 활용한다.


이런 것을 '비지시적 최면'이라고 일컫는다. 윤리의 기제가 대개 이 비지시적 최면에 동원된다. 더 쉬운 말로는 '선동'이라고 할 것이다. 명령체계를 상대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여, 마치 자기의 의지로 그러한 선택을 이룬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남들 보기에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나쁜 일을 하게 되는 이상한 모순적 상황[인지부조화의 상황]은 바로 이 선동에 의해 주요하게 발생한다.


이것은 존재의 핵심에서 최대치로 멀어지는 방식이다. 존재를 향한 독재의 의도 속에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속성을 보편적 가치인 것처럼 절대화한 뒤 그 속성으로 드러나는 존재만이 정당한 존재성을 가진 것처럼 강압하는 것이 독재다. 그래서 독재자의 가장 친밀한 도구는 원래 윤리다. 독재자는 절대로 비윤리적이지 않으며, 윤리를 향한 강렬한 의지 속에서만 독재를 한다.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윤리적 모습 같은 것을 미학적으로 예찬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독재의 성향이 아주 농후하게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보편적 이성, 정치적 계몽주의, 시민정신, 윤리, 이념, 선한 영향력, 이런 것들의 기만적인 독재에 아주 신물이 나 구토를 시작했던 사상사의 전통이 있는데, 이를 실존주의라고 한다. 사르트르가 아직 실존주의자였던 당시 그는 자신의 걸작소설 『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탱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썼다.


"아무 일도 없었다. 존재했다."


그리고 다음의 문장을 살펴보자.


3) 철수는 착하기를 그만두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존재했다."와 "철수는 착하기를 그만두었다."는 동일한 의미를 가진 두 문장이면서, 동시에 첫 문장은 철수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부연해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속성에 대한 거절이 시작된다. 철수도 아마 심대한 독재에 질렸으리라. 그래서 그는 자기가 존재하려면 착해야만 한다고 믿던 그 속성을 이제 그만두려고 한다. 즉, 존재가 속성에 달려있다는 착각을 해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사르트르의 표현 그대로다.


"아무 일도 없었다. 다만 존재했다."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존재하려면 그 속성이 필수적이라고 믿던 조건을 거절하니, 오히려 존재가 전면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철수는 착하기를 그만두었다."라는 이 문장은 기존의 문장들과는 달리 존재를 향해 다소간에 기능하기 시작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철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해 무엇인가가 지금 말해지고 있다. 철수가 착하든 착하지 않든 간에, 그런 속성들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 존재의 무조건성을 눈치채는 일에 우리는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또 다음의 문장을 살펴보자.


4) "착한 모습으로 하루하루 시간만 메워가는 것, 삶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지 않을까?" 어느 날 철수는 몹시 궁금해진 것이다.


이제 철수는 묻고 있다. 철학적 탐구자로 묻고 있다. 갈매기 조나단처럼 묻고 있다. 묻는 철수를 통해 우리도 물음을 발견한다. 거울처럼 우리 자신을 향해 있는 그 물음을.


자기 자신이 속성으로 구성된 그 누군가(somebody)인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살아있음, 곧 자신의 존재함에 관해 묻는 이 물음은,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이 현존재로 깨어난 순간이다. 실존의식이라고도 말한다.


존재하면서 자신의 존재함을 물을 수 있는 존재를 현존재라고 부른다. 이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에 관해 묻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보다는 파도가 바다에 관해 묻게 된 상황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지 모른다. 공기처럼, 대지처럼, 그것 위에서 또는 그것을 통해 사는 일이 너무나 당연해서 그것을 쉬이 망각하고 있던 이가, 이제 그것의 중대성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의미.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라는 것이 출현한다.


자신의 존재는 그 얼마나 중대한 것이었던가, 곧 얼마나 의미로운 것이었던가.


삶에는 속성놀이로 이루어지는 하루하루의 연극 이상의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라고 철수가 물었을 때 그는 의미를 묻고 있던 것이다. 자신의 삶의 의미, 자신이 존재한다는 그 의미를.


그런데 이 의미라는 개념은 매우 오해되기도 한다. 자신이 자신에게 또는 남들이 자신에게 부여한 속성이 의미로 곧잘 착각되곤 하는 것이다. 속성을 가치화해서 그것을 수호해가는 일을 의미라고 생각하는 일은 빈번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만의 방식으로는 우리는 결코 의미로운 존재로서 자신을 실감하지 못한다.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 의미로운 존재야."라고 철수가 부르짖을 때, 이것은 실은 무의미성에 대한 발악이다. 자신의 삶이 실은 무의미하다고 경험하기에, 속성에 거짓의 의미를 부여해 그 무의미성에 저항해보려는 헛된 시도다.


오히려 우리에게 의미라는 것이 개방되는 지점은, 아니 애초 우리가 의미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그 가능성의 영토는, 속성을 먼저 기각한 뒤의 그 자리다.


존재는 의미사건이며, 존재가 드러나야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니 속성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가로막고 있으면, 우리는 영영 의미롭게 드러나지도 못하는 것이다.


'이념적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혼동하는 경우가 대표적인 이 경우다. 평생 이념을 가치화해서 살아오던 이가, 자신의 삶이 전적으로 공허하기만 하다는 무의미성을 조우하게 되는 일은 필연적이며 또 전형적이다.


철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인가?


원고지 안에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원고지 밖을 향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이 특정한 속성으로 규정된 원고지 밖을 향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밖을 향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철수는 지금 자기 자신을 벗어나고 싶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그 속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다. 그는 자신을 초월하고 싶다.


자신의 존재를 향해.


그가 익히 알아온 그 모든 속성으로 구성된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다 포기해서라도, 다 버려서라도, 그는 자신의 존재를 바로 향하고 싶었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일이 적절하리라.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존재에 베팅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무조건적으로 자유롭다는 그 사실에, 그렇게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정당하다는 그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음에.


철수는 이제 원고지에 적힌 문학적 수사학의 속성들에 의존해 자신을 세우지 않는다.


원고지 속에 위치한 그는 원고지 밖에 있을 진실한 것을 꿈꾼다. 자신이 정말로 근거할 수 있는 진짜 든든한 것을.


원고지 안에 있던 것이 원고지 밖을 꿈꿀 수도 있다는 이 사실 자체야말로 기적적인 것이다. 존재의 아우슈비츠 속에 억압되어 고통받던 자신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기적.


원고지 이상의 것, 원고지를 초월한 것을 향해, 원고지 안의 것이 비상하기 시작했다.


다음의 문장을 보자.


5) 이제 푸른 하늘이 철수의 엄마였다.


원고지 안의 것이 원고지 밖을 향하려는 방식을 우리는 시(詩)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 형식을 가리키는 표현보다 실은 더 큰 것이다.


철학자는 결국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물리학자도 시인이 될 수밖에 없으며, 종교인도 그렇고, 사업가도 그렇다. 차라리 이렇게 얘기하자. 인간은 마침내는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자신의 생활권의 사면을 언어로 구성해 만들어놓은 인간이, 언어의 벽을 넘기 위한 시도로서 또 언어를 쓰게 되는 일이 불가피하다고 할 때, 그 언어는 시적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적 언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가 제안한 바에 따르면, 그것은 존재를 개방하는 언어다. 그런 즉, 근본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언어이고, 그렇게 역설의 언어이며, 삶의 언어다.


삶의 언어는 자기의 일상을 구구절절 스토리텔링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커피숍에서의 수다나, 상담소 의자에 앉아 자서전을 쓰는 일, 소주 한 잔과 함께 털어놓는 진솔한 자신의 과거사 등은 삶의 언어와 매우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런 말들은 얼마나 무수히 말해진 말들인가.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부도수표처럼 남발해온 언어들이다.


종교철학자 틸리히를 참조하면 조금 더 이해가 쉬워진다. 그는 가장 진실된 역설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용납되어선 안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실은 이미 그 존재가 용납되어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한번 용납해보고자 하는 용기, 그것이 바로 '존재에의 용기'라고 틸리히는 얘기한다.


돈도 잘 못벌고, 사회적으로 성공적인 직업도 갖지 못했고, 어떤 계급적 성취도 이루지 못해서, 그렇게 특정한 속성의 조건들을 달성하지 못해서, 이 모양 이 꼴로는 존재해선 안될 것 같은 죄책감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이 이 모양 이 꼴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


이처럼 우리에게 계속 강요되고 있던 속성의 당위와, 우리에게 이미 허락되어 있던 존재의 사실 사이에는 어떠한 핵심적인 것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커다란 아픔.


존재의 아픔.


우리 존재가 전적으로 부정당했던 그 막대한 아픔.


우리는 어떠한 성취를 이루지 못해 아팠던 것이 아니다. 그 성취를 이루지 못하면 우리의 존재가 부정당한다는 저주 때문에 아팠던 것이다.


철수도 그래서 아팠고, 그 아픔이 원고지 안으로 그를 이끌었으며, 또 나아가 원고지 밖을 꿈꾸게 했으리라.


우리가 실증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되찾게 되는 때는 언제인가?


자신이 얼마나 아팠는가를 이해할 때다. 그리고 그 아픔이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한 바로 그런 아픔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다.


이 아픔에 대한 이해가 시를 낳는다.


곧, 존재의 사실에 대한 이해가 시를 낳는다.


그렇게 낳아진 시는 시 자신을 통해 존재의 정당한 모습을 직관할 수 있게끔 돕는다.


그래서 시는 존재의 언어다. 존재가 존재 스스로를 밝히고자 쓰는 언어다.


철수에게는 엄마가 없었다. 엄마가 없으면 존재해선 안되는 잘못된 아이라고, 부족하고 못난 존재라고 그는 믿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착하다'는 속성을 부여하려 했을 것이다. 엄마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가정된 그 속성을 통해, 자신에게 엄마처럼 되어줄 관계의 대상들을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해 원고지에 공허한 언어들을 거듭 적어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이 철수를 고통스럽게 했다.


엄마가 없는 것이 아픔이 아니라, 엄마가 없으면 존재해선 안된다는 바로 그 속성의 저주가 그를 그토록 아프게 한 것이다. 또 그 저주를 진리로 믿으며 행한 모든 일은 오히려 저주를 더욱 권위있게 공고화시키는 그 일이 될 수밖에 없었기에 철수의 아픔은 영영 아물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원고지 안에서 철수는 도무지 아픔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원고지 밖의 푸른 하늘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아무 잘못이 없는 온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늘 비추어주고 있던 것만 같던 그 맑은 거울을.


하늘이 유구한 세월을 늘 그렇게 든든한 하늘로서 존재해왔듯이, 철수 자신도 그렇게 존재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던 그 든든한 존재의 사실을.


엄마가 없던 철수는 하늘을 얻었다.


원고지 안의 것이 원고지 밖을 얻었다.


존재해선 안된다고 믿던 것이 존재의 사실을 얻었다.


자신을 존재하게 해준다고 착각하던 그 어떤 속성보다도, 자신을 진실로 가장 존재하게 하고 있는 그 존재 자체의 의미를.


원고지 안의 것들은 다 아프다. 근본적으로 아픈 것만이 원고지에 쓰인다. 쓰고 또 쓰면 더는 아프지 않아질 것이라는 소망으로 계속 쓰인다. 그러나 반복으로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프다, 아프다, 를 반복해서 얻는 것은 더 큰 아픔, 아물지 않는 아픔. 또는 아픔의 전염. 다른 이들도 자기처럼 아파지면 자기가 덜 아파질 것이라는 주술. 그 공허함.


보자, 보자, 우리가 일단 살펴봐야 할 것은 원고지 안의 문장들이다.


어떤 문장이 우리를 선동하고 있는가? 우리가 '어떤 인간다운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옳은 일일지' 그 속성을 은밀하게 가치화하고 있는가?


온갖 아름다운 수사학으로 우리에게 친밀한 천사처럼 다가오고자 하던 바로 그 문장이 우리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다. 우리 자신을 아프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 보자, 보자, 우리가 정말로 살펴봐야 할 것은 이 존재의 아픔이다.


원고지에 뭐라고 썼든 간에, 원고지에 쓰일 수밖에 없던 것에는 존재의 아픔이 있다는 것. 허공에 점을 찍을 수 없어서 피치 못해 원고지에 찍은 것이다.


원고지에 떨어져 그것은 더는 점이 아니다. 번져간다. 글자들은 흐려진다. 문장들은 무용해진다. 원고지 자체도 너덜너덜해질 것이다. 더는 원고지에 의식이 머물지 않는다. 원고지 밖에 있는 지금 이 자신은 그동안 원고지 안에 유폐된 것처럼 얼마나 아팠었단 말인가? 원고지가 아니니 말은 바로 전환될 것이다. 내 자신은 얼마나 존재하고 싶었는데. 또 순간 전환된다. 지금 이렇게 얼마나 존재하고 있음인지.


우리 자신이 무슨 글을 썼든 간에, 그 글이 우리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우리 자신의 존재를 만나게 되었다면.


그러면 시다.


시는 언어 바깥을 향하는 언어. 자신의 언어됨을 스스로 포기하는 언어. 존재의 사실을 밝히고자 아침이슬처럼 저녁노을처럼 자신의 사라짐을 준비하는 언어.


존재의 아픔이 시를 낳으며, 그 시를 밟고 존재가 스스로의 자리로 도약한다.


그래서 시는 아름다운 것이다. 존재를 향해 다 바치는 사랑이 담겨 있기에.


그것은 프시케의 사랑. 인간의 영혼이 가진 순수한 빛. 푸른 하늘을 향해 자신을 다 던진 인간의 영혼은 실은 푸른 하늘을 향해 비상하고 있던 것이다.


자기가 수호해야 한다고 믿던 속성을 최대치로 포기하니, 최대치로 존재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을 최대치로 아프게 했던 그 일을 다 갖다 버리니,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최대치로 다 회복되었다.


푸른 하늘에는 점을 찍을 수 없어, 그것은 흐른다. 아픔 때문이 아니라 기쁨 때문에 흐르는 것도 있다.


존재의 기쁨, 이제 그것이 철수와 하나가 되어 흐르고 또 흘렀다. 철수에게서 영영 떠날 줄을 몰랐다. 철수가 존재한다는 핵심적인 사실은 그런 의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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