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은 자아"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자아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이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 같아서 갑갑하다고 경험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그것이 자아의 심정이다. 자아는 자신이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작용하는 구속력을 해지하기 위해 능력을 키우거나 자원을 모으려 한다. 힘이 있으면 자기가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의 힘이 아무리 강해져도 그 힘만큼 구속력도 강해진다. 일상적인 예로, 돈을 많이 번 이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따라 새롭게 다가오게 된 또 다른 구속의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왜 이러한 일이 생겨나는지는 분명하다.
자아는 지금 갇힌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아 자체가, 가두고 있는 그 감옥으로서의 주체다.
감옥이 아무리 커진다고 우리가 감옥에서 벗어나게 되는 법은 없다. 감옥의 구속력만이 강해질 뿐이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비유해보자.
자아는 종종 자신을 원고지에 갇힌 비극의 주인공처럼 형상화하지만, 실은 자아 자신이 바로 원고지라고.
원고지인 자아는 자기 위에 여기저기서 주워온 고급언어들을 최대치로 늘어놓는다. 그리고는 그것이 바로 세계라고 말한다. 그렇게 자아는 자기가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는 창조주라고 스스로를 생각한다. 또 자기가 언어로 만든 것이니 당연히 자기를 세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은 세계라는 이름으로 자아라는 원고지 안에 감금된다. 주권을 빼앗기고 자아라는 독재자의 권속이 된다.
그런데 자아는 이러한 상황을 오히려 거꾸로 해석한다.
이 세상에 무수하게 소외되어 있는 그 반짝이는 원석들의 다양성을 자기가 지금 다 알아봐주고 받아줌으로써 자기 안에 곱게 수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외로운 고아 같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제 자아 자신이라는 자상하고 따듯한 큰 품의 엄마를 만나 비로소 마음편히 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유명한 내면의 아이놀이, 곧 '인사이드아웃 놀이'다.
자아는 지금 자신이 사랑의 주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다 사랑할 거야."
이것은 자아의 대표적인 목소리다. 윤리적 주체가 내는 목소리다.
우리가 통속적으로 자기를 위해 사는 일은 이기적이라고 말할 때의 그 의미라면, 우리가 그 이름에서 갖는 선입견과는 달리 자아는 결코 이기적이지 않다. 오히려 자아는 반대로 말한다. 나를 위해 살면 안되며,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자아는 엄마에게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자기 엄마의 모습을 닮아 자아는 만들어졌다. 마치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품어주는 자처럼, 흡사 자기가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다 사랑해주기라도 하려는 듯한 제스처의 주체로 활동한다.
그래서 자아라는 원고지에는 다 그런 일들만 적힌다. 자기가 얼마나 착하고, 정직하고, 순수하며, 혹시라도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 있다면 그러한 것을 스스로 자아비판하려 하는지를, 그렇게 자신이 얼마나 타인의 아픔과 안타까움에 공감하고 그러한 타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 하는지를 참 열심히도 묘사해낸다.
이처럼 자기가 얼마나 이타적인 노력을 하는 선인인지를, 또는 그동안 이타적으로 살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처절하게 비극적으로 반성하는 죄인인지를 시종일관 고백하는 윤리적 주체의 모습이 바로 자아의 사실적인 모습이다.
자아는 엄마에게 그렇게 배웠던 것이다.
그러한 윤리적 모습을 보여야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고.
이로써 우리는 자아의 소망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자아는 사랑받고 싶다. 아주 많이 사랑받고 싶다. 자아에게는 아주 많은 사랑이 필요하다.
자아에게는 사랑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아는 원고지에 세상의 좋은 것들을 그렇게나 가득 채워넣으려 한 것이다. 그러면 자기의 허기가 메워질 줄 알고.
자아는 자기가 원고지에 그 많은 것들을 담아내면, 곧 자기가 다 사랑하는 자가 되면, 자기도 동일한 크기로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아로 살고 있을 때 자주 궁리하던 그 일이다. 우리 자신이 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면, 그 사람이 언젠가는 우리를 사랑해주지 않을까 하고, 우리는 분명 '사랑을 조종하는 방식'을 획책했다.
우리는 정녕 몰랐던 것이다. 아니, 자아는 전혀 모르고 있던 것이다.
사랑을 자신의 힘으로 얻어낼 수 있다고 획책하는 그 방식으로는 사랑은 영영 우리의 곁을 떠나고 만다는 사실을.
사랑은 자아라는 감옥에 통제되어 갇히면 시들어 죽고 만다. 자아가 늘 갑갑한 삶의 불만족을 경험했던 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랑이 늘 자기의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자아는 알아야 할 것이다. 자아 자신이 언제나 사랑을 갑갑하게 가두려 했기에 그 사랑이 생명력을 잃어 죽고 말았다는 것을.
절대로 사랑을 얻을 수 없는 방식으로 자아는 반드시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믿으며 그 일을 반복한다. 그러니 자아의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랑은 더욱 보이지 않게 된다. 완전히 찾을 수 없다. 깜깜하다. 자아가 밝은 빛의 세계라고 만들어낸 것의 실체는 바로 이러한 무명(無明)의 어둠이다.
그러면서도 자아는 자신이 세상에 가득한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빛을 향해 나아가는 정의의 용사 같은 것이라고 스스로를 착각하곤 한다. 그 어둠을 자기가 만들었으면서, 그렇게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의 어둠 속에 끌어넣었으면서, 곧 죽어도 자기는 선한 존재라고 믿으려 하는 것이다. 이 내로남불의 어리석음이 자아가 본질적으로 내포한 무명의 속성이다.
원래 가장 어두운 것이 가장 밝은 빛을 참칭한다.
자기에게 그것이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가장 사랑이 부재한 것이 자기가 다 사랑하는 주체인 척한다. 자아가 그러하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아가 있는 곳에 사랑이 없고, 사랑이 있는 곳에 자아가 없다고.
사랑, 우리는 사랑에 대해 얘기해보자. 어렵지 않게, 우리가 실증적으로 사랑을 경험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돌이켜 이해해보자.
우리가 물이 필요한 상황에서 물이 우리 앞에 주어졌다. 우리는 이순간 분명 사랑을 경험한다. 사랑받는다고 우리는 느낄 것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일들이 생겨났을 때, 우리는 사랑 속에 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사랑인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랑의 핵심이다. 이 세상에서 그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 일이 우리 자신만 빼고 일어난다면 우리는 그런 것을 사랑의 일로 경험하지 않는다.
사랑의 가장 쉬운 정의는 '오롯이 우리 자신을 위해 일어난 좋은 일의 느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눈치챌 수 있겠는가?
사랑은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바로 그 일을 통해 가능한 것이라고.
자아가 절대로 하면 안된다고 엄중하게 눈을 부라리며 성내던 그 일, 바로 '나를 위해 사는 일' 속에 사랑이 있다.
그러니 자아에게는 사랑이란 도무지 불가능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원하지만 가장 얻을 수 없는 구조 속에 있다. 자기가 그것 자체를 실은 부정하고 있기에.
자신이 다 사랑하는 주체가 되겠다는 이 구조 안에서는 사랑이 성립될 수 없다. 고작해야 성립가능한 것은 윤리다. 윤리가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오히려 가장 윤리적인 주체가 필요로 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다. 자기가 모든 이를 위해 살겠다며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이는 반드시 자기 자신을 위한 좋은 일의 응답이 절실한 법이다.
그렇게 원하는 것이면서 우리는 왜 얻으려 하지 않는가? 마치 사랑받으면 안된다고 스스로에게 저주를 내린 사람처럼. 자아는 분명한 이 저주 속에 있다. 자아는 생각한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자격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사랑을 스스로 조건화한 뒤, 그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 혼자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자아다. 혼자만 아는 게임규칙을 정해놓고, 멋대로 이 세상과 타인들에게 그 규칙을 종용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자아라고 하는 윤리적 주체는 이기적이다. 남을 위해 산다고 하는 자아의 이념이야말로 실은 이 우주에서 가장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것이다.
반대로 자신을 위해 산다고 하는 그 사랑의 일은 어떠한가? 이것은 오히려 이타성을 목적하진 않지만 결과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좋은 현실을 낳는다.
여기에는 아주 엄청난 역설이 있다.
자신을 위해 좋은 일을 한 자는, 인간에게 그 좋은 것이 허락되어도 된다는 사실을 지금 증거한 자.
그렇게 자신을 위해 자신이 좋은 일을 한 자는, 인간을 위해 인간이 좋은 일을 하는 현실을 창조한 자다.
바로 이러한 현실이야말로 사랑의 실제이자, 사랑의 위대성이다.
우리는 과거의 불교와 현재의 심리학이 공유하고 있는 놀라운 통찰을 이미 배운 바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자신에게 하는 일을 그대로 타인에게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반대로도, 자신이 타인에게 받은 일은 자신이 자신에게 하고 있던 그 일이다.
남을 위해 산다는 미명하에 자신을 희생하고 있던 이가 결국 타인에게 하게 되는 일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바로 희생의 종용이다. 그는 자기가 자기를 희생한 그 크기만큼 타인도 희생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관계에서는 늘 이 쌍방희생의 일이 펼쳐진다. 자신은 진정으로 사랑했는데 상대는 자신을 배신했다고 말하는 경우들을 들어보자. 자기는 상대를 위해 60%를 희생했는데, 상대는 30%만 희생하거나, 또는 상대가 어떤 희생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났을 때, 우리는 아주 가련한 피해자인 척하는 데 익숙하다. 상대를 자기와 똑같은 가스실의 희생자로 만들지 못한 그 원망을 사랑의 이름으로 기만한다.
사랑이 사랑인 것은 그 무엇도 희생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번 질문해보자. 만약 우리 자신에게 사랑이 작용하고 있다면, 그 사랑은 정말로 우리 자신을 희생시키려 하겠는가? 아니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을 구하려 하겠는가?
자신을 귀하게 구하려는 이가, 남의 귀함을 동일하게 구할 수 있다. 인간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그 일을 통해 세상 모든 것에 그 일을 행하게 되는, 일치된 온전함의 존재다.
자신을 사랑하지도 못하는 이가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통속적인 표현이지만 이러한 말에는 분명 진실의 울림이 있다.
우리가 사랑을 배운다고 할 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좋은 일이 일어나도 된다는 그 허락의 방식을 배우는 것이다. 아무 조건없이, 마치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받듯이 자기 자신을 다만 사랑을 향해 열어두는 것이다.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는 일이 일어나고, 졸릴 때 자는 일이 일어나게끔. 그 선(禪)한 일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가장 좋은 일들이 그저 자연스럽게 펼쳐지도록.
정직하게 떠올려보면 실은 우리 자신은 늘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만 놓아두면 반드시 이러한 삶을 회복하게 된다.
자아만 이 모든 것을 자기 안에, 곧 원고지 안에 "내가 다 사랑할 거야."라는 당위적 문법으로 가두지 않는다면.
내 자신은 사랑해야 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받아야 하는 자다.
내가 사랑받으면, 인간 모두가 사랑받는 현실이 출현한다. 이것은 내가 내 자신을 희생해서 사랑한 결과가 아니라, 무엇보다 내 자신이 가장 희생되지 않도록 사랑이 내 자신에게 작용한 결과다.
사랑은 그렇다면 지금 이곳에 있다. 내가 내 자신을 위해 좋은 일들이 일어나도록 내 자신을 개방하고 있던 바로 이 현실에.
그리고 사랑이 있는 곳에 자아가 없다. 이곳은 이미 원고지 밖이다.
원고지는 우리의 책상 어딘가에, 또는 침대맡 어딘가에 소중히도 놓여 있었을 것이다. 아무 문제없고도, 온전하게. 가만 놓아두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던 이 세상 속에.
원고지 밖은 이처럼 다 사랑이며, 원고지도 이미 그 사랑 속에 놓여 있었다. 원고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자기 안의 결핍만을 보며, 또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사랑을 자기 안에 가두려고만 했던 원고지의 좁은 시야가 원고지 밖으로 열릴 때 사랑의 현실은 비로소 드러난다. 자아는 자신이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자아 자신은 한 번도 잃어진 적이 없다. 사랑에게서.
그렇게 사랑이 있는 곳에 자아가 없다. 자아라는 이름의 자기고문의 고통이 없어서, 거기에는 사랑만 있다. 처음부터 사랑만 있었다. 우리 자신을 위한 좋은 일들이 나날이 일어나도 되는 그 자유로운 사랑만이 이 모든 것의 실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