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 속에 갇힌 한국인 #7

"나는 어디에 있을까?"

by 깨닫는마음씨




나를 알고 싶어서, 또 나라는 것이 되고 싶어서, 파푸아뉴기니 제도의 나무들이 베어진다. 원고지들이 만들어진다. 나라는 주체를 어떻게든 얻어보고자 하는 그 뜨거운 바람이 분명 지구온난화에 영향을 미친다. 한석봉의 장원급제는 어머니의 가래떡보다도 오히려 북극곰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렇게 보자면, 나를 주체로 세우는 일은 좀 민폐인 것도 같다. '좋아요'의 댓글수가 촉진하는 도파민에 취해 짐짓 당당하고 화려한 나임을 뽐내도 보지만, 근본적으로는 눈치밥을 먹고 사는 신세다. 어떻든 간에 원고지 위에 "좆밥새끼들아, 혼자 있고 싶으니 다 나가."라고 쓰게 되지는 않지 않은가. '그런 나'라는 것은 추하고 악하다. 민폐를 넘어선 사회의 암덩어리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어떠한 문법에 따라 '나'라는 것을 집필하고 있는 셈이 된다. 패악질을 부리는 경우라도 그것은 특정하게 의도된 목적을 위해 수사학적 효과를 낳아야 할 그 문법적 요구에 대한 봉사로 일어나는 일이다.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는 실은 정부나 사회단체의 검열이 필요하지 않다. 스스로 알아서들 자기 자신을 잘 검열한다. 역설적으로, 나라는 것을 너무나 주장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민폐로 인식되는 '나'이기에, 그만큼 엄중한 자기검열을 통해 세상에 선보여야 한다. 혼자만 잘난 천둥벌거숭이가 아니라, 참 예의도 바르고 인성도 그만치면 된 진국 같은 '나'가 이렇게 꿈꾸어진다. 문법의 이불을 덮고 윤리의 베개에 그 머리를 올리고 누운 엄마의 요람 위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하다.


시작부터 빼놓고 간 것을, 100만 광년을 여행한다 해도 얻을 수 있을리는 만무하다.


아주 긴 노력과 헌신 끝에야 비로소 나라는 것을 알 수 있거나 또는 얻을 수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게 된 것은, 그것이 현재 여기에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 이유다. 그러니 저 끝에 있겠거니 간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여기에 없는 이유는 출발할 때 안 챙기고 떠났기 때문이다. 오직 그 이유다.


이러할 때 우리는 거의 직감한다. 분명히 자신이 중요한 어떤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는 그런 감각이다.


이 감각을 우리는 불안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왜 불안한지에 대한 답을 얻은 것이다.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없어서, 또는 돈이나 집이 없어서, 또는 사회구조가 정의롭지 못해서 우리가 불안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나'라는 것이 없어서 이 자리가 불안하게 경험된다.


그러니 어디에 있든 근본적으로 '내 자리'가 아닌 것만 같다. 불안 속에서는 그런 느낌이 지배적이다. 이 느낌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를 실은 민폐라고 여기게 되곤 하는 것이다.


존재의 수치심이라고 불러도 좋다. 불안은 바로 그것이다. 수치심은 내가 지금 중요한 어떤 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데서 비롯한다. 존재의 수치심은 곧 존재를 망각하거나 상실해서 생겨난 것이다.


바로 이처럼 '나'라는 존재가 없으니, 나로 서는 일이 본질적으로 수치스럽기만 하다. 매사가 불안하다. 흡사 뿌리를 잃은 나무처럼.


그래서 이 불안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나'라는 것에 그렇게도 관심을 가져왔던 것이다. 자신에게 지금 부재한 그것을 어떻게든 얻어보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것이다.


원고지에는 그리하여 '나'라는 존재를 설명해주는 것 같은 언어들만이 빼곡히 적히게 되었다. MBTI 유형, 내 운명의 별자리, 혈액형, 사주팔자, 내 영혼의 타로카드, 나아가서는 BDSM 성향 등과 같은 것들이 <나>라고 하는 명세서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한 것들을 더 많이 모으면 보다 완전한 내가 될 수 있으리라는, 또는 더욱 다양하고 개성적인 나를 알게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우리는 '나 수집가'가 되었다. SNS에서 누가 자신을 뽐내고 있는 그 좋아보이는 경험을 모방해서 그것을 '나'로 수집하고, 힙스터처럼 남들은 아직 모르는 아주 독특한 자신만의 다양성을 보여주겠다면서 그것을 '나'로 수집하며, 또 더 일상적으로는 사회적 성취와 성공의 결과물들을 '나'로 수집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수집해왔든 간에, 불안하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 모든 일로도 나라는 것은 결코 얻을 수가 없던 것이다.


실은 우리가 얻었던 것들은 전부 '나'를 대체하고자 한 그저 언어들. 파푸아뉴기니의 사체들에 무수하게 적힌 '나'에 관한 소설들일 뿐이다.


정말로 '나'를 얻을 수 있는 진실된 것은 오직 '존재(存;在)의 RGB 스펙트럼(sp_ect_rum)'밖에는 없다.


우리 존재는 그 자체로 진동하고 있는 빛(the greatest Light of BEING)이다. 빛은 세 가지의 기본색(basic-色)을 갖고 있다. 레드(r.e.d), 그린(g.r.e.e.n), 블루(b.l.u.e)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것은 인간존재 각각의 고유한 유형을 구성한다.


레드 유형은 선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나 그 내면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외로움이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사람들과의 사교활동을 좋아하나 그 내면에는 가끔 혼자 있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이들은 진취적이고 자유로우나 그 내면에는 안정과 보살핌을 중시하는 성향이 있다.


그린 유형은 조용하고 고독한 사색가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모든 사람을 향한 다정함이 있다. 이들은 종종 혼자 있기를 좋아하나 그 내면에는 세상 모두와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소망이 있다. 이들은 클래식한 것을 좋아하는 '안심의 철학'을 갖고 있으나 그 내면에는 자유를 향한 진보적 날개가 숨어있다.


블루 유형은 세상 모든 이를 위한 외로움을 안고 있으며 그 내면에는 그 자신을 위한 친절함이 있다. 이들은 자기 자신과의 사교를 좋아하며 그 내면에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려는 소망이 있다. 이들은 안정적이고 진보적이며 그 내면에는 자유와 보살핌의 마음이 있다.


자신이 어떤 유형인지 알 수 있는 법은, 이 글을 봤을 때 시계의 분침이 홀수를 가리키면 레드 유형이고, 짝수를 가리키면 그린 유형이며, 만약 시계가 없거나 시계를 보기 싫다면 블루 유형이다. 이것은 영혼의 직관을 통해 가장 정확하게 측정되는 평가방식이다. 이제 자신의 유형이 무엇인지를 알고 설명을 보게 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 빛의 존재유형모델이 얼마나 자신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자, 바로 이런 방식으로 '나'에 관한 그 모든 소설은 집필된다.


실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언어들로, 곧 언어적 속임수들로.


당신은 선하면서 동시에 어떤 부분은 악하다. 당신은 따듯하면서 동시에 어떤 부분은 냉정하다. 당신은 이타적이면서도 동시에 어떤 부분은 이기적이다.


이처럼 인간을 설명하는 말로서 서로 반대되는 성질의 언어들을 함께 늘어놓으면 누구나 다 자기 얘기처럼 듣는다. 사회적인 인식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곤 하는 속성의 언어는 그 위상을 부분적으로 살짝 축소시켜 말하면 사람들이 자기 얘기로 받아들이기에 한결 수월해진다. '악하다' 등과 같은 표현은 '현실생활력이 강하다' 정도로 바꾸어 표현하면 더 좋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들의 정체는 실은 소설캐릭터를 만들 때 쓰는 문예창작의 작법이다.


일례로 MBTI의 창시자들이 심리학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모녀 소설가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그 이론적 기원이 권위있는 심리학자인 칼 융에게서 유래했다고들 말하지만, 근거가 되는 융의 변증법적 대극이론 자체가 이미 근대적 소설이다.


소설로 인간의 구조를 거푸집처럼 설정해놓고 거기에 사실적인 인간을 끼워맞추려고 했던 일이 소위 보편적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근대에 자행되었던 대표적인 일인데, 쉽게는 이것이 바로 이념을 따라 사는 삶, 곧 원고지 속에 갇힌 삶이다. 헤겔이 집대성했다고 말해지는 이 방식은 사회철학의 형태로 마르크스에 의해 계승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심리학이라는 외피를 두른 채 융에 의해 전개되었다.


인도 브라만교의 아트만사상, 영지주의, 중세의 연금술, 대극의 통합,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 융의 심리적 연금술, 이것들은 실은 다 동일한 것들이다. 동일한 목적을 위해 쓰인 소설들. 원고지에 적힌 글대로 따라 살기만 하면 나라는 것을 잘 알게 되거나 또는 진정한 나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자신을 소설캐릭터처럼 설정해 살면 '나'를 얻을 수 있다니. 맙소사.


이것은 결국 언어로 내 자신을 만든다는 얘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경우 '나'라는 것은 언어적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며, '나'를 창조한 언어는 언제나 내 자신보다 높은 신적 위상을 갖게 된다. 언어보다 하찮은 자신이라니, 또 언어를 신으로 섬겨야 하는 인생이라니, 대체 태어난 이유가 무엇인가?


심지어 여기에는 더 교활한 의도가 숨어 있기도 하다. '나'라는 것을 창조한 것은 신적 언어이며, 그 신적 언어를 유능하게 주관하고 있는 신적 주체는 곧 작가다. 결국 이러한 방식 속에는 작가가 신처럼 군림하고자 하는 아주 교만한 의지가 은밀하게 담겨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원고지라는 것이 이러한 신적 권력을 획득하고자 하는 도구라는 사실은 부정되기 어렵다. 실증적으로 살펴보면, 무슨무슨 작가라고 하는 이들이 무수히도 사람들을 선동하며 자기의 신적 권세를 증대시켜가고 있다. 컬트화된 사이비교주의 출현은 종교계에 만연한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문예창작계에서 지배적인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이비교주들이 득세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그들에게 힘과 자원을 제공하는가?


자기 또한 신이 되고 싶은 이들이 신적 권세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작가들을 숭배한다. 자신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어있는 그 작가들의 말을 따라 살면 자기 역시도 동일한 신적 위상을 얻게 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이로써 우리는 핵심적인 이해에 도달하고 있다.


우리는 '나'를 얻으려고 그 많은 수집의 행위들을 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나라는 것을 버렸다. 그래야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원고지에 적어온 '나'에 관한 무수한 소설들은, 이를테면 '신의 조각들'이었던 셈이다. 조각들을 더 많이 모으면 신의 완전한 형상이 드러날 것이라고, 자신이 바로 그런 형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는 꿈꾸었다. 이 조각들을 수집하는 과정이 곧 변증법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근대의 꿈이다. 언어를 유려하게 다루는 이성의 힘으로 인간이 신의 자리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었던 꿈, 종국에는 세상을 불바다로 만든 원자폭탄과 가스실의 악몽으로서 그 실체가 여지없이 폭로되어버린 그 꿈.


원고지는 근대에나 오늘날에나 이처럼 지구온난화의 현실에 일조하고 있다. 북극곰만 눈물겹다.


인간이 자신을 파괴하는 방식, 우리는 근대를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를 목격했던 것이다. 자신을 파괴한다는 것은 표현 그대로 '나'를 없앤다는 것. 나를 없애고 신이 되려고 하는 일이 인간이 시도할 수 있는 최고의 자기파괴의 방식이다.


그러니 이 방식을 추구하고 있는 한, 인간은 끝없이 불안을 경험할 수밖에는 없다. 자신이 자신을 파괴하려 하는데 불안하지 않기란 도무지 불가능하다. 어느 사회적 거악이나 우주의 불길한 존재가 우리를 해치려 하기에 불안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자신을 부정하며 위협하고 있기에 불안한 것이다.


그렇다면 또한 이것이 자기검열의 실체일 것이다. 자기검열의 행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조감도처럼 들여다보는 입장을 취한다. 이에 따라, 자신이 잘못한 것도 정직하게 고백하고, 잘한 것은 전신주 옆의 민들레를 묘사하듯이 그 소소한 아름다음을 진솔하게 증언하는 방식의 작법을 쓰곤 한다. 요는 '신의 시선'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이 그러한 신적 주체임을 은근스레 알리려고 하는 것이다.


신이 되어야 자신은 가장 많은 대상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기에.


원고지는 사랑을 쟁취할 도구.


작가는 신성한 도구를 휘두르는 정의의 영웅, 이내 그 업적으로 인해 신이 될 것이다. 밤하늘의 가장 사랑받는 별자리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21세기에도 아직 이러한 낡은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사회의 주요한 심리적 문법을 구성하는 두 전통이 특히나 이 신화의 지속에 이바지한다. 하나는 무속이고, 다른 하나는 유교다. 무속은 무속적 행위를 집행하는 이가 자신을 '신의 시선'의 대변자로서 자임해온 전통이며, 유교 또한 원고지에 하늘의 뜻을 담은 글들을 써나가는 그 행위자가 자신을 하늘의 뜻의 집행자라고 자임해온 전통이다.


그렇게 신[하늘]의 매개자인 무당과 선비는 신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있는 존재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나아가서는 이러한 이들이 결국, 공자가 꿈꾼 것처럼, 신과 합일한 신격 그 자체의 존재가 된다고도 믿어졌다. 소위 말하는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신의 실현을 뜻하고자 했던 이 '진정한 어른'이라는 표현이 점차 '진정한 나'를 함의하게 된 것은 자연스럽다. 이 경우, 참된 어른으로 성장해나간다는 것은 곧 내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그게 곧 신의 실현이다.


윤리를 통해, 곧 언어를 통해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무속이며 또한 유교의 핵심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 뿌리깊게 자리잡아 작동하고 있는 아주 지배적인 심리적 문법의 내용이다.


여담으로, 무속과 유교를 합치면 그 모습이 공교롭게도 앞에서 말한 융인데, 융은 '무의식의 의식화', 곧 마음을 언어로 바꾸는 행위를 거듭함으로써 인간이 신적 존재로 성장해간다고 믿었던 이다. 한국사회에서 괜히 융이 인기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심리적 문법을 정확하게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신적 도구로 상정하는 언어의 신격화가 결국 이 모든 현상을 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언어의 신격화는 곧 원고지의 신격화가 되며, 이내 원고지의 주체인 작가의 신격화가 된다.


그리고 작가의 신격화라는 이 지점에 주목해보자. 작가는 왜 신이 되기를 꿈꾸었는지를 다시 기억해보자.


작가는 불안과 수치심의 이유인 것 같은 '나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 '나'를 소설캐릭터처럼 만들고자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는 자기검열을 통과한 신적 주체다. 이제 그러한 '나'를 내세우는 일은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 반대로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자신이 신처럼 사랑받으며 더는 불안하지 않은 참된 '내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원고지의 역사는 성취된다.


이처럼 작가가 성공적인 신격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신으로 보아줄 더 많은 대중적 대상들의 지지가 중요하다. 고로, 작가의 신격화는 자연스럽게 대중의 신격화를 야기한다. "국민이 다 안다." 오늘날에는 이런 표현들을 하곤 한다. 전형적인 '대중의 신격화'의 표현이다.


대중은 가장 '나'를 상실한 그 이름이다. 그런 대중을 신과 같은 위치에 올려둔 채, 그것에 의존하여 모든 신격화가 성립될 수 있는 원고지의 세상이란 결국 가장 '나'라는 것이 실종된 세상이다. 곧, 가장 불안한 세상이다. 포퓰리즘의 사회가 결국 파시즘의 사회가 되는 이유는 불안해서다.


그렇다면 대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쟤, T라서 그래."라며 술자리에서 MBTI전도사가 되어 종교전쟁 같은 상황을 진지하게 만들고 있거나, 정계충이 어떻느니 하면서 남의 연애사에 사주팔자 들이대며 도사처럼 훈수두고 있거나, 해왕성과 목성의 영향력이 금전운에 얼마나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당파싸움처럼 목숨걸고 논쟁하고 있으면 대중이다.


즉, <나> 명세서를 진리처럼 들고 활동하고 있으면 그것이 대중이다.


우리가 대중에서 빠져나오게 될 때의 경험은 눈여겨볼만한데, 거기에는 반드시 현재 '나의 부재'에 대한 자각이 있다. 이를테면, 삼겹살집에서 타로카드에 대한 열변을 토하며 서로간에 감정도 제법 상한 경험을 한 이가, 모임이 파한 후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모든 것이 다 뭔가?'라는 공허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을 것이다. 좀 울고 싶은 심정이다. 자신이 너무 하찮고 보잘 것 없이 느껴진다. 이 조잡한 삶이 구차하기만 하다.


이런 것이 바로 일상 속에서 우리가 '나의 부재'를 자각하곤 하는 그 장면이다. 실존의식이 깨어난 상황이라고도 말한다. 이럴 때 우리는 반드시 대중이라는 졸린 꿈에서 깨어나, 우리에게 가장 생생하고 중대한 것, 바로 '나'라는 것을 절실히 상기하고 또 소망하게 된다.


우리가 그 소중한 것을 놓고 나왔다는 사실도 이내 눈치채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부재하게 되었다는 그 사실을.


바로 여기에 '나'를 향한 정확한 방향성이 있다.


'나'는 언어, 윤리, 성장, 학습, 발전, 발달, 진보, 실현 등을 통해, 우리가 이루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 원고지의 작법들을 통해 우리가 꿈꾸었던 것은 '나'라는 것이 아니라 '신'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그런 기제들은 우리가 '나'를 가장 먼저 버리게 되었던 그 아픈 이유에 불과하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 자리에 있다.


곧, 지금 가장 버려진 그 자리에 있다.


저마다 참된 신이 되겠다는 원고지[명세서]를 들고 온세상을 뜨겁게 달구는 지구온난화의 시절에, 살 곳을 잃은 북극곰의 눈물겨운 얼굴이 나다.


자신의 자리를 잃은 그 눈물이 나다.


그러한 이 아픔이 나다.


나는, 나를 잃은 아픔 속에 있다.


그 아픔과 하나된 지금 이 느낌, 이 알아봄, 이 넘쳐남이 나다.


원고지의 광신으로 메말라가는 지구에 유일하게 촉촉히 흐르던 것. 그 생명의 자취. 나의 가슴에 눈물로 흘러 나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스즈키 선사는 말했던 것이다. "모든 깨달음의 안에는 눈물이 있다."라고.


눈물은 얼마나 불안을 치유하는가.


아니 눈물이 있는 곳에 이미 불안이 없다. 이는 무척이나 실증적이다.


자신을 향해 눈물 흘릴 수 있는 자, 그가 이미 그 자신이다. 그렇게 '나'라는 것이 있기에 더는 불안하지 않다.


불안할 때 우리가 거의 반드시 화의 현실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해보자.


자신을 위해 울지 못하는 이들은, 대신에 남을 위해 울려고 하며, 그러한 남의 처지에 대해 자기가 분노하려고 한다. 그리고는 불쌍한 남들을 구원하겠다고 자신이 전능한 신이 되는 꿈을 꾼다. 이 모든 일은 이렇게 일어난 것이다. 자신을 위해 울지 못하고 그 대신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려고 한 바로 그 일로서.


자신을 위해 울고자 글을 쓴다면, 그것은 아마도 작가의 어떤 멋진 의미, 또는 온전함.


결국에는 글의 형상도 알아볼 수 없이 흠뻑 젖어 원고지라는 그 형체조차도 다 사라진다면, 파푸아뉴기니 제도의 나무들도 기쁠 것이다. '나'로 돌아가는 길의 안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우리가 '나'로 돌아가는 이 길에는 어떤 검열도 작동할 수 없다.


눈물은 검열할 수 없다.


흐르는 눈물의 자유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내가 이미 나인 것을 그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이렇게 저 먼 길의 끝에서 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나로 출발한다. 원고지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이미 나이니, 원고지에 뭐라고 써놓든 나하고는 아무 관계없다. 관계가 없으니 영향받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라는 것은 언제나 그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의 이름인 것이다.


자유라는 것이 역설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내 자리'에 대한 감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눈치챌 수 있을까. '나'의 자리에 있을 때만이 우리는 안심하며 자유로울 수 있다. 100만 광년을 자유로이 흐르게 된 북극곰은 그러니 이제 더는 슬프지 않다. 어디에서나 그 출발점과 같이 모든 곳이 그 자신의 자리일 것이기에.


나는 언제라도 분명하게, 나를 위한 어떤 자유가 흐르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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