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현실 #1

"Welcome to Reality"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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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깨달음 얘기를 하지 않으면 인생이 잘 안 풀리는 것 같다. 그건 어떤 마법적 숙명이나 과업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 재미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깨달음은 재미있다. 재미있어서 더욱 그렇게 살게 된다. 어떤 종교체험 같은 것으로 경험한 좋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언행의 방향성을 견지하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갈수록 더 멋지고 예쁜 풍경이 펼쳐지는 길을 즐겁게 계속 나아가고 싶은 쪽에 더욱 가깝다.


<깨달음 이후의 삶> 이 글의 제목을 이렇게도 떠올려 보았지만 그런 제목을 가진 얘기들은 너무 많다. 그 내용들도 대체로 식상하다. 한 번 눈을 떴다고 다가 아니며 깨달은 후부터 진짜 공부를 해야 한다느니, 또는 일정한 종교적 경지에 도달했으면 이제 과거의 심리적 찌꺼기들을 청소해야 한다느니, 아니면 일시적인 깨어남의 상태를 항구적인 깨달음의 구조로 바꾸어야 한다느니 등. 무슨 다 도덕적 유교경전 같은 얘기들이라 조금 졸립다.


<포스트 깨달음> 차라리 이 제목이 훨씬 낫다. '그 후'라는 의미와 '탈(脫)'의 의미를 동시에 묘사할 수 있으니 이득이 크다. 실존이 탈존인 것처럼, 견성도 탈성이어야 할 것이다. 본성 자체의 성질이 애초 그러하다. 실체적으로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스스로를 깨서 그 밖으로 나가려는 탈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포스트 깨달음>이라고 써놓고 나면, 깨달음에 대한 어떤 순수주의의 지도를 그려야 할 것만 같다. 아주 거창하면서도 방대한 인문학적 깨달음백서 같은 것을. 두꺼운 양장본으로 된. 분명 이런 것을 쓰다 보면 재미없어질 것이 분명하다. 뭔가 인생을 다 바쳐서 써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데 인생을 다 바친다니 그런 지루함도 다 있을까?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위해, 또는 깨닫기 위해 인생을 다 바친다는 얘기도 동일한 지루함 속에 있다.


지루하면 인생이 잘 안 풀린다. 우리가 어떤 소재를 고정불변의 가치로 신격화하고 있을 때 우리는 지루해진다.


그래서 깨달음 얘기를 해야 한다. 깨달음에 인생을 다 바쳐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 깨달음을 다 갖다 써야 한다. 글도, 깨달음도 인생이 재미있으라고 만들어진 것. 근본적으로는 불쏘시개다. 우리 삶의 성대한 캠프파이어의 불꽃을 지피기 위한.


포크댄스를 위해, 마시멜로를 굽기 위해, 라면을 끓이기 위해, 친구들과의 합창을 위해, 시작되는 연인들의 고백을 위해, 이 숲속을 환히 밝히는 빛을 위해, 깨달음은 발명된 것이다. 인생이라는 이 축복의 불꽃을 우리가 최대치로 누릴 수 있게끔. 이 현실을. 이 실재를.


그렇다면 <깨달음의 현실> 이것이 평범하면서도 가장 좋다. 실은 그 의미는 평범하지 않다. '깨달음'과 '현실'이라는 두 단어는 결합되어 역설의 구도를 형성한다. 떠올려보면 확실하다. 깨달음은 대개 현실과 반대되는 맥락의 것을 뜻하는 용법으로 많이 쓰여왔다.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인 그 무엇. 누군가가 깨달음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는 이제 제발 좀 현실적으로 살라고 충고도 해왔을 것이다. 그 반대의 입장에서도,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라는 식의 얘기 또한 우리는 들어왔다.


이처럼 반대되는 언어들을 함께 붙임으로써 창출되는 효과를 역설이라고 부른다. '흔들리는 터전' '오래된 미래' '순백의 밤' 같은 식이다. 이것은 언어로는 묘사할 수 없는 어떠한 실재를 암시하려는 목적으로 활용된다. 상징이라고도, 또 시적 표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 표현으로 암시되는 실재성은 분리되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통짜인 것이다. 온전성이라고도 부른다. 실재의 감각에서는 '흔들림'과 '터전의 견고함'은 동일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흑'과 '백'도 같고, '선'과 '악'도 같으며, 곧 '깨달음'과 '현실'도 같다.


깨달음은 가장 현실적인 것이며, 가장 실재다.


리얼리티(reality), 영단어로는 이처럼 아주 좋은 표현이 있다.


깨달음은 리얼리티로 사는 것이며, 리얼리티를 사는 것이다.


그렇게 외친 대표적인 두 전통이 실존주의와 불교다. 언어로 만들어진 가상의 리얼리티를 진짜의 리얼리티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버린 오늘날이기에 더욱 그 울림이 의미깊은 전통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통들에서는 결국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우리는 진짜로 태어나 진짜로 죽는다. 바로 그것이다.


태어남도 현상이고, 죽음도 현상이다. 인간은 현상을 경험하는 존재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삶의 현상들은 통째로 다 진짜다. 생생한 것이다.


이 얘기를 좀 더 유식한 철학적 표현으로, 또는 지극히 불교적 정수를 담아내고자 한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현상은 실존한다.'


그리고 이 표현을 줄여서 이제 우리는 '현실'이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이라는 말 자체가 실은 엄청나게 '깨달음적인' 표현이다. 그러면서도 현실이라는 표현은 동시에, 우리가 통상적으로 깨달음이라는 표현을 쓸 때 작동하게 되는 언어적 편견 및 선입관들을 훌륭하게 훼방놓아준다. '깨달음'과 '현실'이라는 두 표현은 서로를 견제하며, 동시에 서로를 확충한다. 그럼으로써 서로라는 관계를 해체하고, 더는 서로가 아닌 것이 된다.


리얼리티라는 그 하나가.


아, <리얼리티>라는 제목도 좋았을까. 그러나 그러면 별로 쓸 말이 없을지 모르겠다. 그건 마치 선사가 드는 손가락 같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용법이기에.


결국 나는 내 자신이 재미있게 놀기 위해 깨달음을 말하고 글을 쓴다.


그리고 그게 상대적인 언어로 만들어진 사회라고 하는 이 가상현실 속에서 노는 방법이다. 대단히 현실적인 깨달음을 사는 방법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떠올려보면, 우리는 사회라고 하는 것을 얼마나 지루하게 여기는가. 사회생활은 재미없음의 대명사다. 돈과 힘이 없을 때는 없어서 재미없고, 돈과 힘이 있을 때는 있어도 재미없다. 사회라고 하는 언어적 감옥을 벗어날 수 없이 그 안에서만 살아가야 하는 수감자의 신분이라면 무엇을 해도 재미없는 일이 당연할 것이다.


백날 감옥 안에서, 감옥을 개혁하자고, 사람이 살기 좋은 자유와 평등의 감옥을 만들자고, 감옥에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일에는 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래봤자 감옥인데.


우리가 감옥 안을 유일한 현실로 간주하며 평생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있을 때나 감옥 안의 경영을 문제삼는다. 그러나 깨달음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감옥의 밖, 언어적 가상현실의 그 밖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깨달음이다.


그래서 사회적 논리로는, 윤리로는, 이념으로는, 학습으로는, 양육으로는, 언어로는 깨닫지 못한다. 그 모든 감옥 안의 것으로는 감옥 밖을 향할 수 없다. 감옥 밖의 것으로만 감옥 밖을 향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감옥 안에 있더라도 반드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감옥 밖의 것이 있다. 상시 지참가능한 탈출도구인 셈이다.


그것은 바로 이곳은 감옥이라는 명징한 자각. 자신은 지금 죄수의 신세라는 명백한 리얼리티의 자각. 그것만은 언제라도 감옥 밖에서 온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 감옥 밖을 향해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분명하게 시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 자체가 없는 이는 아예 시작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회라는 것이 진실로 언어적 감옥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를 절대적인 소재로 보며 자신의 인생을 위탁하는 '신앙행위'를 자연스럽게 멈추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사회를 바꾸기보다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일에 에너지를 가용하게 될 것이다. 무수한 현인들이 그러했듯이.


어떤 감옥 속에서도 스스로를 구원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자를 꿈꾸었던 게 아니던가?


깨달음의 감수성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세상 무엇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 어떤 위대한 정치인도, 어떤 훌륭한 사회시스템도 내 자신의 삶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나보다 나아보이는 대상에게 내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기대해온 그 일은 무수한 분노와 우울만을 쌓아왔을 뿐이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몰랐기에.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원래 남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구도 타인을 대신 구원할 수는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 '나는 죄수야.'라는 저주를 자기 자신에게 계속 걸고 있는 이를 자유롭게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자신이 그만두어야 할 뿐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언어의 감옥에 스스로를 계속 감금하는 그 일을.


그게 좋은 것인 줄 착각해서 우리는 자기저주를 지속해왔다. '나는 죄수야.'의 사회적 표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깨시민, 착한 아이, 선한 영향력의 인플루언서, 인싸, 다양성의 감수성, 행동하는 지성, 똑똑한 민주적 주체 등등, 우리가 사회적으로 자신을 그렇게 인식하고 싶어하는 그 표현들이다.


동시에 사회가 인간을 통제하기 좋도록 특정하게 가치화해서 선전한 그 속성들이기도 하다. 그렇게 살면 사회로부터 사랑받는다고 믿어진 것들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감옥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우리는 자발적으로 영구한 죄수의 신분을 얻기로 한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이 절대로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이런 방식으로 얘기하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모종의 반사회성을 뜻하는 것처럼 오해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깨달음은 반사회적이지 않다. 그 반대다. 사회가 반깨달음적이다.


사회가 고도로 발달할수록 그러한 사회는 개인들을 더욱 우둔하게 만들려는 의지를 집행한다. 그러면서도 개인들에게 스스로가 더 똑똑해진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드는 일이 핵심이다. 그래야 통제하기 쉽기 때문이며, 통제가 쉬어야 고도화된 사회의 시스템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동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는 집단지성의 신화 같은 것을 열렬히 보급하려 한다. 광장으로 다들 모여야 인류사에서 드러난 가장 위대한 정신적 가치들을 얻게 되리라고 선동한다. 모조리 환상이다. 오늘날 신경생리학의 연구들은 인간의 뇌가 집단의식 같은 것으로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는 실증적 사실을 전한다. 나아가 인간이 군집을 이루면 정신적 수준이 더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행한다. 엄선된 최고의 도덕적 지성인들 100만 명을 광장에 세워두면 그들은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할 것이다.


인간에게서 깨달음이 소외된 반깨달음의 결과다. 이 일은 사회가 깨달음보다 더 높은 자신의 권위를 주장할 때 생겨난다. 사회의 우상화라고 할 수 있다. 우상화는 일종의 키치 현상이며, 낮은 것이 높은 것인 척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우상화 속에서는 모든 것이 우상의 수준으로 하향평준화되며, 아무리 현명한 이들이라도 우상화에 포섭되어 있는 한 그 지성은 낮은 수준에서 작동하게 된다. 우상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스스로를 일부러 제약하게 된 까닭이다.


그런데 사회라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바로 관계다. 그러니 사회의 우상화란 곧 관계의 우상화다.


떠올려보자. 사회가 문화적 매체들을 활용해 얼마나 관계라고 하는 것을 신적인 것, 가장 아름다운 것, 또 가장 선한 것으로 집요하게 선전해왔는지는 아주 쉽게 기억해볼 수 있다.


혹자들은 진정한 깨달음은 더불어의 관계다, 라는 주장까지 하곤 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못깨달았는데 남들 앞에 깨달은 참스승인 척 연기하고 싶어하는 이들이나 하는 말이다.


깨달음은 절대로 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관계에 대한 광신이 해소될 때 인간은 깨닫는다.


사회는 가상현실. 사회의 실제인 관계 역시도 당연히 가상현실이다.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을 가리고 있어서, 리얼리티는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구성하는 언어를 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언어를 본다고 해도 좋다. 보려면 제대로 그 필요를 보아야 할 것이다. 언어의 필요, 관계의 필요, 사회의 필요는 무엇인가? 인간은 왜 그러한 것들을 만들었나?


편리해서다.


물물교환의 번거로움 대신에 교역의 편리성을 낳고자 인간은 화폐경제라는 가상현실을 언어로 만들어냈다. 관계 및 사회라는 것은 이와 같다. 본질적으로는 에어컨과 동일한 것이다. 편리해서 좋은 것이다.


그런데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오히려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적 입장처럼 인간을 구속하려고 할 때 그것은 이제 불편한 것이다. 관계가 이러하고, 사회가 이러하다. 에어컨만이 그 분수를 알고 겸손해서 인류의 참된 친구다.


어떻든 간에, 우리가 관계를 맺는 것은 편리해서고, 사회를 이루는 것 또한 편리해서라는 그 이유로 그것들을 제대로 보는 일은 매우 유익하다. 그렇게 보게 된다면, 더는 그것들은 우리 앞에서 신성한 척할 수 없게 된다. 에어컨에게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달라고 울며 기도하다 끝내는 화내는 이도 있는가?


우리가 관계 및 사회에 마치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구원해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권위와 힘을 주고 있기에, 그것들은 우리에게 신성화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묶어 감옥 안에 수감한 그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들의 용도는 인간의 구원이 아니라 다만 편리의 증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다시 기억한다면, 관계 및 사회에 기대되고 있던 그 모든 환상은 해소된다. 애초에 우리가 기대할 만한 소재들이 아니었다. 정확한 우상의 해체다.


이제 이 지점은 나를 좀 즐겁게 한다.


이 세상에 그렇게 우리가 기대할 만한 것들이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확연해질 때, 그래서 결국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남지 않았을 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고 있을까?


그때서야 자기 자신이 가장 기대할 수 있는 든든한 것으로서 확 일어선다.


기댈 것이 없을 때, 인간은 스스로 직립보행을 시작한다.


그 자신으로 우뚝 선다.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공기에 의해 서고 있고, 대지에 의해 서고 있으며, 중력에 의해 서고 있는 것. 이 우주 전체에 의해 서고 있는 것이며, 이 우주 전체로 서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 우주 전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서는 일을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최대치로 긍정하고 있다.


자기 자신으로 선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절대적 긍정 그 자체로 선다는 것이다. 조잡한 관계가 아니다. 완벽한 통째다.


내가 깨달았으면 온세상이 깨달은 것이다, 이런 식의 말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게 현실이라서다. 깨달음의 현실.


현실적으로 가장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그 기분은 어떠할까?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정도로 긍정되는 것이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마침내 발견하게 된 그 심정은?


미친 감동. 압도적 감사. 기쁨의 오열.


자기가 거지인 줄만 알고 감옥 속에서 거지처럼 살아왔던 진짜 왕자, 진짜 공주가 이제 돌아온 것이다. 그 자신이 가장 꿈꾸어왔던 바로 그 현실로. 영영 잃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집으로.


Welcome to reality.


정말로 재미있는 인생은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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