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현실 #2

"살다 보니 깨달음"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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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100억을 벌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동경하며 예찬한다. '우와, 대단하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누군가가 구독자 100만을 넘긴 유튜버가 되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동경하며 예찬한다. '우와, 대단하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누군가가 깨달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개 검증하려고 달려든다. '니 따위가?'


이건 꽤 흥미로운 현상이다.


깨닫지 못한 이가 대체 어떻게 깨달음을 검증할 수 있는 자라고 자신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무슨 깨달음 평론가라도 된 것처럼 구는 것은, 깨달음을 마블의 어벤져스 같은 서사적 소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자신은 깨달음 오타쿠라서 무수한 영성서적과 경전들, 각종 깨달음의 경험담들을 섭렵했기 때문에, 직접 깨닫지는 못했어도 동서고금의 모든 깨달음을 평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자기가 모르는 것에는 리뷰의 별점으로 심판하며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행세할 수 있는 요즘의 소비풍조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두루 아는 척해야 성공하는 오늘날의 자기계발문화 때문인지. 또는 잘나보이는 것에 무작정 시비를 걸면 자기도 그 잘난 것과 동급의 링에 서게 되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를 착각해볼 수 있는 그 착시효과를 노려서인지.


어떻든 여기에는 '나는 깨달음에 대해 알고 있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알고 있다. 다만 사회생활의 사정과 경제적 여건상 아직 실천만 못했을 뿐이다. 아는 것은 다 알고 있으니 언제든 실천만 하면 된다. 깨달음 평론가들은 대체로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해 이런 입장일지 모른다. 머리는 좋은데 공부는 안한다는 식의 바로 그 얘기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지는 머리가 좋아 다 알고 있기에, 환경이 자신을 풍족하게 잘 받쳐줘서 공부를 하게 되기만 하면 자기도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다고 전해지는 그 유명한 전설담이다.


이 전설은 언제나 도덕적 교훈을 담아 전해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정말로 머리가 좋은 이는 착하고 바르게 사는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곧, 혼자 똑똑한 척하는 것들은 다 헛똑똑이들이고, 참된 지성은 반드시 모두를 위한 선함의 가치를 실현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참된 지성임을 증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엄마가 자기 자식에게 세뇌하듯 들려주던 전설이다. 공부를 못하던 자식에게는 새벽기도를 올리듯 더 열성어리게 그 귀에 전래되었다. 그 위대한 모성의 결과, 아주 많은 자식들은 자기가 그런 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눈치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못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검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채택하고 있던 그 검증의 기준임을.


엄마가 자신을 평가하던 그 기준으로, 소위 깨달음 평론가들은 깨달음을 평가하려 하고 있던 것이다.


자신은 자기의 엄마가 말한대로 공부를 혹여 못할지라도 머리가 무척 좋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착하고 바르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이고 예의바르며 인성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깨달음이라는 표현이 곧잘 오해되는 바, 그것은 흡사 아주 높은 지성의 획득인 것처럼 간주된다. 그러니 동일한 오해방식에 따라, 깨달음은 동시에 사회적 선함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으로도 간주된다. 그런데 자신이 바로 그것을 얻은 사람이다. 자신이 선하기에 참된 지성임을 엄마가 보증했다.


"우리 엄마가 나 깨달았대거든?" 깨달음 평론가들의 권위는 이처럼 그들의 엄마에게 기인한다. 엄마가 마치 깨달음을 인가해줄 최고의 스승 같은 것이다. 자신은 그런 엄마 말에 따라 세상을 착하게 살아보려 했으니, 적어도 그 일만큼은 자신이 있으니, 노골적으로 말은 안해도 이들은 자신이 이미 좀 깨달은 상태이거나, 적어도 깨달음에 상당히 가깝게 다가가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엄마 말을 따라 살면 100억을 못벌 수도 있고, 100만의 구독자를 못모을 수도 있으나, 최소 깨달음만은, 곧 정신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만은 얻을 수 있다고 믿어지던 아름다운 전설이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사실은 엄마의 말을 따라 살지 않아야 깨닫는다.


단 1초라도 자신으로 살 때 우리는 그 1초로도 반드시 깨닫는다.


우리는 다들 자기 자신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거의 모든 순간을 엄마의 말을 따라 살듯이 살고 있다. 우리가 하루동안 자신에게 하고 있는 일들을 섬세히 떠올려보자.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택지를 고르는 그 일만을 반복하고 있다.


마치 엄마가 놀이터에서 얻은 경험담들과 인터넷에서 취한 정보들을 통합하여 어떤 학원을 보내야 자식에게 가장 좋은 길이 될지를 궁리하듯이, 샴푸 하나를 사는 데도 컴퓨터 앞에서 몇 시간을 심대하게 고뇌한다. 잘못 고르면 자식의 인생을 망친 나쁘고 못난 엄마가 될 것 같아서 그 선택의 무게는 치명적이다. 실패하면 안된다. 실패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 두려움이 낳은 긴장과 경직이 온몸을 고되게 한다. 그러니 버티는 일만이 비루한 미덕처럼 남을 뿐이다. 그러나 그 언어적 기만으로도 결국에는 봉쇄할 수 없이 거대한 우울감은 이내 찾아들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는 방식, 곧 우리가 우리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엄마가 자식을 대하는 그것과 동일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엄마가 되어 있다. 우리를 그렇게 키웠던 엄마의 말에 따라, 이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양육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공략집을 보고 그 모범적인 메뉴얼에 따라 게임을 하는 모습이나, 영화평론글을 먼저 읽고 그 감상방향성을 정한 뒤 영화를 보는 모습과도 같다. 결국에는 모방이다. 남을 따라 사는 것이다. 자신[자식]을 위해 완벽하게 잘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자꾸만 이 모방의 삶을 낳는다.


모방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비현실이다. 살아도 자기가 사는 것 같지 않은 비현실감이 주위를 에워싼다. 어느 곳이든 자신의 현실이 아닌 것 같이 경험된다.


그러나 깨달음은 분명한 자신의 현실을 얻는 것이다.


때문에 모방으로는 절대 깨달을 수 없다.


부모의 말을, 친구의 말을, 애인의 말을, 배우자의 말을, 정치가의 말을, 종교인의 말을, 인문학자의 말을, 심리상담가의 말을, 대통령의 말을, 방송인의 말을, 선생의 말을, 스승의 말을, 어느 책 속의 위대한 말을 따라 하고 있는 동안에는 결코 자신의 현실을 얻을 수 없다.


깨달음에 대해 영영 알 수가 없다.


읽거나 들은 정보 같은 것으로 아는 척해봤자, 그것은 정말로 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직접경험의 중요성 같은 것을 말하는 그 의미가 아니다.


애초에 깨달음이라는 것이 삶의 문제라는 것을 이 지점에서 다시 기억해보자.


삶은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다.


이 사실이 분명하지 않아서 많은 것이 헷갈려진다.


그러나, 자신의 삶은 오롯이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것이다.


누구도 자신을 대신해 자신의 삶을 살 수는 없다. 삶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모방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삶에 관해 알 수 있는 것도 자신뿐이다. 어딘가에서 읽고 들은 정보들은 자신의 삶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이순간 자신에게만 일어나고 있으며, 지금 이순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깨닫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가장 간명하게, 그러나 핵심적으로 답할 수 있는 하나의 표현은 '살다 보니'이다.


살다 보면 깨닫는다.


살다가, 자신의 삶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 순간, 깨닫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지혜의 눈으로 본다고 말하기도 한다. 거창하지만 어떤 거창한 방법론을 익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이 정말로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자신의 것임을 이해할 때, 그것은 보인다. 알아서 보인다. 스스로 보인다. 삶이 다가와 이 눈으로 들어온다.


아무리 좋아도 자신의 삶이고, 아무리 싫어도 자신의 삶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완벽한 것을 해야 한다고 행위하고 있을 때 우리는 실은 무엇을 하고 있던 것이었나?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거부하고 부정하기 위해 힘쓰고 있던 중이었다. 자신의 삶 대신에 다른 것이 있을 것이라고, 어떻게든 모방하고 궁리해서 그 다른 것을 얻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동원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기 위해 늘 인생의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현실을 살아갈 에너지의 고갈로 인해 고통받아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깨달음은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되려는 그 헛수고를.


포기하면 보인다. 보여서 다 알게 된다.


자신의 삶이 이제 자신의 것이 되어, 스스로에 관해 다 알려주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된 것을 자신의 현실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삶이 아직 자신의 것이 아닐 때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지 않다. 매트릭스를 살며, 가상현실을 살고, 고전적으로는 말하기로는 꿈속을 산다. 돈과 생존, 세금, 의료보험, 정치 같은 언어들을 발화한다고 해서 그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이야말로 게임 속 아이템의 명칭 같은 것들이다.


자신의 현실이란 자신이 살고 죽는 바로 그 문제, 자신에게만 일어나며, 자신만 경험할 수 있고, 그렇기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의 삶뿐이다.


곧, 자신의 현실은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현실 위에 서있게 된 이는 자연스레 절대성을 획득한다. 상대적인 비교 자체를 불허하는 가장 중대한 것으로서의 그 위상을 회복한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보자. 상대적인 비교의 저주들이 이제는 그를 치명적으로 침식하지 못하게 된다고. 남들처럼 100억이 없어서 우울해지고, 100만의 구독자가 없어서 자기혐오에 빠지는 그 모든 상대적 평가의 악몽으로부터 그는 이제 자유라고.


자유는 검증될 수 없다. 상대적인 기준을 통한 검증 자체가 애초 불가능한 것이다.


자신만이 정확히 안다. 자신이 자유로운지 아닌지는.


마찬가지로, 깨달으면 깨달은 줄 자신이 안다. 좋아도 싫어도 자신의 삶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데, 그렇게 자신의 현실을 자신이 직접 살겠다는데, 거기에 어떤 외부의 평가가 필요한가?


살다 보니 일어난 일은 실은 이미 평가된 것이다. 그러니 사족은 더욱 필요하지 않다.


살다가 그렇게 산 삶을 보게 되니, 삶이라는 것을 살아볼 수 있어서 정말이지 무척 기뻤다고, 절대적인 평가가 스스로 이루어졌다. 스스로 승인되었으며, 스스로 완성되었다.


살다 보니 마침내는 좋은대로 싫은대로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된 깨달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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