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현실 #7

"깨닫는 백수들"

by 깨닫는마음씨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은 대체로 선생 역할을 하게 된다. 깨달음을 가르치는 교사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계속 하다보면 결국에는 자기가 실제로 깨달은 그 사실적인 것과는 다른 것을 가르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것은 각각의 개인의 상태에 따라 유연하게 그 안내를 달리하는 방편에 대한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인기와 권위, 자원을 얻기 위한 대중적 야합에 대한 것이다.


깨달음에도 포퓰리즘이 작동한다. 소위 '맥도널드영성'이라는 말은 잘 알려져있다. 이것은 깨달음이 하나의 상품이 된 것이다. 교사는 물론 지식정보상품을 판매하는 입장이 맞다. 그렇기에 깨달은 이들이 교사가 되어 있으면 깨달음은 점점 스스로 자기복제와 자기모방을 거듭해 열화된 어떤 대중적 상품이 되는 일은 필연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깨달음은 깨달음으로서 생존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의 교사 역할을 하던 이들이 어느 시점에선가, 이제는 사람 안만나고 싶다고 칩거하게 되는 경우는 빈번하다. 갈릴 대로 갈려나가고, 뽑아먹힐 대로 뽑아먹혀서 그럴 것이다.


아무리 깨달음이 상품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보편적 사회현실에서 샤넬 가방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깨달음을 사려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라는 '교육상품'이 판매시장에서 제대로 작동하게 하기 위해서는 샤넬 가방을 만들고 홍보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훨씬 더 커다란 에너지가 동원된다.


쉽게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샤넬가방은 누구나 돈만 있으면 샤넬가방 그 자체를 살 수 있지만, 깨달음은 아무리 많은 돈을 쓴다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상품으로 비유한다 해도, 한 사람에게 깨달음을 안내하는 일은 과외로 서울대에 가는 일을 돕는 것보다 수천 배는 힘이 든다.


사실 깨달음이 상품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럭셔리한 상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제값'을 지불하고 그 상품을 사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심리학을 빙자한 흔하디 흔한 저질의 자기계발상품보다도 싸구려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또는 초등학교 앞에서 파는 색칠한 병아리 취급을 받거나, 복을 준다는 항아리처럼 수상한 오컬트 취급을 받게 되는 일은 빈번하다.


이것은 깨달음의 '제값'을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인데, 그 '제값'이라고 하는 것은 '저의 값'이다. 곧, 사람들이 제 자신을 얼마나 멋지고 괜찮은 존재로 자각하고 있는가의 그 값이 바로 깨달음의 값이 된다. 그러니 많은 경우 깨달음의 값은 헐값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깨달음은 사람들에게 도달된 후에야 사람들 그 자신의 럭셔리한 위상, 곧 '제값'을 정확하게 회복시켜주는 그 일을 한다. 때문에 일단 사야만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언술은 판매전략으로서 너무 초보적이거나, 유치한 사기처럼 보이게 된다.


그래서 깨달음은 여러모로 시장에 내놓기에는 좋은 상품이 아닌 것이다. 그 가치를 알아보는 이도 희소하고, 제값을 주고 사려는 이는 더욱 드물며, 상품으로 구성하는 일에도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든다. 게다가 팔아봤자 늘 막대한 적자다. 그 판매자가 지독히 소진될 수밖에는 없다.


그럼에도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이 교사 역할을 자꾸만 하게 되는 것은 그것말고는 사회적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달리 없어서다.


깨달으면 매트릭스 등의 영화에 나오듯이 세상의 프로그래밍 구조가 다 보이고, 돈 버는 법도 다 알게 되며, 세계의 빈틈을 공략해 큰 이득을 창출해낼 수 있는, 무슨 이세계로 간 치트마법사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말하자면, 깨닫기 전에는 그런 것이 되어야만 자기가 제대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깨달은 후에는 명확한 존재의 사실 위에서 그냥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냥 존재한다는 것의 쉬운 일상어는 바로 '백수'다. 때문에 깨달으면 자연스레 백수의 풍모로 드러나곤 한다. 깨닫기 전에는 눈치를 보며 백수를 동경했지만, 깨달은 후에는 전격적으로 백수 그 자신이 된다.


전통있는 제도종교들에는 대체로 그래서 이 깨달음의 백수들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백수들이 사회의 기능적 역할에 매몰되어 그 깨달음의 빛이 바래지 않도록 백수로서 살아갈 수 있는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제도종교 밖에서 깨닫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아진 시대다.


나아가 사회가 점점 더 다단하게 발전하면서 관계구조와 그에 따른 기능적 역할을 더욱 중시하게 됨에 따라, 백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처우는 어느 때보다 불리한 시대이기도 하다.


깨닫는 이들은 많아졌지만,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의 가치는 아직 많은 이들이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그 간극이 만들어낸 불우의 현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깨달은 이는 불가피하게 사회의 어떤 기능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교사나 상담사 등의 역할로 들어설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기능적으로 남용하게 된 끝에 결국에는 소모되어 유기되는 운명이 된다. 그러지 않으려고 대중적 야합을 꾀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언어만 자신의 것으로 향유하고 싶어하지, 실제로는 깨달음의 반대편으로 향하려는 그 요구에 부응하여 불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때문에 그 끝도 빠르든 늦든 자기분열적 소진을 낳는다.


그렇다고 깨달음의 백수연합회 같은 이익집단을 만들어, 깨달은 백수들을 천연기념물처럼 보전해달라고 사회에 요구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깨달았다는 어떤 자존심이나 권위의식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깨달으나 안깨달으나 동일한 백수인 까닭이다. 백수 상태로 존재하면 사회유지를 위한 기능적 차원에서 유용하지 않다는 사회의 편견에 굳이 반동할 필요는 없다. 사실이기 때문에.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깨달음의 백수들이 실은 그 이웃들에게 무척이나 이로운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백수들은 사회를 위해 일한다기보다는, 인류를 위해 일한다. 그들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인류에게는 커다란 힘이 된다. 이것은 아름다운 추상적 표현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용적인 얘기다. 기능이 아닌 그 존재만으로 실용적일 수 있는데, 깨달음의 백수들은 그러한 현실을 증거한다.


두 가지 비유를 들어보자.


먼저, 깨달으면 자기 자신이 수원지가 된다. 생명의 물이 스스로 계속 샘솟는다. 그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창의성과 영감이 되고, 막혔던 상황에 대한 돌파구가 되며, 미래로의 활로가 된다.


백수들에게서 샘솟는 그 샘물은 무엇보다 먼저 백수들 자신을 적시지만, 동시에 반드시 그 주위로 흘러가게 된다. 그럼으로써 척박하고 삭막한 사막과도 같은 주변지역이 이제 촉촉한 농토로 거듭난다. 밭농사도 가능해지고, 과일나무들도 잘 자라게 된다. 백수가 그냥 백수로 있었을 뿐인데 가능해진 현실이다.


두 번째 비유로, 깨달으면 이제 자가발전이 이루어진다. 대상에 의존해 에너지를 뽑아먹던 현실에서 벗어나 스스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흡사 태양과도 같다. 실제로 깨달은 이들의 주변에는 특유한 중력장이 형성된다. 깨달은 이들이 외견적으로도 무척 매력적으로 보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태양은 지구에 빛과 열을 공급한다. 태양이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생겨나는 이득이다. 깨달음의 백수들도 동일한 작용을 한다. 그들이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그 미래의 가능성을 비추는 어떤 희망의 빛을 경험하며, 자신이 무조건적으로 지지받고 있는 것 같은 따듯한 온기를 경험한다.


너무나 역설적인 것은, 깨달은 이들이 더욱더 백수로 있는 만큼, 이러한 이득들이 더 강력하고 분명하게 그 주변에 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 백수여야 한다. 그들도 원하고, 인류도 그것을 원한다.


우리가 깨달음의 백수들로부터 대체 얼마나 좋은 것들을 받고 있는지 그 실제가 측정가능한 형태로 관측되지 못해서 그렇지, 실은 우리 삶에서의 아주 크고 핵심적인 이득들을 깨달음의 백수들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힘들 때 이들은 어떤 명쾌한 상담사보다도 더 상담사로서 우리에게 응답하고, 우리에게 진리를 아는 일이 필요할 때 이들은 어떤 유능한 학자보다도 더 학자로서 우리에게 응답하며, 우리가 사랑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을 때 이들은 어떤 다정한 연인보다도 더 연인으로서 우리에게 응답한다.


그렇게 보자면 차라리 '깨달음 보험' 같은 것을 만들어서 그 비용을 백수들에게 지급하면 어떨까. 이것은 마치 우리가 만능형 보험에 든 현실과도 유사할 것이다. 그 주위에서 문제가 생기면 깨달음의 백수들에 의해 자연스레 응답되며, 또 정확히 응답된다. 우리가 어려울 때 필요로 하던 바로 그것이.


운이 좋아 주변에 깨달은 이가 있었던 이들은 다들 자신이 이러한 이득들을 얻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소간에 눈치채고 있다. 그가 사라지게 되면 그 부재의 자리는 무엇보다 크게 경험되기에 그 중요성은 분명하게 실감될 수밖에는 없다.


그러나 아마도 그 이상일 것이다.


실은 이 깨달음의 백수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더라도 늘 일상적으로, 우리 자신의 무거운 짐을 얼마나 많이 함께 짊어지고 있었는지, 또 너무 오래 방황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얼마나 시간단축을 도와주었는지, 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무수한 우리의 소망들이 그들의 옆에 있음으로써 얼마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우리는 아직 그 전모를 충분히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이 있는 것만으로 얼마나 엄청난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아직 '존재의 힘'이라는 것을 충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백수라고 하는 것은, 가장 존재하는 상태. 그러니 그 존재의 힘이 최대치다. 존재의 힘은 행위의 힘을 압도한다. 행위의 힘은 '해나가는 것'이고, 존재의 힘은 '되어지는 것'이다. 행위는 늘 내 자신이 해야 하지만, 존재는 내 자신을 넘어선 것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다. 그 힘의 기원 및 역량부터가 다르다.


깨달음의 백수를 우리 삶의 이웃으로 삼는다는 것은 깨달음의 세력에 참여한다는 것, 곧 이 '되어짐의 힘'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신도 되어진다. 불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바뀌는 현실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지만, 돌아보면 기적 같다. 어떻게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백수의 좋은 이웃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도 고아와 과부의 좋은 이웃이 되면 하늘에서 복을 내려준다고 말했다. 이들은 대표적인 백수의 이름이다. 사회적 기능의 차원에서는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오히려 사회의 짐처럼 취급되기 십상인 이들이다.


자신들이 진보적인 척하며 사회정의를 부르짖고 계급평등을 주장하는 이들 중에 고아와 과부를 위해 말하고 있던 이를 본 기억이 없다. 이 '진짜 소외계층'에 대해서는 무시한 채, 자기들이 생각하는 작위적 약소계급만을 수호하고 예찬하려 한다. 돈많은 고위정치인의 자녀 같은 것에 신성한 속성을 부여해 "저 가엾은 아가, 우리가 지켜줄게. ㅠㅠ"라고 하는 식이다.


사회는 이처럼 원래 진짜 소외계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노골적으로 말은 안하지만 오히려 내심 그것들이 사라지기를 원한다. 왜인가? 그들의 존재야말로 사회가 얼마나 무능력한 장치인가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는 그들을 대신 무능력한 존재로 낙인찍음으로써 자신의 무능력함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수는 분명 이렇게 경험할 것이다.


'나를 알아보는 이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구나.'


그는 지금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세상의 어느 것으로부터도 제대로, 그 '제값'으로 이해받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한 속에서, 그럼에도 바라고 있다.


제값을 알아보는 그 시선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시선만을 간절히 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백수는 깨닫는다. 백수야말로 언제나 깨달음의 바로 옆에 있는 그 이름. 깨달음의 좋은 이웃.


백수만이 지금 진실로 청하고 있어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존재해 달라고.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소망이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 수밖에 없던 백수는 진실로 존재하게 된다.


그가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 제값을 정확하게 알아보는 그 시선이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기에. 백수 그 자신의 시선으로서.


나를 알아보는 이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던 것이 아니다. 나라는 것을 알아본 이가 지금 백수밖에는 없던 것이다.


그게 그토록 좋은 것이며, 꼭 갖고 싶은 것이었고, 이 세상에서 가장 럭셔리한 것이라는 사실을, 백수만이 눈치채고 있었기에.


백수는 뒷배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기에,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나일 수밖에 없기에, 나를 알아보는 일이 한결 수월하다.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에도 그는 동일한 백수일 뿐이다. 그냥 나일 뿐이다.


나라고 하는 이 중력장 속에서, 그 장에 참여하게 된 백수의 좋은 이웃들도 점차 나를 눈치채고는, 나를 얻어 나로 살아가게 된다. 마르지 않은 수원지이자, 영원한 태양으로. 그러니 백수는 우리의 곁을 떠나가도 그냥 떠난 것이 아니다. 그 부재의 자리는 우리가 나로 설 자리다. 또 다른 고아와 과부의 좋은 이웃으로.


그렇게 깨달음은 계속 전파되며, 인류가 다 백수이자, 백수의 좋은 이웃으로 되어가는 일 속에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깨달음의 현실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땅 위에 깨닫는 백수들로 온통 가득해, 이 지구가 더욱 눈부시다.


'있는 것만으로 좋다.'


우리는 그 백수들을, 바로 우리 자신을 분명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런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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