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으로부터의 자유"
고통은 없는 것이 좋다. 다행히도 우리가 고통에 정직할 때 고통은 빠르게 사라진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고통의 양상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고통을 예찬하거나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우리 곁에 붙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을 예찬하는 것이 영웅주의다. 영웅주의는 고통이 있어서 자신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과거의 고통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위액까지 토하던 어제의 그 숙취의 고통이 있어서 오늘 우리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되었나?
깨닫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수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이들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일부러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깨달음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극도의 고문을 가하면 피험자가 영적 눈이 열려 천국을 보게 될 것이라는 어느 공포영화의 내용과 같다.
고통의 행위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는 착각은 이미 2500년 전에 붓다 자신이 폐기한 바 있다. 깨달음은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길이지, 고통을 예찬하는 길이 아니다.
고통은 필수가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차라리 필연이다. 몸이 늙고 병들면서 생겨나는 아픔들은 자연적 필연이다. 또 우리가 언어에 위탁하여 사회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기에 그 언어로 인해 생겨나는 고통 역시 사회적 필연이다.
오늘날에는 후자로 인한 고통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전자는 약을 먹으면 쉽게 해소되는 경우들도 많다. 그러나 후자에는 변변한 약도 없다. 문명사회가 정신병의 토양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동의한다. 문명사회가 더욱 발전하면 사라지는 반문명적인 것이 정신병이 아니라, 문명사회 자체가 실은 정신병의 이유다. 고로 문명의 세력이 커지면 정신병의 세력도 커진다.
우리가 정신병이라고 말하는 그 모든 것은 어떤 불일치다. 사실과의 불일치. 실재와의 불일치.
언어를 강조하며 언어생활에 강하게 고착되어 있으면, 심지어 언어라는 것을 위대한 신적 소재인 것처럼 찬미하고 있기까지 하다면, 불일치도 필연이다.
언어는 늘 쪼개고 분리시킴으로써, 하나였던 것이 더는 하나이지 못하게 되는 불일치를 낳는다. 그런데 문명사회에서는 잘 쪼개고 분리시키는 이들을 똑똑하다고 평가한다. 쪼개고 분리시켜서 생겨난 것이 바로 정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가 무엇보다 중요해진 현대의 문명사회에서는 정보를 만들어내고 보급하는 정보주체들이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문명이 고도화될수록 우리는 불일치한 것들을 오히려 숭상하며, 불일치의 현실을 더욱 크게만 만들어 왔던 것이다. 오늘날 주로 쓰이는 다양성이라는 표현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얼마나 많은 불일치들이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좋은 것처럼 정당화되고 있는지는 주목해볼 만하다.
불일치는 다만 고통일 뿐이다. 병이 병인 것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처럼, 병을 좋은 것으로 예찬하는 모습은 가장 병든 모습이다. 그러면 병이 나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원천차단된다. 이처럼 병이 고통의 이유인 병으로서 정확하게 자각되지 못한다면, 고통 또한 정당화된다. 불일치의 병이 당연한 것처럼, 심지어는 좋은 것처럼 정당화되니, 불일치의 고통도 당연하게 정당화되는 것이다.
물론 고통이 당연하기란 생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어떻게든 고통을 없애고 싶다는 의도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러나 언어로 인한 불일치라는 고통의 이유가 정당화되어서 우리의 자각으로부터 은폐되고 있으니, 자신이 왜 고통받고 있는지 그 진짜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알 수가 없다. 해소되지가 않는다. 그렇게 실제적인 고통이 멈출 일 없이 계속되니 늘 화만 쌓여간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문명사회에서 이 불일치의 고통은 필연이다. 언어에 지배받고 또 언어를 지배하려고 하는 동안 우리는 고통의 운명을 피할 길이 없다. 그래서 문명은 자구책을 내놓았다. 그것이 저 유명한 '희생양 전략'이다.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다 은연중에 이 전략을 쓰며 살아간다.
이것은 언어에 의해 둘로 쪼개진 어느 한쪽을 나쁜 세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쪽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은 완벽하고 무오한 일치성의 존재인 것처럼 위장하는 전략이다.
이 전략은 먼저 자신이 제거하고자 하는 한쪽 때문에 지금 자신이 고통받게 된 것처럼, 자신의 인식에 자기최면을 거는 일로 시작된다. 인식에 일부러 필터를 씌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번 그렇게 색렌즈를 씌워놓으면 이제 인식은 알아서 그것이 왜 나쁜 세력인지에 대한 단서들을 잘 찾아낸다. 어떻게든 만들어낸다. 음모론에 빠진 이들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음모론을 믿기로 결정하면 이제 모든 것은 다 음모론을 지지해주는 정황들로 보이게 되는 것과 같다.
가해자-피해자 구도는 대표적으로 이 희생양 전략이 남용되는 장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며, 피해자도 가해자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 나쁜 세력인 상대를 심판의 제단에 올리면, 자신의 고통이 멎고 미칠듯 들끓던 화의 신이 진정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만연한 혐오 현상이 대체 왜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그 묘사다.
혐오가 작동한다는 것은 이미 희생양 전략이 실시되고 있다는 뜻이다. 필터가 씌인 눈으로 보고 있어서 상대가 혐오스럽다. 자신의 모든 고통의 이유인 것만 같다. 그러니 어떻게든 상대를 짓밟고 없애고자 하는 일에 혈안이 된다. 이는 다시 말해서, 상대가 지금 두렵다는 뜻이다. 두려운 것만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왜 두려운지는 분명하다. 상대가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 마성적 힘이 있는 존재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상대 앞에서 무력하다. 상대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다. 고통스럽다. 그러니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
이처럼 우리는 상대가 우리 자신의 고통의 이유라고 생각해서 두려워하고, 이제 그렇게 악마화시킨 상대를 혐오하며 희생양으로 삼으려 하게 된다.
그러나 보자. 정말로 상대가 고통의 이유인가? 상대가 없을 때는 고통스럽지 않았는가?
정직하게 보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있든 없든 자신이 경험하던 고통의 양상은 언제나 똑같았다. 심지어 어떠한 상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제거하는 일에 성공한 다음에도 고통은 계속되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같은 동일한 속성의 상대들은 끝없이 나타났으며, 그 모든 상대를 다 심판한다 해도 고통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하게, 상대가 고통의 이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삶에 적재된 그 무수한 고통의 짐을 단번에 치워보고자 우리는 희생양을 선정했고, 그에게 힘을 주었다. 우리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거대한 악마적 존재로 그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그는 우리에게 유일한 고통의 이유가 되었고, 그만 제물로 바치면 우리의 모든 짐은 해소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었던 것이다. 이것이 희생양의 전략을 통해 집전되는 주술신앙이다. 가짜 해결방안을 만들어 해결된 것처럼 믿어보려는 안간힘이다.
그러나 상대는 애초 악마가 아니다. 상대가 우리를 파멸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악마처럼 보인 것은, 희생양의 전략에 따라 자신이 바로 그런 파멸의 의도를 담은 눈으로 상대를 파멸시키려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애초 고통의 이유가 아닌 상대를 고통의 이유처럼 만든 것은 우리 자신이기에, 상대가 없어져도 그 이유는 우리에게 남는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학창시절 작고 약한 우리를 괴롭히던 덩치 큰 아이가 어느날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제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우리와 덩치도 별로 차이나지 않는 아이가 우리를 유사한 방식으로 괴롭힌다. 우리 자신과 비슷해보이는 저런 만만한 것한테까지도 작고 약한 것으로 무시받는 것 같아 우리는 이전보다 더 고통스럽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매우 흔하게 벌어지는 상황이다. 이러한 일은 대체 왜 일어나는가?
작고 약한 것이 고통의 이유라고, 자기 자신이 그 이유를 만들고 있어서다. 만든 것은 만든 이에게 귀속된다. 그러니 모든 상대가 사라져도, 어떤 이유를 만든 자기 자신이 남아있는 한, 그 이유는 계속 자신에게 작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자기 혼자 남아있을지라도 그는 이제는 작고 약한 자신을 자연이 무시해서 자기가 생존하려는 일을 괴롭힌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자기가 작고 약하지 않았으면 누구도 자기를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그 자기인식 속에서.
바로 이것이 언어가 만들어내는 최악의 폐해다.
언어는 관점을 형성하고, 관점은 렌즈가 되어 인식을 제한적으로 굴절시킨다. 쉽게 말해, 불일치로밖에 세상을 묘사할 수 없는 언어가, 불일치의 관점을 만들어내고, 그 불일치의 관점에 따라 우리는 모든 것을 불일치한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뜻이다.
"너 나 무시했어?!"라고 상시 화낼 준비를 하며 예민하게 살아가는 이는 무엇보다 먼저 그 자신이 스스로를 무시하고 있다. 자기를 늘 반푼이 같은 못나고 모자란 것으로 보는 인식이 작동하고 있어서다. 그 굴절된 자기인식이 바로 관점에서, 또 관점을 낳은 언어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불일치의 인식으로 자기 자신을 무시해서 고통스럽게 하고 있으면서, 우리는 남이 자기를 무시한다며 남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심판하기만 하면 모든 고통이 끝날 것이라는 환상을 품어왔다. 또 그 환상을 따라 실제로 행위하는 희생양 전략을 세운 뒤, 그 혐오의 의지를 집행하는 일이 당당한 자신을 지키고 드러내는 일이라고까지 착각해왔다. 오늘날의 많은 심리상담 및 영성의 이야기들이 이러한 혐오의 군상극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비극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깨달음의 현실이다.
우리는 이제 자기혐오가 그대로 타자혐오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었다.
또 자기혐오는 언어에 의한 불일치가 낳은 고통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게 되었다.
나아가 이 불일치의 고통은 언어를 중시하는 문명사회에서는 필연이라는 사실 역시도 분명해졌다.
필연을 넘어서는 것을 자유라고 말한다. 그리고 깨달음은 언제나 가장 큰 자유의 의미를 갖는다. 이 초월의 방식은 '그럼에도'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언어에 경도된 현대의 문명사회에서는 불일치의 고통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한 존재로 발견할 수 있겠는가의 그 문제다.
우선적으로 확실한 것은, 문명사회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못나고 부족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일이 필연이라면, 적어도 그것은 우리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우리는 출발할 수 있다.
자신이 자신을 못난 것으로 무시하고 있으니까, 자꾸만 남이 자기를 무시한다는 인식 또한 생겨난다. 즉,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니까, 남을 잘못한 자로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타인에게 혐오를 뒤집어씌움으로써 장발장처럼 자기만 무고하고 순결한 피해자인 척할 수 있는 가상현실을 억지로 성립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가 잘못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그 굴절된 불일치의 자기인식으로부터 모든 것 역시 굴절되기 시작했다. 그러니 돌이켜보자.
내 잘못이 아니다. 그렇기에 남의 잘못도 아니다.
이것은 관점들의 폐기다. 나의 관점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남의 관점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나의 관점을 중시하는 것도 아니고, 남의 관점을 배려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을 다 통째로 갖다버리는 것이다.
관점들은 다 반푼이밖에 안되는 불일치한 것들이다. 아무리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포장해도, 그런 것을 주장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기혐오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는 관점들을 넘어서 봐야 한다. 이 표현은 역설적이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어떠한 관점을 통해서 볼 수밖에 없는 것일텐데, 어떻게 관점을 넘어서 본다고 하는 현실이 가능한 것일까.
주동적으로 보려고 하니까 그런 것이다. 자신이 '보는 주체'라고 생각하니까 관점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미 '보는 주체'라는 표현 자체가 언어로 구성된 실체적 자신을 상정한다. 그렇게 언어로 자신을 만들어 놓고, 그러한 자신의 관점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려고 하면, 그 모든 것이 다 불일치하게 된다.
보는 것이 아니다.
보아지는 것이다. 그냥 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현실'이라고 하는 것, 즉 '현상은 실존한다.'라고 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로부터 독립적인 것이라는 의미다. 우리에게 귀속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점이 사라져도 그것은 존재한다. 또 우리가 봐야만 그것이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그것이 우리를 향해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에게로 흘러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이 우리를 만들어간다.
자신이 대체 어떠한 속성의 주체로서 보고 있는가, 이러한 관점주의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 특히 고통받고 있는 가운데 그렇게 보려는 일은, 오히려 고통만을 계속 크게 만들 뿐이다.
관점을 넘어, 언어를 넘어, 보아지는 대로 보아야 한다.
차라리 하늘에서 개구리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듯이, 그렇게 보아져야 한다.
상반되는 모순투성이로 보이는 것들을 통합하려 하지 말고, 모순 그 자체로 그냥 두고 보는 것이다. 언어로 만들어진 불일치를 또 다시 언어를 써서 일치시키려는 그 일을, 곧 고통의 이유에 또 다시 고통의 이유를 더하는 일을 이제 제발 그만 하고,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다.
이처럼 그냥 두는 것이, 그냥 보는 것이며, 그냥 보아지는 것이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겨날까?
현상은 실존하기에, 현상이 알아서 스스로를 갖춘다. 스스로 알아서 하나의 그림이 된다. 일치된 세계가 된다.
그 일치된 세계가 보아지고 있는 자신도 제자리를 찾아, 일치된 자신이 된다.
이것은 언어적으로 통합되어 이제는 모순이 없어진 자신 같은 것이 아니다. 모순투성이다. 그러나 그 모순들이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모순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감각이 생겨난다.
'재미있다.'
언어의 렌즈로 보면 원래 다 모순이다. 언어는 쪼개고 분리시킨 뒤 서열을 매겨야 한다. 계급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언어의 입장에서는 왕자와 거지가 함께하는 일이 너무나 모순적이다. 정확히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언어 자신의 권위가 부정당하며, 언어 자신의 존폐여부마저도 위협받는 까닭이다.
그러나 왕자와 거지가 원래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이 실재다.
왕자라는 것도, 거지라는 것도 애초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언어적 이름일 뿐.
우리는 어떤 때 '재미있다.'라고 느낄까?
거기에 바로 흐르는 자유가 있을 때다. 꽉 막혀있던 세계에 자유의 공기가 흘러들어올 때, 그럼으로써 폐색된 세계가 원래의 색을 찾아 다시 호흡하며 흘러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아주 흥미진진한 재미로 경험한다.
오래 전이지만 한번 떠올려보자. 2002년도 한일 월드컵 때 우리는 왜 그렇게 재미있었나? 사람들이 그 정도로 축구를 좋아해서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 시간이 '카니발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카니발은 사회에서 금지되었던 것들이 허용되는 시간, 문명이 세운 질서의 벽이 잠시 허물어지는 혼돈의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사람들은 거대한 자유의 해방감을 경험하며 재미를 느낀다.
1980년대 이전의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재미있었던 것도 동일한 이유다. 당연하게 일상을 메우던 것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제 비일상이 들어선다. 차도에 차가 없어서, 아이들이 연을 들고 질주한다. 어느 곳이나 놀이터다. 문명의 언어적 규칙이 잠시 폐기된 그 자리를 채우고 있던 것은 자유로운 생명의 빛과 그 호흡이다.
서구의 중세에는 이러한 카니발의 시간을 제도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신의 질서에 억눌려있던 이들이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정치적 장치로 삼기도 했다. 특정한 근대적 편견의 관점에 따라, 인간이 암울하게 억압되어 있던 시대라고 우리가 곧잘 생각하곤 하는 중세에서조차 이러한 정도는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이 자유로워졌다고 주장하는 현대의 문명사회임에도 인간은 오히려 더 억압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괜한 기분탓일까?
경직된 사회의 대표적인 판본은, 상기한 것처럼 언어에 의해 필연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계급을, 다시 또 언어를 써서 뒤집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급의 상하를 뒤바꾸어가는 언어게임만을 시도하고 있을 때, 또 그 정당성을 위해 하위계급의 비극만을 피해자처럼 강조하며 선전하고 있을 때, 그러한 사회는 무엇보다 언어에 경도된 사회가 된다. 실은 더 불일치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질식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현실은 사는 일이 너무나 재미없음에도, 재미있는 말도 편히 못하게 되는 현실이다. 늘 타자의 다양성이라는 계급의 문제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윤리적 억압으로 끝없이 자기검열을 이루어야 해서다. 그것이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는 길이라고 우리는 세뇌당해왔다.
이처럼 문명은 언어로 모순을 극복함으로써 스스로를 발전했다고 평가한다. 합리성이라는 가치이며, 문명사회에서 합리적인 것은 공공선을 위한 윤리적인 것이기도 하다.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정합적 정보의 알고리즘으로 문명사회는 스스로를 윤리화하며 만들어진다. 선하고 순결하며 완벽하다는 그 자기완결성으로.
그러나 그런 건 그냥 정신병원의 격리병실이다. 선하고 순결하며 완벽한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이런 현실에서 살다보니, 그 공기가 흘러들어와 인간도 자신을 선하고 순결하며 완벽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 것이 진정한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언어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자신을 언어적으로는 일치된 통합적 존재인 것처럼 만들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 것이다. 실질적으로 거기에 모든 힘을 다 쏟는다. 그래서 늘 지치고 피곤하다. 남들 앞에 언어적으로 선하고 순결하며 완벽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려는, 즉 잘 사회화된 문명인처럼 보이려는 그 일 때문에.
그러나 언어적 통합은 일치성이 아니다. 아무리 언어적으로는 모순되지 않은 것처럼 꾸며내더라도 그것은 실재의 온전성이 아니다. 온전성은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사실적으로 경험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 바로 그 삶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온전하다는 것은, 지금 세계가 재미있게 보이는 그 감각이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세계라는 것이 분명 그렇게 보아진다. 그들 자신이 언어에 의해 덜 오염되었기에, 그 존재의 온전성이 살아 숨쉬고 있어서다.
우리는 불일치한 것을 언어적으로 일치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불일치의 근본적인 이유인 언어를 또 쓰니 우리는 그 결과 더 불일치하게 될 뿐이다. 이것은 정말로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과 같다.
우리는 그냥 단순하게, 물을 붓는 일을 그만 하는 것이다.
일치한 척하는 일을, 선한 척하는 일을, 모든 것이 온전한 척하는 일을, 자신이 괜찮은 존재인 척하는 일을, 또 순결한 피해자인 척하는 일을, 부조리한 거악에 맞서 싸우는 정의의 세력인 척하는 일을, 그럼으로써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일을,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온전한 존재로 만들고 지켜낼 수 있는 척하는 그 일들을 이제 다 그만 하는 것이다. 그 모든 재미없는 일들을.
어떠한 일이 재미없는 것은 그것이 당위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문명을 이루는 언어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호구 취급받지 않으려면 다양성의 원칙에 의거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줄 알고, 그 권리가 보호받지 못했을 때는 정당하게 분노할 줄 알며, 그렇게 늘 당당하고 빠릿빠릿하게 균형잡힌 합리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문명은 우리에게 숙제를 주었다. 그 숙제를 달성해야만 우리는 누구에게도 무시받지 않는 진정한 인간이 된다며.
그렇게 문명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는 온전하지 않으며, 자기의 명령을 잘 수행한 이만이 온전성을 획득할 수 있다면서, 우리를 무시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우리 자신을 무시하지 않는데, 문명만 무시하고 있었다. 또 그 문명의 언어적 명령을 내사해서 우리 자신만이 우리 자신을 호구 취급하며 무시하고 있었다.
우리가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앞서 말했듯이, 언어에 의해 우리 자신의 존재를 조건화하게 됨으로써 고통받게 되는 일은 필연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타인의 잘못도 아니다. 우리의 존재가 반푼이가 된 이 고통이 마치 세금처럼 필연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미처 몰랐던 것일 뿐이다.
우리가 아직 덜 문명화된 야만적 폭력성 속에 있기에 고통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더 문명화된 만큼 정확히 고통도 증대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현재, 사자에게 물린 물리적 고통보다도, 도리를 모르는 사자를 오성과 한음처럼 엄격히 꾸짖어 복종시켰어야 했는데, 자신이 그런 올바른 주체적 합리성의 능력을 못가졌기에 사자 따위조차도 자신을 무시하며 문 것이라는 그 잘못된 자기인식에서 비롯한 심리적 고통이 훨씬 크다.
떠올려보면 이는 실증적이다. 복잡한 번화가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툭 치고 지나간다. 그럴 때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어깨가 밀쳐진 그 자극이 아니다. "지금 내가 만만해보여서 무시한 건가?"라는 우리 자신의 관점에 입각한 생각이 진실로 우리를 비참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만약 자신이 옳게 된 문명사회의 주인공이었다면 어떻게 할까. 달려가 드롭킥을 날리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문명인이 아니게 되니까. 문명적으로 평화로운 방식을 취해야 자신의 도덕적 권위가 생겨난다. 그러니 아마도 자신을 치고 간 그를 붙잡아 세운 뒤 사람들 앞에서 따끔히 윤리적 일침을 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올바른 정론 앞에서 그는 스스로를 몹시 부끄러워하며 우리 자신과,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정중히 사과할 것이다. 이제 사람들이 박수를 보낸다.
"와, 너무 당당하시다. 사이다였어요. 이런 것이 '어른'의 모습이군요. ^^ 오늘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배운 것 같습니다."
겸허하게 화답한다.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을 한 것뿐인 걸요. 저 분도 아마 스스로가 얼마나 귀한지 몰라서, 바로 그 '사람'을 잠깐 망각하셔서 그런 행동을 하신 것이겠지요. 이 모든 것을 온화한 관심으로 지켜봐주시던 바로 여러분이 계셔서 이 모든 일이 가능했습니다. 저를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주셔서 다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오늘 참 행복하네요. 우리가 이렇게 함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요."
자신의 관점에 입각한 주체 놀이를 잘 해보았다.
또 반대로, 이처럼 자신의 관점에 고착되어 있기에 고통이 생긴다 생각해서, 이제는 타인의 관점을 배려하겠다고 하는 경우는 어떨까.
그러면, 자신을 치고 간 그의 상태를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이해해보려고 할 것이다. 아마도 그는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일지 모른다.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다. 무언가 중대한 일이 그에게 생겼을 것이다. 어쩌면 방금 전, 번화가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그의 애인이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을지 모른다. 그는 빨리 병원으로 가야 된다는 그 마음에 주변을 배려할 여유가 미처 없었을 것이다. 아, 황급히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왠지 짠하다.
그는 얼마나 그의 애인을 사랑하는 신실한 사람이었던가. 저렇게 절실한 몸짓을 보고 있으니, 인간이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그 마음이 가슴에 벅차게 차오른다. 그는 타인을 무시하는 이가 아니었다. 실은 누구보다도 인간의 소중함을 아는 이였던 것이다.
'아, 내가 그를 아직 잘 몰랐구나. 나의 단편적인 편견으로, 나의 관점에만 사로잡혀서 그라는 '사람'을 오해했구나. 고맙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오늘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이제는 아득해진 그의 뒷모습, 그 운명적인 '스승'의 뒷모습을 향하여 한참을 고개를 숙인다. 눈물이 따듯하게 뺨을 적신다. 사람이 36.5도의 사람으로 깨어났다. 여름이었다.
이렇게 타인의 관점을 배려하는 주체 놀이도 잘 해보았다.
무슨 이런 초등학교 반장 같은 것으로 살지 못해서, 우리는 문명사회에서 고통받고 있다. 그런 유치한 것이 되라는 문명의 언어적 명령을 잘 수행하지 못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잘못된 존재로 경험하며, 나아가 다른 이들을 잘못된 존재로 만들려고 한다.
자신의 관점을 당당히 주장하고, 타인의 관점을 자상히 배려한다고 하는 이 초등학교 반장 같은 주체의 행위가 다 문명으로부터 당위적으로 명령된 것이다. 그래서 재미가 없고, 그래서 실은 고통의 이유다.
만약 관점들을 다 폐기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다른 이들과도 상관없는 일이다. 자연현상과 같다. 보이는 것만 있다.
서로가 서로를 누구나 할 것 없이 치면서 지나가고 있는 번화가의 일이다. 혼자서는 제대로 발을 딛지 못해 기우뚱거리니 서로를 치게 된다. 지진이 일어난 듯한 풍경.
탈출하자.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자. 동행인이 있다면 동행인의 손을 잡고 신속히 탈출의 행위를 집행한다. 조금 흥분된다. 모험이 생겨났다. 분명 이 순간이 재미있다.
왜인가?
문명에 자신의 존재여부를 전적으로 의존하여 위탁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일을 위해 자신이 자신의 힘을 뿌듯하게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자신이 온전함으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자신에게 보아진 지진이 자신에게로 들어와 자신이 지진으로 활동하게 된 결과다. 자신이 이 꽉 막힌 대지를 가르는 한 줄기의 진동이다. 그러니 숨구멍이 생겨났고, 열린 하늘이 보인다. 번화가는 그대로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현실이 출현했다. 사는 고통 대신에 사는 재미가 가득했던 그 현실이.
고통이 필연이라면,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유다.
자유라서 또 하나의 명령처럼 강제할 수 없다. 하고 싶은 이가 하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는 하고 싶은 이가 안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모든 고통의 이유를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관점들을 다만 그만 하려는 이가 스스로 자유를 실감한다.
관점으로 보기를 그만 하면, 실재의 세계가 보이게 되고, 그런 세계와 일치하게 된다. 세계는 본래 자유로운 것이었기에, 자신도 반드시 자유로워진다. 자유롭게 할 수 있기에 그것은 재미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아진 실재의 세계는 재미의 속성을 반드시 개방하여 드러난다. 인간이 살고 싶어지는 세계가 된다. 인간이 그 무수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지속할 수 있었던 큰 이유는, 인간은 재미를 아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관점은 그 자체로 당위다.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을 넘어, 보아야만 한다고 정해놓은 대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 관점을 고집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정해놓은 일들만 일어나야 한다고 믿는 현실부적응의 상태가 된다. 반면, 관점에서 빠져나오면 우리에게는 이제 무슨 일이든 일어나도 괜찮은 현실이 펼쳐진다. 그리고 일어나는 그 무슨 일이든 재미로 그것을 살릴 수 있는 채비가 갖추어진다. 관점의 당위만 그만 두면 그 즉시 우리가 가진 자유의 역량이 회복되는 까닭이다.
바로 이 자유의 역량으로 인간은 필연의 고통에 응답해온 것이다.
그렇게 '그럼에도'의 깨달음의 현실을 반드시 발견해, 스스로를 그곳에 위치시켜 온 것이다.
고통을 지속하는가, 고통을 이제 그만 사라지게 하는가, 이것은 자유다.
자신을 혐오하고, 타인을 혐오하면서, 자신이 계속 고통받겠다고 하는 이를 원래 말릴 방법이 없다.
그러한 자신이 이미 자유롭기에, 자기 자신을 계속 아프게 하려는 그 일도 가능한 것이라고 알릴 방법만 있다. 자신이 그만 하고 싶을 때 그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모두가 더 빨리, 더 오래, 그리고 더 많이 재미있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고통에 당위적으로 매몰되지 않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 곧 깨닫는 일은 분명한 우리의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