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현실 #5

"깨달으면 뭐 먹고 살지?"

by 깨닫는마음씨




으깬 감자에 버터와 우유를 넣고 마늘, 케일과 함께 익힌다. 그러면 영국에게 수탈당해 먹을 것이 감자밖에 없던 식민지시절의 아일랜드 전통요리가 만들어진다. 그 이름하여 콜캐넌(Colcannon). 베이컨과 사워크림, 식사빵도 함께 올려, 우리가 운영하는 가게의 새 안주로 삼을 것이다. 맛도 있고 무엇보다 의미가 있다. 삶의 모험가들에게 딱 어울린다.


먹을 것이 없어도 지혜를 짜내 먹을 것으로 만들어옴으로써 식문화라는 것은 발전해오지 않았을까. 문화라는 것에는 이처럼 '창조'의 호흡이 있으며, 그로 인한 '재미'가 있다. 그리고 그 둘은 전적으로 깨달음과 관련된 대표적인 것들이다.


틸리히는 종교와 문화의 관계를 유사하게 설정한 바 있다. 문화는 질문하고 종교는 대답한다. 그럼으로써 더는 갈 수 있는 길이 없이 고인물처럼 꽉 막힌 한계에 갇혀 있던 문화는 새로운 활로를 찾는 일이 가능해진다. 종교로 인해 창조의 숨결이 불어넣어지고 활력이 생김으로써 다시 재미있는 여행길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깨달음은 진실로 이와 같다.


우리의 세상사와 동떨어진 것이 깨달음이 아니라, 그 모든 세상사에 대한 창조적 응답으로 작동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 결과로 우리의 삶이 원래 재미있는 것이었다는 사실 또한 회복된다. 보이지 않는 무수한 사회적 장벽과 유리천장에 가로막혀 좌절해있던 우리는, 그렇게 다시 또 살고 싶어진다. 살아볼 만하겠다 싶다. 뭐 다 없어도 깨달음이 있으니까.


깨달음은 최후로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아니 더 엄밀하도록 하자. 깨달음은 최후까지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들어 있던 희망마저 날아가 버렸을 때, 그렇게 희망조차도 우리를 버렸을 때, 그럴 때 발견되는 것이 깨달음이다.


희망이 떠나간 그 자리에 남겨진 것이 분명하게 있다. 무엇이 남았는가?


판도라의 상자 자체가 남아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담겨 있던, 곧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던 그 상자가.


판도라의 상자의 본래의 이름은 바로 인간이다.


희망마저 인간을 떠나갔을 때, 인간은 인간 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희망이 존재해서 인간이 존재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했기에 희망이란 것도 존재가능했다는 사실을 만나게 된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시작부터 그 최후까지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러니 희망이 없다면, 도저히 희망조차 없다면, 지금이 깨달을 정확한 기회다.


그렇게 지금 이 시대는 깨닫기 좋은 시대다.


떠올려보자. 이 시대는 얼마나 암울한가. 대항해시대의 뒤를 이은 대혐오시대가 펼쳐져 있다. 1945년 인류는 두 번의 원자폭탄을 경험했지만, 오늘날의 우리 삶에는 365일 내내 열등감의 폭격이 쏟아진다. 심리적으로 피폭된 우리는 우울증과 공황을 감기처럼 달고 산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줄 안다. 자기관리를 못해서, 약해빠져서, 성실히 노력하지 않아서 자기 삶을 자기가 망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희망이 없다. 아니 더 정확히는 희망을 자기가 발로 찼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죄책감뿐이다.


희망이 없는 그 자리을 아무 것도 없는 자리로 놓아두지 않고 그렇게 대신 죄책감으로 채우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실은 깨닫기 좋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깨닫는 일은 자못 어려워졌다.


이는 착한 척하고 있으면 깨닫지 못한다는 말과도 연결된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왜 다 착한 척하는 데 그토록 혈안이 되어 있는가? 실은 죄책감이 커서다. 장발장이라도 된 것처럼 윤리와 다양성, 사회정의, 정치적 올바름 등을 표방함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을 기만적으로 만회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을 기만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죄책감은 결코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죄책감에 대한 이해가 굴절되었다. 죄책감에 대해서는 차라리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은 실은 죄책감을 놓을 생각이 없다고.


죄책감이야말로 자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나는 다 책임질 수 있었다."의 주체가 갖는 것이다. 그 주체는 누구인가? 신이다. 신적 주체다. 그리고 자아는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는 대표적인 주체다. 신이라는 말이 조금 멀게 느껴진다면, 왕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도 좋다. 자아는 자신이 세상 모든 것을 가엾이 여기며 돌보려 하는 세상의 왕인 것처럼 행세한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신비체험 같은 것을 통해, 자기가 세상 밖으로 나가 조감도처럼 세상을 보게 되는 메타인지의 경험을 하곤 하는데, 거기에서 그러한 메타인지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 그 주체가 바로 자아다. 이러한 신비체험을 하고는 자기가 자아를 초월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것은 '자아초월체험'이 아니라 '자아체험'이다.


이러한 이들이 체험 후에 보이는 모습을 보면 이는 더 분명해진다. 하나같이 다 자기가 이 우주의 모든 것을 전부 수용하고 품어주려 하는 신적 엄마라도 된 듯한 언행을 취한다. 세상의 왕이 출현한 것이다. 신비체험이라는 뭔가 특별해보이는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몰래 은폐시켜 놓았던 자아의 노골적인 모습 그대로가.


거듭 말하지만 자아의 문제는 단 하나다. 자꾸만 자기가 신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는 것이다. 가장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을 모방하고 흉내내려 한다.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을 참칭할 때, 그것을 오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죄책감은 실은 가장 오만한 감정이다. 죄책감을 끌어안고 시름하는 이는, 흡사 자기가 얼마나 신인지를 몸부림치며 주장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마트 바닥에 누워 발버둥치는 아이처럼.


사람들이 실은 죄책감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이처럼 자기가 신이라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 이유다.


세상사에서의 좌절을 많이 경험한 이일수록 죄책감은 더욱 포기되기 어렵게 된다. 그에게는 보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수한 영웅신화들의 내용처럼, 좌절로 말미암아 자신이 전능하고 신비한 어떤 능력을 가진 신적 존재가 되어야 그 모든 아픔이 보상될 것 같다.


깨달음도 아주 빈번하게 이러한 서사의 소재로 남용되곤 한다. 깨달음만 얻으면 자기가 무협지 주인공처럼 세상의 왕이 되어 선량한 힘을 행사하며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갈 것이라는 환상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보통 상기한 메타인지의 신비체험, 아니 이제는 이렇게 한번 명명해보기로 하자. 소위 말해 '인식론적 자아체험'을 한 이들이 자기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며 보이는 모습은 무척 전형적이다. 우선적으로 자기가 늘 보던 경전 같은 것을 갖고 와 이제는 이 어려운 경전의 내용이 완벽하게 다 이해된다며, 그것을 자기가 깨달은 증거로 삼곤 한다. 그러나 원래 메타인지는 학습과 관련된 것이다. 메타인지가 작동해 학습력이 좋아져 책이 더 잘 이해되는 것뿐이다.


이것은 아마도 좋은 대학이나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받는 지성적 가치를 갖지 못해 좌절한 이들의 열등감이 그 보상을 바라고 작동한 방식일 수 있다. 아쉬운 것은 학창시절에 메타인지를 잘 다루었더라면 SKY에 갈 수 있었을텐데, 그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해봤자 그것은 여전히 지성에 대한 사회적 가치기준에서는 SKY보다 낮게 평가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이런 방식으로 지적 열등감을 보상하려 하는 일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다음으로 이 체험자들은 이제 윤리에 집중한다. 자기가 얼마나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선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주장하려 한다. 소외된 것을 알아주고, 품어주며, 커다란 품 안에서 그것들을 통합해가는 것이 자신이 가진 깨달음의 힘이라는 식이다.


이것은 이제 엄마놀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인식론적 자아체험' 속에서는 자기는 큰 것으로, 자기가 바라보는 것은 작은 것으로 경험된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큰 것으로 보았기에 미처 생겨날 겨를이 없던, 작은 것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자기가 다 지켜주고도 싶어진다. 그렇게도 다짐한다. 세상을 아이로 보게 된 세상의 엄마가 막 출현한 것이다.


그런데 한번 보자. 자기가 아이를 제일 소중히 여기며 가장 잘 키운다고 생각하는 엄마가 있다. 그런 엄마 둘이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둘이 막 싸운다. 치열하게 투쟁한다. 자기의 양육관이 더 진정한 양육관이라며 전쟁을 벌인다.


이것이 흔히 자신이 깨달았다고 하는 이들이 서로 만나면 싸우는 그 이유다. 고답적인 선문답 하고, 메뉴얼 같은 수행단계 논하고, 자기만 아는 경전얘기 하고, 초등학교 말싸움과 그 양상은 매우 유사하다. 어떻게든 고집스럽게, 자기가 더 거대한 엄마임을, 즉 더 위대한 세상의 왕임을 상대에게 이김으로써 증명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싸움은 어떻게 귀결되는가?


대개 다음과 같은 대사로 끝맺어진다.


"두고 봐. 내가 너보다 인기 많이 얻고 돈 많이 벌어서 내 깨달음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이라는 것을 증명해줄테니."


자 이로써 우리는 이제 이 글의 초입부로 돌아오는 일에 성공했다.


자아를 따라가봤자, 자아는 단 한 걸음도 간 곳이 없다. 자기는 성장했느니, 발전했느니, 깨달았느니 하지만 늘 그 자리다.


이것은 문화에 응답하는 모습이 아니라, 정확하게 문화에 쌈싸먹힌 모습이다. 깨달음은 실종되었다.


현재의 문화에 희망이 없을 때야 깨달음은 출현한다. 희망 대신에 죄책감을 채워 어떻게든 판도라의 상자를 텅 비게 하지 않고자 할 때, 판도라의 상자는 그 자체로서 발견되지 않는다. 눈앞에 있지만 보이지가 않는다. 깨달음이 그러하다.


뻔히 눈앞에 있는데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뭔가에 씌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게 맞을 것이다. 죄책감에 씌인 것이다. 신에 씌인 것이다. 그래서 자꾸 죄책감만을 보려 하고, 신적인 자기 자신만을 보려 한다. 씌인 것이기에 이것은 현실이 아닌 꿈이다. 죄책감만을 꿈꾸고, 신적인 자기 자신만을 꿈꾸는 것이다. 신이 되는 일을 포기하려 하지 않기에 그만큼 오만한 죄책감이 거대해진 자아의 꿈이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자아는 죄책감을 먹고 산다고.


자아에게는 죄책감이라는 것이 신적인 자신에 대한 꿈을 지속하게 해주는 양분이다. 그러니 계속 먹는다.


그런데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플 것이다. 누추한 서교동 술집에서 콜캐넌 한 접시만 먹어도 배가 부른데, 자아는 온갖 파인다이닝을 다 순례해도 여전히 배가 고프다.


막혔기 때문이다.


먹어도 먹어도 만족을 모르는 것은 거기에 어떤 무한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로 가장 닫힌 유한성이 있어서다.


보자, 보자.


사방팔방으로 요란법석하게 뛰어다니는 새가 있다. 그 새는 지구를 일곱 바퀴를 주파한다 해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주릴 것이다.


왜? 나는 일이 완전히 봉쇄되어 지금 꽉 막혀 있기 때문이다.


날고 싶은데 날 수 없어서 미칠 것 같다.


자신이 태어난 존재 그대로의 빛을 뿜어내지 못하고 있는 그 '존재의 허기'가, 가실 길 없는 불만족의 정체다.


표현 그대로, 존재가 지금 가실 길이 없어서다.


희망이 없다.


그러니 지금이 깨달을 기회다.


자신이 깨닫고 싶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이해할 기회다.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죄책감이다. 이제 그만 먹는 것이 좋다. 혹자는 죄책감을 버리면 인간이 오만하게 살게 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가 신처럼 오만하게 사는 일을 지속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 죄책감이다.


죄책감을 버리면 인간은 오만할래야 오만할 수가 없다.


최후로 희망도 떠나간, 그 텅빈 판도라의 상자는 어떻게 오만할 수 있는가?


어떤 것을 책임지기에는, 심지어 자기 자신을 책임지기에도,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사방이 다 막힌 인간이 어떻게 오만할 수 있는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바로 그렇다는 걸 알고 엎어져 통곡하는 인간이 대체 어떻게 오만할 수 있단 말인가?


눈물만이 아득히 떨어져간다.


텅빈 상자 안을 가득히 채워간다.


그리고 창조가 시작된다.


우레와 같은 울음소리가 온세상을 울리는 가운데 이제 태초의 바다에서는 창조가 시작되었다.


생명이 태어난다.


새로운 창세기다.


모든 것을 잃은 인간이 모든 것을 다시 돌이키는 그 위대한 역사가.


판도라의 상자 안을 가득 채워 활기차게도 날아다니고 있는 그것은 바로 마음. 태어난 새생명의 이름.


인간은 마음을 다시 찾았다.


다시 살고 싶어졌다.


존재의 길이 새로이 활짝 열렸다.


자기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생한 마음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자신의 삶을. 그 살아있음의 비상을.


깨달으면 이제 뭘 먹고 살까?


마음을 먹고 산다.


인간 안으로 들어와 인간을 인간으로 살아있게 해주는 그 생명의 양식을.


예수도 그랬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마음이야말로 거룩한 생명의 말씀 그 자체이기에.


마음은 스스로 이루는 창조의 힘. 인간이 인간임을 고백한 그 자리에서 이 힘은 응답한다. 인간에게 마음이 들어와 인간을 위한 창조가 시작된다. 그래서 콜캐넌도 만들어진 것이다. 마음을 먹고 살면 결국 콜캐넌도 먹고 살게 된다.


누구나 삶의 모험가인 우리는 결국 이 일에 도전해보기로 한 것이다. 깨달으면 여러모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어떤 현실을 향해. 그러니 그 사실을 기억하도록 가끔 콜캐넌을 먹자. 서교동 <숲길>이 잘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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